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M&A 성공 조건

2010년은 글로벌 금융 위기 극복의 성과가 나타나기 시작한 해였다. 우리 기업들도 예외는 아니다. 중국·인도 등과 함께 아시아 신흥 시장의 핵심인 한국은 작년 한 해 경제성장률 6.1%를 달성해 8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경상수지 흑자는 282억 달러로, 이는 역대 네 번째 규모다. 아직 작년 4분기 실적이 완전히 잡히지는 않았지만 시장은 상장사 순이익 누계가 79조 원을 돌파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이 역시 사상 최대 규모의 이익을 기록했던 2007년의 기록을 36% 이상 뛰어넘는 기록이다.
<YONHAP PHOTO-0820> 삼성전자 폴란드 공장 
    (브롱키=연합뉴스) 이유경 기자 = 삼성전자가 4월 인수한 아미카사의 냉장고와 세탁기 생산 설비가 있는 삼성전자 폴란드 생산 법인의 전경. 2010.9.8
 ylee@yna.co.kr/2010-09-08 09:45:02/
<저작권자 ⓒ 1980-2010 ㈜연합뉴스. 무단 전재 재배포 금지.>
삼성전자 폴란드 공장 (브롱키=연합뉴스) 이유경 기자 = 삼성전자가 4월 인수한 아미카사의 냉장고와 세탁기 생산 설비가 있는 삼성전자 폴란드 생산 법인의 전경. 2010.9.8 ylee@yna.co.kr/2010-09-08 09:45:02/ <저작권자 ⓒ 1980-2010 ㈜연합뉴스. 무단 전재 재배포 금지.>
기업의 ‘경영 실적 호조’라는 내부 여건 개선과 ‘위기 진정’이라는 외부 조건이 시너지를 일으키면 다음 수순은 무엇일까. 바로 투자 확대다. 2008년의 금융 위기가 이런 ‘투자 마인드’에 찬물을 끼얹긴 했지만 위기 극복이 현실이 되면서 본격적인 투자 확대에 나서려는 기업이 늘고 있다. 기업이 원하는 성과를 단기간 안에 얻을 수 있는 인수·합병(M&A) 거래 역시 큰 폭의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시장조사 업체 딜로직(Dealogic)에 따르면 2010년 글로벌 M&A 규모는 2009년의 2조2000억 달러에서 2조7400억 달러로 늘었다. 더욱이 신흥국 시장 기업을 대상으로 하는 M&A가 전체 거래의 33%인 8993억 달러를 기록해 가장 많았다.

한국도 전체 M&A 규모와 거래 건수가 늘었다. 블룸버그가 내놓은 통계를 살펴보면 2010년 한국의 전체 M&A 거래 규모는 517억4000만 달러였고 거래 건수는 961건을 기록했다. 2009년에 비해 거래 규모는 약 8%, 건수로는 14%나 증가한 수치다.

하지만 한국은 이웃한 중국이나 일본·인도 등에 비해 해외 M&A 규모에서 한참 뒤떨어져 있다. 외환위기 이전 15%를 넘어섰던 매출액 성장률이 최근 수년간 7% 수준에서 정체되고 있는 상황에서 이를 극복할 대안으로 M&A가 주목받는 것과는 대조적인 양상이다.

삼성경제연구소가 지난해 중순 최고경영자(CEO)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 조사에 따르면 ‘해외 M&A 계획이 있다’는 응답이 44%였다. 또 M&A 경험이 있는 기업의 86%가 ‘또 다른 M&A를 계획하고 있다’고 밝혔다. M&A에 대한 높은 관심은 유지되고 있는 셈이다.

성장 정체 극복할 해답은 인수·합병

높은 관심과는 별도로 경쟁국에 비해 해외 M&A 실적이 미흡한 이유는 무엇일까. SERICEO가 경영자 회원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한국 기업의 M&A 장애 요인 1위는 ‘전문 인력 및 경험 부족’이었다. 다음으로 ‘보수적인 조직 문화 및 종업원의 저항’, ‘피인수 기업에 대한 정보 부족’ 등을 꼽았다.

M&A는 양날의 칼이다. 잘되면 시장과 기술 확보를 통해 성장을 이룰 수 있지만, 실패하면 기업의 존폐 자체에 위협을 가하기 때문이다. 전략적이고 치밀한 접근이 없는 M&A는 실패에 빠지기 쉽다.

단순한 외형 확장에 만족해 ‘딜 열병(Deal Fever)’에 빠지는 게 대표적인 예다. 피터 드러커는 “M&A는 신나고 재미있는 반면 일상적 업무는 구질구질하다. 딜을 추진하는 것이 흥미진진한 일이기 때문에 경영자들은 비상식적인 M&A를 하곤 한다”고 말했다.

국내 기업들이 M&A에 대한 관심과 의욕을 보이면서도 실제 M&A 과정에서 망설이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전략의 부재가 크다. M&A 컨설팅 전문가인 보스턴컨설팅그룹(BCG) 김도원 파트너는 “해외 M&A 경험이 적은 한국 기업의 특성상 제대로 된 매뉴얼을 통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조직은 그리 많지 않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M&A의 첫 번째 성공 조건을 ‘명확한 인수 목적과 이에 대한 점검’이라고 말한다. 앞서 소개한 ‘딜 열병’을 피하기 위해선 냉철한 사고와 분석을 통해 기업을 인수하는 목적을 끝까지 견지해야 한다는 뜻이다.

글로벌 컨설팅 그룹인 베인앤드컴퍼니가 M&A에 실패한 CEO 250명에게 실패 원인을 물은 결과 ‘시너지 효과의 과대평가(66%)’가 높은 순위를 기록했다. 승자의 저주에 빠진 RBS(스코틀랜드 왕립은행)가 좋은 예.

