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시장 잃은 중국 CRO, ‘바이오코리아2024’서 적극 수주 나서
당뇨에 쓰이던 GLP 기전 치료제 등장에 비만 시장 급성장 전망
캐나다 벤처캐피털(VC)인 테랄리스캐피털(Teralys Capital)의 파트너인 세드릭 비송 박사가 말했다. 테랄리스캐피털은 캐나다 VC로는 최초로 한국 VC와 펀드 출자 및 모금에 나서는 한편 공동 운영에도 나설 계획이다.
이 같은 사실은 ‘바이오코리아 2024’의 한 프로그램인 인베스트 페어를 통해 알려졌다. 5월 8일 진행된 인베스트 페어는 제약업계의 글로벌 진출 지원을 위해 1조억원 규모로 조성될 K-바이오 메가펀드 운용사와 출자사 관계자들이 참여해 한국 바이오산업의 미래를 조망하는 자리였다.
이날부터 10일까지 사흘간 열린 ‘바이오코리아 2024’는 비송 박사의 말대로 한국 바이오업계의 긍정적인 앞날을 엿볼 수 있는 장이었다. 당장은 고금리로 투자가 줄면서 많은 바이오기업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글로벌 기업 및 투자자들의 바이오코리아 참가는 늘고 있다.
무엇보다 시장환경이 K-바이오에 유리한 방향으로 급격히 흐르고 있다. 미·중 간 갈등이 국내 기업에 다방면으로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이는 데다 지난해 최대 시장인 미국을 시작으로 열풍을 일으킨 비만치료제는 바이오헬스 시장의 파이를 급격히 키울 전망이다. ‘바이오 USA’ 패스한 우시, ‘바이오코리아’에 총력
행사를 주최하는 한국보건산업진흥원에 따르면 첫해인 2006년 20여 개국 총 300여 개사에서 출발한 바이오코리아는 이번에 50여 개국, 600여 개사로 참가 국적 및 규모가 두 배 이상 커졌다.
특히 ‘비즈니스 파트너링’ 수요는 2022년 730건에서 2024년 1500건으로 급증했다. 참여 기업 국적은 35개에 달한다. 비즈니스 파트너링은 유망기술을 보유한 신규 파트너를 발굴하려는 글로벌 제약사 등 국내외 기업들이 참여해 일대일 미팅을 통해 기술협력 및 공동연구, 기술이전, 투자 등을 논의하는 행사다. 올해 참여한 기업은 비만치료제 시장을 양분하고 있는 일라이릴리, 존슨앤드존슨 등 글로벌 제약기업부터 SK바이오사이언스, 유한양행, GC녹십자, 한미약품 등 국내 유명 기업까지 다양하다.
진흥원 관계자는 “최근 몇 년 사이 급성장한 바이오코리아를 통해 코로나19를 거치면서 국내 바이오기업들의 위상을 확인하고 있다”고 말했다. 해외 업체 중 가장 눈에 띈 곳은 전시장 입구 바로 정면에 대형 부스를 차린 우시앱텍(WuXi AppTec)·우시바이오로직스(WuXi Biologics)였다. 글로벌 상위권 CDMO(위탁개발생산)인 우시바이오와 이 회사의 자회사이자 이번 행사 스폰서인 CRO(임상수탁기업) 우시앱텍이 지난해에 이어 올해에도 바이오코리아에 참가할지 주목하기도 했다. 이들 업체가 오는 6월 미국 샌디에이고에서 열리는 ‘2024 바이오 인터내셔널 컨벤션’(바이오 USA)에 불참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지난 1월 미국 상하원이 공동 발의한 일명 ‘바이오보안법(Biosecure Act)’은 미국 연방기관이 베이징유전체연구소(BGI) 그룹과 우시앱텍, 우시바이오 같은 중국 주요 바이오기업의 제품이나 서비스 사용을 금지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들 기관, 기업에 미국의 연방자금이 유입되고 미국인의 유전자데이터가 이전되는 것을 막는다는 취지에서다. 이 법안은 최근 상원 국토안보위원회를 통과했다.
이에 따라 우시바이오와 우시앱텍은 세계에서 가장 큰 미국 시장을 뺏길 위기에 처한 상태다. 삼성바이오로직스 같은 글로벌 상위권 CDMO가 그 빈자리를 채우며 수혜를 입을 수 있다는 전망도 부상하고 있다.
