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서 지금까지
지난 5월 1일 남유럽 금융 위기의 진원지인 그리스에 대한 구제금융 지원 방안이 결정됐다. 유럽연합(EU)과 국제통화기금(IMF)이 2010~2012년의 3년 동안 1100억 유로를 지원하기로 한 것. 800억 유로는 연 5%의 조건으로 그리스를 제외한 15개 유로존 국가들이 분담하게 되고 나머지 300억 유로는 IMF가 지원한다는 것이 골자다.1100억 유로라는 구제금융액은 그리스가 2012년까지 만기 도래할 800억 유로의 국채를 상환하고 예상되는 재정 적자를 보전하는 데도 충분한 금액이다. 이로써 그리스는 3년 동안 필요한 유동성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스의 재정 적자가 심각한 문제로 떠오른 건 작년 10월 20일부터다. 조기 총선에서 집권에 성공한 사회당 정부는 EU 경제·재무장관회의에 참석해 ‘2009년 국내총생산(GDP) 대비 재정 적자 비율이 12.7%로 예상된다’고 폭탄 선언했다. 이는 당시 예상한 비율(6%)보다 두 배 이상 많은 수치다. 시장은 즉각 반응했다.
영국계 신용 평가사 피치가 그리스의 국가 신용 등급을 ‘A’에서 ‘A-’로 낮췄다. 하지만 이 정도의 등급 하향을 유로존 전체 금융 위기의 단초로 해석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유럽 전체에서 차지하는 그리스의 GDP 비중이 2.6%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당시 유로화의 가치가 사상 최고 수준이었던 것도 사태를 안이하게 바라본 원인이었다.
그리스 재정 적자 연쇄 도미노 그리스의 재정 적자가 다시금 주목 받기 시작한 건 2009년 12월 들어서였다. ‘두바이’ 신드롬이 막대한 재정 적자를 담보로 한 ‘빛 좋은 개살구’였다는 것이 드러나면서 각국의 재정 적자 문제가 대두되기 시작한 것.
금융가의 시선은 재정 적자 폭이 큰 남유럽 국가들에 쏠렸고 ‘PIIGS(포르투갈·아일랜드·이탈리아·그리스·스페인)’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하며 남유럽발 재정 적자 위기감이 고조되기 시작했다.
국제 신용 평가사들의 신용 등급 하향 결정은 위기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됐다. 앞서 언급한 피치는 12월 18일 그리스의 신용 등급을 ‘A-’에서 ‘BBB+’로 떨어뜨렸다. 하루 전날인 17일에는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가 그리스의 신용 등급 전망을 ‘부정적 관찰 대상’으로 낮췄다.
그리스의 재정 적자로 야기된 금융 위기는 ‘유럽의 돼지들’로 불리는 이웃 국가들의 사정도 돌아보게 만들었다. 재정 위기가 PIIGS 국가로 점염된다면 이들 국가의 대외 차입에 70~80% 정도를 의존하고 있는 유럽 전반의 금융 위기로 확대 재생산될 수 있다는 분석 때문이었다.
더욱이 스페인을 중심으로 오는 7월에 채권 만기가 집중돼 있어 사태를 가벼이 볼 수 없게 만들었다. PIIGS 모든 국가들은 과거에 재정 위기를 경험했던 국가들의 정부 부채 수준을 이미 넘어선 상태였다. 찻잔 속의 태풍 같았던 그리스 사태가 글로벌 금융 위기로 전개될 수 있다는 불안감으로 확대된 것이다.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한 독일 등 유로존 주요 국가들은 지난 2월 11일 EU 정상회담을 열었다. 하지만 이 자리에선 그리스 국가 부도(디폴트) 방지를 위한 원칙적 합의만 도출하는데 그쳤다. 지원 방안이 흐지부지됐던 가장 큰 요인은 그리스의 미온적인 대응책 때문이었다.
적극적인 긴축정책 대신 세수 확대라는 악수를 들고 나온 것. 여기에 ‘유로존 안에서 문제를 해결하자’는 프랑스와 ‘IMF와 공조해야 한다’는 독일의 입장 차도 명확한 해법을 내놓는 데 장애물이 됐다.
