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나의 아버지] ‘사랑’을 선물하시다
“딸은 하나 있어야지!”, “엄마한테는 딸이 필요해~ 나중에 후회해.” 달랑 아들 녀석 하나 키우는 내게 지인들이 건네는 말이다. 엄마의 마음을 알아주는 건 딸, 즉 동성밖에 없다는 얘기인데, 과연 그럴까.

유독 아버지에게 특별한 정을 느끼는 내게는 좀 다르다. 돌이켜보면 난 세상을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한 가치 대부분을 아버지에게서 배웠다. 칠순이 훨씬 지난 아버지를 떠올리면 어린 시절의 몇 장면이 떠오르는 것도 그런 이유일 게다.

내 나이 여섯 살 때, 아버지는 사우디아라비아 파견 근무에 나섰다. 내 마음속, 아버지에 대한 애틋한 정은 어쩌면 이때부터 시작되었으리라. 그해 아버지가 보내준 홀로그램 크리스마스카드는 아직도 내 앨범 첫 장을 장식하고 있다.

난생처음 보는 입체 카드에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멋졌지만 무엇보다 카드 속에 막내딸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이 묻어났기 때문이다. 4년 뒤 아버지는 돌아오셨다. 다시 만난 아버지는 손가락 세 개가 없으셨다. 가족과 떨어져 지낸 그 타국에서 사고를 겪고 돌아오신 것이었다. 뭉툭해진 아버지의 손가락을 보며 난 ‘희생’이라는 의미를 깨달았다.

지금처럼 따스한 봄날이었다. 집 근처 철강 회사에 다니던 아버지는 종종 밀린 일로 식사 시간을 놓쳐 늦은 점심식사를 집에서 하시곤 했다. 엄마가 끓여낸 칼칼한 김치찌개 하나만 반찬이었던 시절, 아버지는 막 수저를 뜨다말고 우리 남매에게 갑자기 ‘복술이(강아지 이름)’는 밥을 먹었는지 묻는다.

“아니요~ 아직…”이라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아버지는 밖에 나가 복술이 밥부터 챙기시고 복술이가 밥을 맛나게 먹은 뒤에야 당신의 숟가락을 드셨다. 그것은 ‘배려’였다.

자식 키우는 부모 마음이 그러하듯, 우리 부모 역시 넉넉하지 않은 형편에도 내가 원하는 것을 해 주려고 노력하셨다. 당시 피아노 학원이 한창 유행했던 터라 옆집 친구를 따라 피아노 학원을 가겠다고 엄마를 졸라대곤 했다.

그렇게 다니게 된 피아노 학원. 재능이 있다는 피아노 선생님의 칭찬 속에 어렴풋이 꿈의 목록에 피아니스트를 넣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와의 레슨 속도가 차이가 나기 시작했다. 알고 보니 친구네 집에 피아노를 들여 놓았던 것.

차마 피아노를 사달라는 말을 꺼내지 못했던 나는 문방구에 가서 종이 피아노 건반 3장을 구입해 방바닥에 붙여 놓고 날마다 피아노 연습을 했다. 그 모습을 본 부모의 마음을 헤아리기엔 난 너무 어렸다.

아버지는 내게 2년 뒤, 중학교 입학식 날 반드시 피아노를 사주시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2년 뒤, 우리 집에는 피아노가 생겼다. ‘약속’은 하는 것보다 지키려고 노력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걸 난 그때 아버지에게 배웠다.

고등학교 1학년 겨울방학, 드디어 학원 자율화가 결정되었다. 한 번도 과외를 받아보지 못했던 내게 학원은 그야말로 꿈에 그리던 신천지 같은 곳이었다. 첫날 수강 신청을 하기 위해선 늦어도 새벽 5시까지 도착해 줄을 서야만 했는데, 당시 우리 집에서 학원까지 차로 50분 거리였으니 꽤나 멀었다.

문제는 교통수단이었다. 새벽 4시에 대중교통이 있을 리 만무하고 우리 집에는 자가용이 없었다. 전날 밤 발을 동동 구르는 내게 아버지는 당신이 직접 데려다 주겠다고 말하셨다. 그리고 그날 새벽, 펑펑 내리는 눈을 맞으며 아버지는 당신의 자전거에 나를 태우시고 새벽길을 달리셨다. 아버지의 등을 안으며 난 ‘사랑’의 의미를 깨달았다.

이제 내 나이 마흔. 하지만 내 아버지의 가치 선물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당신이 가르친 그 가치가 지금까지 인생에서 몇 번인가 마주친 막다른 골목에서 늘 불을 밝혀 주었으니 말이다.

오늘도 난 여덟 살 외손자를 바라보는 할아버지의 눈빛에서 그 옛날 나를 바라보던 아버지의 눈빛을 본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알려주려는 따스한 눈빛을.
[아! 나의 아버지] ‘사랑’을 선물하시다
문영애 출판사 수작걸다 대표

에꼴, 베스트베이비, 미즈내일에서 기자로 활동. 조선일보 행복플러스 팀장을 거쳐 여성조선 생활팀장을 지냈다. 현재 출판사 수작걸다 대표. ‘1식3찬 보약밥상’, ‘봄요리 110’, ‘열두 달 살림법’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