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을 나는 사무실’ 비즈니스 제트기의 세계

글로벌 경영 ‘첨병’…CEO·연예인 주고객
이른 새벽 활주로를 가로지르는 검은색 리무진. 차에서 내린 젊고 야망에 찬 최고경영(CEO)가 전용 비즈니스 제트기의 트랩을 오른다. 성공한 기업인을 그린 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이다.

해외에서 ‘개인용 제트기’ 또는 ‘비즈젯’으로도 불리는 전용기 서비스가 글로벌 경영 확산과 함께 국내에서도 인기를 끌고 있다.

비즈니스 제트기를 타면 아침에 서울을 출발해 점심은 도쿄에서, 저녁은 베이징에서 먹고 다시 서울로 돌아와 잠자리에 드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베일에 싸여 있는 비즈니스 제트기의 세계를 들여다본다.

지난 2007년 말 정몽구 현대·기아차그룹 회장은 중국 장쑤성 옌청에서 열린 기아차 중국 2공장 준공식에 참석하기 위해 비즈니스 제트기에 몸을 실었다.

옌청은 국내에서 직항편이 운항되지 않는 지방 소도시인데다 일반 비행기를 이용할 경우 중국의 관문인 베이징을 거쳐 국내선으로 또 갈아타야 하는 불편이 있기 때문이다.

정 회장은 전용기 안에서 임원들과 행사 일정을 상의하고 업무 브리핑을 받으며 중국 현지에 도착했다. 옌청공항에 내리자 항공기 문 앞까지 붉은 융단이 깔리고 관현악단이 ‘아리랑’을 연주하며 일행을 환영했다.

비즈니스 제트기를 타는 것은 기업인만이 아니다. 지난해 한 유명 한류 가수는 비즈니스 제트기 덕분에 서울과 도쿄를 오가는 빡빡한 공연 스케줄을 소화할 수 있었다. 애초 서울 상암 월드컵경기장에서 예정된 대형 콘서트에 초청 받았지만 다음날 오전 도쿄에서 다른 일정이 잡혀 있어 거절했다.

그러자 주최 측이 엄청난 비용에도 불구하고 전용기를 제공하기로 한 것이다. 밤 10시가 넘어 콘서트를 끝낸 이 한류 가수는 김포공항에서 전용기를 타고 곧바로 일본 하네다공항으로 출발했다.

언제 어디든 날아갈 수 있어 인기

최근 국내에서도 비즈니스 제트기를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기존 항공사 스케줄에 구애받지 않고 언제 어디든 마음만 먹으면 날아갈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매력이다. 특히 시간을 초 단위로 쪼개 써야 하는 바쁜 기업인들에게 전용기는 ‘글로벌 경영의 비밀 병기’다.

한 기업인은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는 말을 남겼지만 전용기가 없다면 사실상 실현 불가능한 꿈일 뿐이다. 전용기 임대를 통해 비즈니스 제트기의 이점을 체험한 정 회장은 지난해 보잉사의 ‘보잉비즈니스제트2(BBJ2)’를 직접 구입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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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10일 김포공항에 있는 대한항공 격납고. 성공을 꿈꾸는 미국인들의 ‘로망’이라는 14인승 걸프스트림 ‘G-Ⅳ’가 작지만 날렵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정 회장이 2007년 옌청 방문 때 탔고, 앞서 언급한 한류 스타를 도쿄로 실어 날랐던 바로 그 항공기다. 대한항공은 1995년 그룹 전용기로 들여온 이 항공기를 임대용으로 전환해 2006년부터 비즈니스 특별기 사업을 펴고 있다.

G-Ⅳ의 기내는 의외로 소박했다. 초고가품으로 장식된 호화로운 분위기와는 거리가 멀었다. 일반 항공기의 비즈니스 클래스 정도 수준이다. 앞쪽으로 4개 좌석이 마주 보는 형태로 좌우 2개씩 자리해 있다. VIP들이 앉는 자리다.

의자는 360도로 부드럽게 움직인다. 그 뒤로는 식탁을 중심으로 4명이 앉을 수 있는 자리가 마련돼 있다. 맨 끝에는 소파형의 좌석 6개가 좌우로 나란히 배치돼 있다. 주로 수행원이나 경호원들의 자리다. 소파의 팔걸이를 떼고 시트를 밀면 곧바로 안락한 침대로 변신한다.