다급해진 그리스는 3월 3일 재정 감축에 대한 새로운 방안을 발표했다. 증세와 재정지출 축소를 통해 48억 유로 규모로 적자를 줄이겠다는 자구책이었다. 게오르게 파판드레우 그리스 총리는 긴축안을 발표하면서 EU의 지원을 절실하게 요구했고 상황이 여의치 않을 경우 IMF의 지원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뜻을 비쳤다.
3월 25일 열린 EU 정상회의에선 구제금융 지원안의 핵심 사항이었던 IMF 개입 여부가 결정됐다. 최대 현안이 타결된 후 협상은 급진전을 보였다. 4월 11일 EU 재무장관들은 긴급 화상회의를 통해 그리스에 IMF의 대출을 포함해 최대 450억 유로의 자금을 지원한다는 데 합의했다. 시장 금리를 밑도는 5% 수준의 금리로 EU가 300억 유로를, IMF가 150억 유로를 지원한다는 안이다.
유로존에 IMF까지 지원 지난 4월 22일 이어진 EU의 발표는 안정되는 듯하던 그리스의 재정 적자 위기를 더욱 심화시켰다. 당초 그리스 정부가 발표했던 4월 전망치인 국내총생산(GDP) 대비 재정 적자 비율이 12.9%를 넘어 13.6%에 이른 것.
뉴스가 나오자 유로화 가치는 최근 1년간 최저치로 떨어졌고 런던 금융시장의 2년 만기 그리스 국채 금리는 9.46%로 치솟았다. 전날보다 무려 1.27%포인트나 상승한 수치다.
그리스 10년 만기 국채 금리도 8.62%로 급등했다. 이날 무디스는 그리스의 신용 등급을 ‘A2’에서 ‘A3’로 하향 조정하고 추가 강등 가능성까지 언급하는 등 그리스 사태는 한 치 앞을 보지 못할 정도로 다급하게 돌아갔다. 4월 23일 그리스는 드디어 EU와 IMF에 450억 유로 규모의 지원을 정식으로 요청했다.
유로존 국가들과 IMF의 지원책 확정이 차일피일 미뤄지는 동안 4월 27일 발표된 S&P의 신용 등급 하향 조정은 글로벌 금융시장 전체를 패닉으로 몰고 갔다. 그리스의 신용 등급은 ‘BB+’로 3단계나 떨어졌다. S&P는 이어 포르투갈의 등급도 ‘A+’에서 ‘A-’로 2단계 내렸다.
발표 후 글로벌 금융시장 전체가 비틀거렸다. PIIGS 국가들의 채권 금리가 최고 4.78%까지 폭등한 것은 물론 크레디트디폴트스와프(CDS) 프리미엄도 큰 폭으로 확대됐다.
영국 런던 FTSE 100 지수는 2.61%, 독일 프랑크푸르트 DAX 30 지수는 2.73%, 프랑스 파리 CAC 40 지수는 3.82%가 폭락했다. 미국 다우지수도 1만1000선이 무너졌고 아시아 증시도 일제히 하락하는 등 그리스 재정 적자 위기는 전 세계로 확대됐다.
‘뒷북’ 강등이라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신용 등급 하락은 그리스 국채를 정크 본드 수준으로 만들어 버렸다. 다급해진 EU와 IMF는 드디어 지난 5월 1일 사상 유례없는 1100억 유로의 구제금융책을 결정했다. 이는 당초 거론되던 450억 유로의 두 배가 넘는 액수로, 유럽 지도자들이 그리스 파산이 불러올 파장을 크게 우려하고 있다는 것을 드러냈다.
막대한 구제금융 자금이 남유럽발 금융 위기를 막을 수 있을지 현재로서는 장담하기 어렵다. 당장 긴축재정을 위한 공공 분야 개혁 등을 그리스가 얼마나 잘 이행할지 모르고, PIIGS의 남은 국가들도 재정 불안이 여전하기 때문이다.
포르투갈의 경우 GDP 대비 정부 부채 비율이 비교적 낮지만 높은 재정 적자 비율, 낮은 국내 저축률에 따른 높은 대외 채무 의존도 등을 볼 때 채무 상환 능력이 취약하다는 평가다. 포르투갈의 위기는 스페인 등 나머지 국가로 확산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장진원 기자 jjw@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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