오현석 한인텔 대표

어렸을 적 나와 내 여동생의 기억 속에 아버지는 무척이나 말이 없는 분이셨다. 사랑을 표현하는 일이 없었던 대신 아버지는 1년 중 300일 이상을 퇴근 시간이 끝나기 무섭게 집에 와서는 우리 어린 남매들과 공차기도 하고 근처 뒷산에 가서 잠자리도 잡고 때론 집 앞 텃밭에서 토마토와 고추 등을 기르며 각종 농작물과 곤충들의 이름 등을 하나하나 알려주시곤 했다. 그렇게 매일같이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는 게 얼마나 큰 사랑과 희생을 필요로 하는지 너무나 잘 알게 된 지금 그렇게 말없이 희생과 사랑으로 가족을 아끼셨던 아버지의 삶이 어른이 된 내게 스펙트럼처럼 지나가며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아! 나의 아버지] 소리 없는 사랑의 깊은 울림
아버지의 유일한 취미는 테니스였다. 우리 남매가 다 자라 더 이상 아버지와 노는 것을 재미있어 하지 않았을 무렵부터 아버지는 매주 주말 본래의 취미인 테니스를 치러 아파트 단지 테니스 코트에 가시곤 했다. 주6일 근무가 일반적이던 그 시절 일요일만 되면 새벽같이 테니스 라켓을 들고 나가 해가 떨어지고 나서야 발그레 상기된 얼굴에 온몸이 땀에 젖어 집으로 돌아오신 날은 왠지 더 따뜻하고 인자한 표정으로 우리를 대하셨던 것 같다.

좋아하셨던 만큼 실력도 뛰어나 테니스 대회가 있으면 항상 우승이나 준우승 정도 되는 트로피를 받아 오셨고 그 트로피를 자랑스러워하며 거실에 전시하곤 하셨는데, 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 반에서 친한 친구가 아버지와 같은 테니스 코트 회원이라 우연히 아버지에 대한 얘기를 들을 기회가 생겼다. 그 친구를 포함한 대부분의 테니스 코트 회원들은 특이하게도 대부분이 전문직의 고소득 가정이었고 그렇지 못했던 사실에 아버지가 주눅이 들거나 소외되지는 않으실까 걱정한 적도 있었는데 회원 모두가 아버지와 테니스를 치고 싶어 대기 번호를 뽑고 기다릴 정도로 인기가 좋다는 것이었다.

처음엔 그게 막연히 아버지가 실력이 좋아 그러려니 했지만 나중에 사정을 알고 보니 아버지만큼 초보들이 받기 좋게 공을 넘겨주는 매너 좋은 사람이 없어서라는 얘기를 들었을 때는 아버지가 우승 트로피를 안고 오셨을 때보다 훨씬 자랑스럽고 멋있어 보여 그 뒤로는 종종 테니스장에 놀러가 아버지를 구경하곤 했다. 게다가 일요일마다 새벽같이 나가시는 이유가 다른 회원들을 위해 테니스 코트를 청소하고 비품들을 정리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때는 직업이나 소득수준 따위에 신경 쓰고 있던 나 자신이 무척이나 부끄러워지기도 했다.

그러한 아버지의 영향 때문인지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사업을 하면서도 나로 인해 다른 사람이 행복해야지 나도 행복할 수 있다는 믿음을 놓지 않고 살았다. 그 덕분에 사업에 가장 중요하다는 ‘사람’의 중요성도 다른 사업가들보다 일찍 깨우치고 아직까지는 좋은 사람들과 함께 더 큰 꿈을 그리며 즐겁게 일하고 있다고 자부한다.

그렇게 큰 사랑과 열정을 품고도 말로 표현할 줄 모르고 행동으로 보여주셨던 아버지. 그런 아버지로부터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사랑해”라는 말을 들었던 순간을 잊을 수 없다. 간암으로 임종을 앞둔 며칠 전 잠깐 의식이 돌아왔을 때 나를 애타게 찾으시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해주셨던 한마디. “사랑해, 현석아.” 지금 내 목소리가 아버지에게 전해질 수 있다면 목청껏 소리 높여 말하고 싶다. “나도 사랑해요, 아버지. 꼭 아버지가 자랑스러워할 아들이 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