RBS는 2000년 냇웨스트, 2002년에는 퍼스트액티브와 처칠을 인수하면서 세계 5위 은행으로 부상했다. 2007년에는 증권·투자 강화를 위해 710억 파운드에 ABN암로를 인수했다. 이는 금융계 M&A 역사상 최고 금액이다.

하지만 실사 때는 파악하지 못했던 수십억 파운드의 부실이 드러나고 금융 위기까지 일어나면서 사상 최대의 유상증자까지 실시됐다. 결국 RBS는 총 535억 파운드의 공적자금이 투입돼 ‘세계 최대의 구제금융 은행’이란 오명을 얻었다.

‘신속한 의사결정’도 성공한 M&A의 출발점이다. ‘역량 부족’과 ‘성공 가능성’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으로 미래 성장 기회를 날려버리는 경우가 허다한 것. 1995년 CEO로 취임한 이후 지금까지 130여 건의 M&A를 통해 시스코를 미국에서 최고로 역동적인 기업으로 성장시킨 존 챔버스가 대표적 사례다. 시스코는 “빠른 기업이 언제나 느린 기업을 이긴다. 가능성이 있다면 절대로 인색하지 않다”고 말했다.

전담 조직 상시 운영해야

성공적인 M&A를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타이밍’도 무시할 수 없는 요소다. 더욱이 불황기는 M&A 매수자가 협상 파워를 극대화할 수 있는 호기다. 2008년 금융 위기를 겪으면서 유럽과 미국의 알짜 기업 등 의외의 매물들이 쏟아지기 시작한 것도 최근의 트렌드다.
<YONHAP PHOTO-1629> File - In this photo taken on Jan. 27, 2009, people pass the logo of Nomura Securities Co. in central Tokyo, Japan. Nomura Holdings Inc., Japan's biggest brokerage, stayed in the black for a second straight quarter, Wednesday, Oct. 28, 2009, helped by a recovery in financial markets and the acquisition of parts of Lehman Brothers. (AP Photo/Koji Sasahara, File)/2009-10-28 17:2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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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 - In this photo taken on Jan. 27, 2009, people pass the logo of Nomura Securities Co. in central Tokyo, Japan. Nomura Holdings Inc., Japan's biggest brokerage, stayed in the black for a second straight quarter, Wednesday, Oct. 28, 2009, helped by a recovery in financial markets and the acquisition of parts of Lehman Brothers. (AP Photo/Koji Sasahara, File)/2009-10-28 17:22:28/ <저작권자 ⓒ 1980-2009 ㈜연합뉴스. 무단 전재 재배포 금지.>
노무라증권은 2008년 9월 리먼브러더스의 아시아·유럽 지역 사업부문을 인수해 명실상부한 글로벌 투자은행으로 도약했다. 일본의 자산 버블 붕괴로 급격히 추락했던 노무라는 글로벌 인력과 사업 노하우를 일시에 확보해 글로벌 투자은행으로 다시 도약할 수 있었다.

베인앤드컴퍼니의 자료에 따르면 1996~2006년간 이뤄진 2만4000건의 M&A 사례 중 불황기에 성사된 M&A가 호황기에 비해 3배 이상의 가치를 창출한 것으로 나타났다.

서류에 사인했다고 M&A가 끝난 것은 아니다. 거래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인수 후 통합(PMI: Post Merger Integration)’ 즉 사후 관리다. 단적인 예로 외국 기업엔 한국 기업이 ‘일 많이 하는 회사’로 악명이 높다.

글로벌 스탠더드와 거리가 먼 한국 기업의 근무 여건 때문에 피인수 회사 직원들이 지레 겁을 먹고 그만두는 경우도 많다. 첨단 기술과 경영 노하우를 지닌 핵심 인재들이 조직을 떠나는 것은 거래 자체가 무의미해지는 것과 같다. M&A 시너지 효과의 대부분이 피인수 기업의 인재들에 의해 좌우되기 때문이다.

핵심 인재 유출을 막기 위한 가장 빠르고 강력한 방법은 ‘퀵윈(quick win)’ 즉 빠른 성과다. 이름도 모르는 한국 회사가 인수했지만 당장 눈앞에 보이는 실적이 좋아지면 불안감과 불신이 급속도로 줄어든다. 또 피인수 회사의 직원들에게 인수 후 어떤 이익이 있는지, 어떻게 일할 것인지, 인수의 목적이 무엇인지 등을 명확하게 일러주어야 동요를 막을 수 있다.

CEO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은 ‘전담 조직’을 운영하는 것도 M&A 성공 조건 중 하나다. 시작에서 통합에 이르는 전 단계에서 M&A 추진의 전문성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수 기회를 사전에 포착하고 실사를 벌이며 거래를 마무리함과 동시에 통합 절차를 성공적으로 이끌 수 있는 역량이 필요한 건 당연지사.

따라서 프로젝트에 의해 구성된 단발성 조직이 아니라 상시적인 조직 운영을 통해 기업 내에 M&A 노하우가 조직적으로 쌓이도록 유도해야 한다. IBM은 CEO 직속으로 신사업 발굴·추진을 총괄하는 EBO(Emerging Business Opportunities)가 있는데, 이들에게는 별도의 예산 및 평가 시스템을 적용할 정도다.

노키아도 2006년 펩시콜라의 M&A 담당이었던 브루스 바우덴을 ‘글로벌 M&A’라는 신설 조직의 부서장으로 영입했다. 나브텍과 심비안 인수 등 공격적인 M&A가 모두 그의 작품이다.

장진원 기자 jj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