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나의 아버지] 12시의 심야 데이트
이런저런 사고뭉치였던 뺀질이 아들은 참 많이도 혼났다. 하지만 그런 아들을 속으로는 끔찍이도 아껴 주셨다는 걸 나는 자라나면서 차차 알게 되었다.

정말 무서웠다. 천둥 같은 호통과 추상같은 눈 부라림이면 얼어붙은 듯 제자리에서 꼼짝하지 못했다. 그랬다. 내가 어릴 적 아버지는 정말 무서운 분이셨다.

숫자들을 귀신같이 기억하고 예의범절을 강조하던 아버지에게 비록 똑똑하다는 얘기는 좀 들었지만 이런저런 사고뭉치였던 뺀질이 아들은 참 많이도 혼났다. 하지만 그런 아들을 속으로는 끔찍이도 아껴 주셨다는 걸 나는 자라나면서 차차 알게 되었다.

벌써 오래전 이야기지만, 내게도 어김없이 찾아왔던 고3 시절. 고3으로 올라가면서 나는 밤 10시 공식 야간 자습이 끝나도 밤 12시까지 학교에 남아 공부하겠다고 작정했다. 비장한 각오였다.

심야의 학교는 TV·침대·야식·친구 등 다른 유혹의 요소들을 뿌리치기에 더없이 좋은 장소라는 판단이었다. 그 판단의 당사자인 스스로를 대견해 하던 중 문제에 봉착했다.

당시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는 거의 산 중턱, 아주 외진 곳에 있었기에 그 시간에 거길 혼자 걸어 내려와 버스를 탄다는 것은 까까머리 고등학생에겐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그러나 내게는 아버지가 있었다.

사업을 하시던, 그래서인지 술을 많이 드시고 또 즐겨하시던 아버지가 이런 고민에 흔쾌히 화답하셨다. “시험을 치르는 그날까지 오늘부터 밤 12시에 내가 매일 학교로 데리러 가겠다.” 나는 아버지의 그 선언 후 아버지의 밤 시간이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나중에 내가 술을 마시는 나이가 되어서야 알 수 있었다.

그날 이후 매일 밤 12시면 나를 데리러 학교로 오셨던 아버지는 친구와의 약속, 비즈니스 미팅 등 어떤 일이 있더라도 아들과의 심야 데이트 약속만은 그해가 다 가도록 한 번도 어긴 적이 없으셨다.

큰아들은 서울대 법대를, 작은아들인 아버지는 서울대 경영대를 보내고 싶으셨던 할아버지 때문에 삼수까지 하셨던-비록 그 뜻을 이루진 못하셨지만-아버지는 정작 당신의 아들이 전공을 선택할 때에는 법대·의대를 강권하지 않고 아들의 의견을 존중해 주셨다.

그뿐만 아니라 졸업 후 광고회사라는, 어른들께는 다소 생소했던 회사에 입사할 때에도, 그리고 벤처 붐과 인터넷 열풍이 일면서 당시로서는 듣도 보도 못했던 작은 회사로 이직할 때에도 “알아서 고민하고 결정했겠지”라는 한마디로 당신의 아들에게 무한 신뢰를 보여주셨던 아버지.

그 후 군에 입대해 한창 국방의 의무를 다하고 있을 때, 면회가 안 되는 날에도 한 번씩 부대 근처까지 오셔서 행여 아들이 보일까 부대 담벼락 철조망 주위를 서성이셨던 아버지는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다 방학이 되면 고향집에 가서 한 학기 동안 일어났던 일들을 할아버지, 할머니께 밤새 미주알고주알 고해 바쳤던 속정 깊은 효자셨고, 지방 신문 신춘문예에 입선도 하셨던 섬세한 글쟁이셨고, 큰 성공은 못했지만 경영학과를 졸업한 사업가셨고, 풍류를 즐겼던 호방한 술꾼이셨고, 그래서 가정적이진 못하셨지만 심지 굳은, 또 이 못난 아들을 전적으로 믿어주고 살펴주신 나의 등대셨다.

그런 아버지가 어느덧 일흔을 바라보신다. 불현듯 아버지를 한 번 안아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은 한 3, 4년 전쯤이던가. 사랑하는 사람과 포옹하면 세상을, 아니 우주 전체를 안고 있는 듯한 행복한 느낌이 들 것이다.

아버지와도 그 진득한 사랑과 존경의 행복한 체온을 나누고 싶었다. 그래서 명절 때 부모님이 계신 부산에 갈 때면 ‘이번에 내려가면 아버지를 꼭 한 번 안아드리자. 그동안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 아버지에 대한 감사와 사랑을 포옹으로 표현해야지’라고 다짐했다.

그러나 감정 표현에 서툰 무뚝뚝한 경상도 출신의 못난 아들은 항상 머뭇거리다 기회를 놓치곤 후회 속에 다시 서울행 기차에 몸을 싣는다. 그러다 때마침 찾아온 좋은 기회. 이제 고백하건대, 이 글은 이번 설에 있을 부자간의 진한 포옹을 위해 만천하에 공개하는 나의 약속이자 사전 예고다.

[아! 나의 아버지] 12시의 심야 데이트
안병민 휴넷 마케팅 이사 (Twitter: @Minoppa)


1971년생. 서울대 언론정보학과를 졸업하고 헬싱키 경제대학원에서 MBA를 마쳤다. 대홍기획·다음커뮤니케이션·다음다이렉트자동차보험을 거쳐 현재 행복한 성공 파트너 (주)휴넷의 마케팅 이사로 고객 행복 관리에 열정을 쏟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