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NHAP PHOTO-1519> A vendor promotes his shop at a market in Tokyo October 16, 2008. REUTERS/Kim Kyung-Hoon (JAPAN)/2008-10-16 16:46:07/<저작권자 ⓒ 1980-2008 ㈜연합뉴스. 무단 전재 재배포 금지.>
A vendor promotes his shop at a market in Tokyo October 16, 2008. REUTERS/Kim Kyung-Hoon (JAPAN)/2008-10-16 16:46:07/<저작권자 ⓒ 1980-2008 ㈜연합뉴스. 무단 전재 재배포 금지.>
엔저 현상이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다. 엔·달러 환율이 작년 3분기 말 77엔 수준에서 3월 15일 현재 96엔까지 치솟았다. 올 초만 해도 전문가들은 90엔을 넘기가 힘들 것으로 예측했다. 한국·중국 등 주변국들의 반발이 워낙 거셌기 때문이다.

일본 정부가 세계의 반발을 무릅쓰고 엔저 정책을 고집하는 배경은 뭘까. 오래된 경기 침체에서 벗어나려는 고육책 성격이 강하다. 일본 경제는 1991년 버블 붕괴 후 2011년까지 21년 동안 평균 성장률이 0.9%에 불과할 정도로 장기 침체에 빠져 있다. 더구나 1995년부터는 디플레이션에 시달렸다. 이 같은 흐름은 최근까지 이어졌다. 지난해 1분기 1.4% 성장한 이후 2분기 0%, 3분기 마이너스 0.9%의 성장률을 보이며 마이너스 국면에 진입했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을 겪으면서 원자력발전소의 가동 중단 사태가 속출했고 이에 따라 일본의 천연가스 수입이 급증하면서 무역수지 적자가 장기화 국면에 접어들었다. 작년 9월 중국과 일본 사이의 영토 분쟁까지 불거지면서 일본의 대중 수출이 14%나 감소했다. 이뿐만 아니라 경기 동행지수와 선행지수가 각각 8개월, 9개월씩 하락세를 보여 경기 회복도 불투명한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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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버블 붕괴 후 경기 침체

일본 제조업의 수출 경쟁력 약화도 엔저 정책의 배경 중 하나다. 자타가 공인해 온 ‘가전 왕국’의 위상은 관련 기업들의 대규모 적자 누적으로 무너져 내렸다. 게다가 반도체 회사인 엘피다가 파산했고 자동차 역시 대규모 리콜 사태 이후 내리막길을 걸었다. 일본 정부는 급락한 엔화 가치가 일본 기업들의 수출 경쟁력을 끌어올려 제조업 경기 회복을 이끄는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글로벌 금융 불안이 해소되고 있는 점도 엔저 현상으로 이어졌다는 분석이다. 글로벌 금융 위기 이후 엔화와 원화는 서로 반대 방향으로 움직여 왔다. 미국의 신용 등급 하락이나 유로존 재정 위기를 비롯해 글로벌 금융시장에 악재가 발생할 때마다 엔화는 강세를 나타냈고 원화는 약세를 보였다.

LG경제연구원은 이에 대해 “글로벌 금융시장에서 엔화는 안전 자산, 원화는 위험 자산으로 인식됐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작년 중반 이후 유럽 중앙은행의 무제한 국채 매입 조치와 미국의 3차 양적 완화 등으로 글로벌 금융 불안이 어느 정도 가라앉으면서 위험 회피 경향이 감소됐고 자연스럽게 엔화 같은 안전 자산에 대한 수요가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강력한 양적 완화 정책이 급속한 엔저 현상을 유발했다. 아베노믹스는 무제한 금융 완화, 강력한 경기 대책, 규제 개혁을 통해 디플레이션과 엔고에서 탈출해 일본 경제를 성장 궤도로 환원하자는 것이다.

사실 일본이 양적 완화 정책을 펴온 것은 오래됐다. 일본 경제의 버블 붕괴 뒤 디플레이션이 지속되자 떨어진 경제 활력을 회복시키기 위해 경기 확장 정책을 고수했다. 글로벌 금융 위기를 겪으면서 양적 완화 정책을 비롯해 각종 경제 활성화 정책들이 시행돼 왔지만 지금까지 디플레이션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아베노믹스도 이제까지 실행된 완화 정책의 연장성에 있는 셈이다. 다만 완화 정책의 강도가 센 데다 정책 의지가 강하다는 점이 다르다.

