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이북 사람이다. 두만강 부근인 함경북도 종성군이 아버지의 고향이다. 6·25전쟁이 나기 전에 아버지는 평양에 있는 사범대학 학생이었고 전쟁이 나자 인민군 장교로 전투에 투입되었다가 도저히 사상이 맞지 않아 9·28 수복 이후 탈영해 남한으로 내려 오셨다고 한다.

어찌 어찌하여 대구에서 떠돌던 중 국군 헌병에게 붙들려 다시 국군으로 입대하게 됐고 전쟁을 마치셨다고 한다. 연고지가 없는 아버지는 거의 1950년대 후반이 되어서야 부산에서 전역하셨고 그곳에서 만난 어머니와의 사이에서 필자가 태어났다.

아주 흔한 전쟁 드라마의 소재 같은 이 이야기는 물론 내가 다 커서 우연히 읽은 아버지의 자서전을 통해 알게 되었는데 이와 유사한 이야기들이 워낙 많아 슬픈 주인공의 한 사람으로만 아버지를 바라본 것이 솔직한 내 심정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우리 가족에겐 명절이 그리 행복한 것만은 아니었다. 고향을 그리워하며 쓸쓸해하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늘 우리에게는 부담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전쟁 전에 남한으로 시집오신 고모를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때 극적으로 상봉하게 된 것이었다. 물론 혈육을 찾게 되어 서로 많은 의지가 됐지만 고향에 대한 열망은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었던 것 같다.
[아! 나의 아버지] 산 위에서 바라본 아버지 고향
한국과 중국은 1992년 수교했다. 나는 드디어 꿈에 그리던 아버지 고향을 멀리서나마 볼 수 있는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고 1994년께 가족과 함께 중국을 통해 아버지의 고향 근처에 가기로 결심했다. 그때는 본격적인 교류가 되지 않던 시절이라 서울에서 그곳으로 안내할 가이드 등 철저히 루트를 확인한 후 고모를 포함한 가족 일행이 중국으로 향했다. 선양을 통해 옌볜에 거점을 확보한 후 차로 몇 시간 들어가 고향이 바라보이는 중국 측 두만강 변에 도착했다.

반대편 산 위에서 바라본 아버지의 고향산천은 그대로 있었지만 선산은 모두 민둥산이 되었고 본가도 밭으로 변해 있었다. 학교나 집들은 정말 하나도 변함없이 전쟁 전 그대로라며 놀라워하셨다. 중국 쪽에 사는 교포들은 지금도 북한에 쉽게 왕래할 수 있다며 필요하다면 가족을 찾아 줄 수도 있다고 은근히 작업을 걸어 왔다. 나는 그렇게 하라고 권유했지만 한참을 생각하시던 아버지는 그냥 뒤돌아섰다. 물론 그 후 상황에 대해 자신이 서지 않아서였을 것이다.

고향을 다녀오신 후 아버지는 지금도 그곳에서 찍은 사진을 크게 확대해 벽에 걸에 놓고 바라보곤 하신다. 신기한 것은 그 후 더 이상 고향에 대한 꿈을 꾸지 않는다고 한다. 물론 이제 자식들이 장성해 가족을 꾸려 식구들이 많아진 영향도 있을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포기라는 약의 효과가 잘 들어서인지도 모르겠다.

이제 이번 주 토요일이면 아버지의 85번째 생신이다. 우리 가족은 아침 식사 후 미리 준비해 놓은 아버지의 유택인 통일동산에 다녀올 예정이다. 거기서 아버지는 또 북을 향해 눈시울을 적실 것이다. 그나마 이는 우리 세대만이 이해할 수 있는 흔한 전설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직도 좌경과 우경을 이야기하고 서로 으르렁대는 세상을 바라보며 가슴에 한 맺힌 아버지의 피눈물의 의미가 무엇인지 이 시간 조용히 되새겨본다.



신두철 에코코리아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