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 어찌하여 대구에서 떠돌던 중 국군 헌병에게 붙들려 다시 국군으로 입대하게 됐고 전쟁을 마치셨다고 한다. 연고지가 없는 아버지는 거의 1950년대 후반이 되어서야 부산에서 전역하셨고 그곳에서 만난 어머니와의 사이에서 필자가 태어났다.
아주 흔한 전쟁 드라마의 소재 같은 이 이야기는 물론 내가 다 커서 우연히 읽은 아버지의 자서전을 통해 알게 되었는데 이와 유사한 이야기들이 워낙 많아 슬픈 주인공의 한 사람으로만 아버지를 바라본 것이 솔직한 내 심정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우리 가족에겐 명절이 그리 행복한 것만은 아니었다. 고향을 그리워하며 쓸쓸해하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늘 우리에게는 부담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전쟁 전에 남한으로 시집오신 고모를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때 극적으로 상봉하게 된 것이었다. 물론 혈육을 찾게 되어 서로 많은 의지가 됐지만 고향에 대한 열망은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었던 것 같다. 한국과 중국은 1992년 수교했다. 나는 드디어 꿈에 그리던 아버지 고향을 멀리서나마 볼 수 있는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고 1994년께 가족과 함께 중국을 통해 아버지의 고향 근처에 가기로 결심했다. 그때는 본격적인 교류가 되지 않던 시절이라 서울에서 그곳으로 안내할 가이드 등 철저히 루트를 확인한 후 고모를 포함한 가족 일행이 중국으로 향했다. 선양을 통해 옌볜에 거점을 확보한 후 차로 몇 시간 들어가 고향이 바라보이는 중국 측 두만강 변에 도착했다.
반대편 산 위에서 바라본 아버지의 고향산천은 그대로 있었지만 선산은 모두 민둥산이 되었고 본가도 밭으로 변해 있었다. 학교나 집들은 정말 하나도 변함없이 전쟁 전 그대로라며 놀라워하셨다. 중국 쪽에 사는 교포들은 지금도 북한에 쉽게 왕래할 수 있다며 필요하다면 가족을 찾아 줄 수도 있다고 은근히 작업을 걸어 왔다. 나는 그렇게 하라고 권유했지만 한참을 생각하시던 아버지는 그냥 뒤돌아섰다. 물론 그 후 상황에 대해 자신이 서지 않아서였을 것이다.
고향을 다녀오신 후 아버지는 지금도 그곳에서 찍은 사진을 크게 확대해 벽에 걸에 놓고 바라보곤 하신다. 신기한 것은 그 후 더 이상 고향에 대한 꿈을 꾸지 않는다고 한다. 물론 이제 자식들이 장성해 가족을 꾸려 식구들이 많아진 영향도 있을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포기라는 약의 효과가 잘 들어서인지도 모르겠다.
이제 이번 주 토요일이면 아버지의 85번째 생신이다. 우리 가족은 아침 식사 후 미리 준비해 놓은 아버지의 유택인 통일동산에 다녀올 예정이다. 거기서 아버지는 또 북을 향해 눈시울을 적실 것이다. 그나마 이는 우리 세대만이 이해할 수 있는 흔한 전설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직도 좌경과 우경을 이야기하고 서로 으르렁대는 세상을 바라보며 가슴에 한 맺힌 아버지의 피눈물의 의미가 무엇인지 이 시간 조용히 되새겨본다.
신두철 에코코리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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