이 같은 상황에서 바이오코리아에 참여한 양사는 적극적인 활동에 나섰다. 제루 장(Zheru Zhang) 우시바이오 수석 부사장은 ‘차세대 신약 플랫폼 개발 전략’이라는 주제의 스페셜 세션에 연사로 나섰다. 우시앱텍은 기업 프레젠테이션을 열고 자사의 ADC(항체-약물 접합제) 임상 역량을 설명하기도 했다. 이제 성숙 단계에 접어든 한국 바이오 업계와 이번 행사에 참여한 해외 기업으로부터 수주를 하려는 것이다. 자체 임상 및 세포주 개발이 어려운 중소 신약개발사(바이오텍)에 비용 등 측면에서 기회가 될 수 있다.
우시앱텍 관계자는 “우시앱텍 사업개발부의 모든 경영진이 이곳에 와 있다”며 “현재 한국 고객사로부터 발생하는 수익 비중은 적으나 증가하는 추세이며 앞으로 더욱 높일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관계자는 우시앱텍에 임상을 의뢰해도 미국 진출에 문제가 없냐는 질문에 “바이오보안법은 미국 연방정부 지원을 받는 기업에만 적용되므로 한국 기업엔 해당 사항이 없다”고 답했다.
한 국내 바이오텍 관계자는 “어떤 중국 CRO 관계자가 저렴한 비용으로 임상을 대행해줄 수 있다며 말을 걸어왔다”며 “중국 업체들이 적극적으로 수주 활동을 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질병 치료 넘어 ICT로
이처럼 중국 대기업이 숨 고르기를 할 동안 시장은 비만치료제의 등장으로 새로운 성장의 전기를 맞게 됐다. 글루카곤 분비를 억제하는 방식으로 혈당을 떨어뜨리는 GLP-1(글루카곤 유사 펩타이드-1) 계열 제품은 2005년 등장해 20여 년간 2형 당뇨 치료제로 쓰이다가 2021년 미국 식품의약국(FDA)으로부터 허가를 받아 비만치료제로도 쓰이고 있다. 그동안 나온 다른 성분의 비만치료제와 비교하면 부작용은 적은 대신 체중 감량 효과가 탁월하다. 지난해 테슬라 최고경영자(CEO) 일론 머스크와 할리우드 유명 배우 등이 다이어트를 위해 투약한다는 사실이 알려져 화제가 됐다.
한국바이오협회 바이오경제연구센터에 따르면 GLP-1 계열 치료제의 양대 기업인 일라이릴리와 노보노디스크는 2028년까지 세계 10대 제약사에 이름을 올릴 전망이다. 비만인구가 40%에 달하는 미국은 물론 아시아를 비롯한 신흥시장에서도 비만율이 높아지고 있는 만큼 향후 비만체료제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할 가능성 또한 크다.
이미 이 같은 기회를 포착하고 실적을 만들어내고 있는 국내 기업이 있다. 유한양행이 대주주인 바이오개발사 프로젠은 GLP-1과 GLP-2를 결합한 비만치료제 ‘PG-102’를 경구용으로 개발하고 있다. GLP-2는 관련 연구가 많이 진행된 편은 아니지만 비만에 의한 장누수현상을 해소하는 기능을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비만 치료가 국내 기업들이 강점을 보이는 정보통신기술(ICT)과 결합하며 의료·헬스케어 시장의 디지털화가 촉진될 가능성 또한 크다. 비만은 유전은 물론 생활습관에 의해서도 생기며 심혈관 및 신부전증, 당뇨 등을 유발하는 만큼 원인부터 결과까지 통합적 관리가 필요한 질환이다. 그런 측면에서 비만 환자에 대한 데이터를 수집하고, 이를 활용해 개인에게 맞춤형 관리를 제공하는 기술이 널리 활용될 수 있다.
유럽 바이오VC 쿠르마 파트너스(Kurma Partners)의 피터 노벡 파트너는 “비만 시장이 급성장하면서 노보 같은 경우 현재 MS와 협업하는 가능성을 타진하는 등 헬스케어 자체가 변화하고 있다”고 말했다.
노벡 파트너는 “단순히 비만을 치료하기보다 라이프사이클을 바꾸거나 리스크를 줄이는 사업도 투자 대상이 되면서 AI 기술을 통해 개인 맞춤형 체중관리 앱을 개발한다든가 장내 수백만 개 미생물 데이터를 시퀀싱(배열순서 규명)해서 치료제를 개발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민보름 기자 brmi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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