아베 총리는 자민당 총재 시절인 지난해 11월 “일본 디플레이션과 엔고 탈출을 위해 윤전기를 돌려 화폐를 무제한 찍어내는 등 모든 수단을 동원해 경기를 띄우겠다”는 강성 발언을 통해 엔저 정책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보였다. 아베 총리는 취임 이후 각료회의에서 20조2000억 엔(약 239조7000억 원) 규모의 경기 부양을 위한 긴급 경제 대책을 확정하면서 실행에 옮겼다. 일본 정부는 “디플레이션을 해결할 때까지”, “현재 0%인 물가상승률이 2%가 될 때까지” 무제한으로 유동성을 풀겠다고 거듭 강조해왔다.

양적 완화 정책의 주요 골자는 재정지출을 늘리는 것이다. 13조1000억 엔에 달하는 추경예산안 규모는 지난 금융 위기 때의 15조9000억 엔(2009년) 이후 역대 두 번째 수준이다. 그뿐만 아니라 일본 중앙은행의 인플레 목표 수준이 기존의 1%에서 2%로 상향 조정되고 채권 매입 규모도 101조 엔으로 확대됐다. 대규모 자산 매입도 대표적인 자산 완화 정책이다. 일본은행이 1월 22일 발표한 ‘개방형’ 자산 매입 방법은 기한을 두지 않고 특정 목표를 달성할 때까지 금융자산을 매입하겠다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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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제한 양적 완화 정책이 ‘엔저의 힘’

아베 정부의 정치적 기반이 안정적인 것도 엔저 현상의 지속성을 뒷받침하고 있다. 재집권에 성공한 자민·공민 연립 여당은 2000년 이후 처음으로 중의원(하원)의 3분의 2 이상을 차지했다. 참의원(상원)에서 법안이 부결되더라도 다수당이 중의원에서 법안을 가결할 수 있게 됐다. 아베 신조 정부에 대한 지지도도 약 70%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만큼 일본인들이 아베 정부의 경기 부양책인 ‘아베노믹스’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일본 국영방송 NHK는 지난 3월 8일부터 11일까지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아베 정부를 ‘지지한다’라고 답변한 응답자가 66%로 지난달보다 2% 포인트 상승했다고 최근 보도했다.

그렇다면 엔저 현상은 어디까지 진행될까. 일본 정부는 엔화 약세 목표가 100엔이라고 공식적으로 내비치기 시작했다. 야스토시 니시무라 경제부 부대신(차관)은 “90엔대까지 떨어진 엔화 약세 기조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밝혔다. 나아가 110~120엔은 돼야 일본 경제에 역효과를 내기 시작할 것이란 의견을 제시했다.

이상재 현대증권 이코노미스트는 “구로다 일본은행 신임 총재 취임 후 양적 완화 정책이 가속화될 전망인 데다 미국 경제가 회복세를 보이면서 달러 강세가 이어지고 있어 2분기 안에 100엔대에 진입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아베 총리가 엔화 약세를 바탕으로 한 경기 부양책 ‘아베노믹스’를 밀어붙이자 세계 각국에서 끊임없는 우려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가오시칭 중국투자공사 총경리는 “일본의 양적 완화 정책은 다른 나라 돈으로 자국의 수출을 끌어올리겠다는 뜻이다. 이는 이웃 나라를 쓰레기통 취급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경고했다.

볼프강 쇼이블레 독일 재무장관도 “일본 정부의 정책을 우려한다. 중앙은행의 정책에 대한 잘못된 이해가 국제 금융시장에 유동성 과잉을 가져올 수 있다”고 비판했다.

하지만 일본의 ‘엔저 도전’에 발끈하던 주요 통상국들이 이제는 “어느 정도 용인할 수밖에 없다”는 자세로 변하고 있다. 지난 2월 러시아에서 열린 G20 재무장관 회의에서 “인위적인 환율 정책은 곤란하다”는 원론적인 말만 반복됐을 뿐 엔저 정책은 거론되지 않았다. G20의 태도는 ‘엔저 용인’이라는 해석이 우세하다.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대대적인 양적 완화 정책으로 동맹국들에 민폐를 많이 끼친 미국이 일본의 사정을 봐주고 있다는 것이다.

김학균 KDB대우증권 애널리스트는 “최근 국제사회에서는 엔저 현상을 사실상 묵인하는 시각이 우세해지고 있다”며 “선진국들은 엔화 약세를 교역조건의 개선보다 고질적인 디플레이션 타개를 위한 고육책으로 해석하고 있는 듯하다”고 분석했다.

따라서 환율 전쟁으로 비화될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일본발 글로벌 환율 전쟁이 발발한다면 필연적으로 무역 전쟁과 그에 따른 세계경제 침체가 불가피할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권오준 기자 j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