기내에는 위성전화, 집무용 탁자, 주방 시설, 노트북을 연결할 수 있는 전원 장치, 오디오와 비디오 등을 완벽하게 갖추고 있어 ‘날아다니는 사무실’로 불린다. 김우희 대한항공 전세사업팀 차장은 “여성 승무원 1명과 정비사 1명이 동승한다”며 “일본 고객이 타면 일본어가 가능한 승무원을 배치하고 고령인 경우에는 간호사 자격증이 있는 승무원이 탑승한다”고 말했다.

이 기종은 논스톱으로 극동 러시아와 몽골·괌·동남아시아·중앙아시아·인도 동부까지 날아갈 수 있다. 중간 급유를 받으면 유럽이나 미주 운항도 가능하다. 김 차장은 “가장 자주 가는 곳은 중국·베트남·중앙아시아”라며 “특히 정기 항공편이 들어가지 않는 오지가 많다”고 말했다.

올 초에는 정정이 불안한 파키스탄에도 다녀왔다. 안전 우려 때문에 운항 여부를 고심했지만 “그런 곳에서 사업을 하는 우리 기업도 있다”는 의견에 비행을 결정했다는 후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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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요금 시간당 420만∼500만 원

G-Ⅳ의 이용자는 주로 대기업 경영진이다. 비즈니스 제트기에 익숙한 외국 고객이나 경영진이 요구해 뒤늦게 국내 업체에서 문의가 오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용 목적별로 보면 지난해 사업장 방문 등 해외 비즈니스 출장이 65%, 국내 방문이 29%, 연예인 등 기타 수요가 6%를 차지했다. 초기 G-Ⅳ를 자주 타던 그룹 회장 중 상당수가 지금은 비즈니스 제트기를 자체 구입해 그룹 차원에서 활용하고 있다.

프라이버시를 워낙 강조하다 보니 전세기사업팀은 대한항공 내에서도 좀처럼 알려지지 않은 조직이다. 2006년 출범 때부터 일해 온 김 차장은 “처음에는 ‘과연 누가 비즈니스 제트기를 탈까’, ‘돈 많은 재벌 회장들이 해외로 놀러 다니지 않을까’ 하는 호기심이 컸다”고 말했다. 하지만 김 차장이 지켜본 ‘회장님’들의 실제 모습은 예상과는 너무나 달랐다.

한 명이라도 더 태우려고 12명을 빼꼭히 채우는 경우는 다반사고 살인적인 일정도 말없이 소화해 냈다. 김 차장은 “새벽에 출발해 베이징에서 중국 정부 관료와 아침을 먹고 지방 공장에 가 직원들을 격려한 다음 상하이 사무소에 들렀다 저녁 늦게 돌아오는 회장님들도 많다”며 “빡빡한 일정에 맞춰 바쁘게 움직이는 모습이 인상적”이라고 말했다.

이용 요금은 비행 거리에 따라 시간당 420만~500만 원으로 다소 비싼 편이다. 대기 시간에는 300만~700만 원의 요금이 추가되고 연료비와 세금이 따로 붙는다. 이처럼 만만치 않은 요금에도 불구하도 비즈니스 제트기 수요는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김 차장은 “베이징·홍콩·베트남에서는 전용 터미널을 이용해 입·출국 수속이 빠르고 프라이버시가 보장된다”며 “언제 어디든 원하는 곳을 갈 수 있는 편리성과 안정성을 고려하면 ‘시간이 돈’인 CEO들에게는 결코 비싼 요금이 아니다”고 말했다.

이 회사는 최근 미국으로 비즈니스 제트기 사업을 확대했다. 국내에서 직접 전용기를 띄워 미국까지 가는 대신, 자사 정기편 퍼스트 클래스로 미국 10개 도시로 간 다음 거기에서부터 비즈니즈 제트기로 미국 전역을 연결하는 형태다.

대한항공이 지난 5월 17일 선보인 ‘미국 내 전용기 연결 서비스’는 세계 최대 비즈니스 제트기 제작사인 캐나다 봄바디어의 자회사로 미주 지역 최고의 프리미엄 비즈니스 제트기 서비스 업체 중 하나인 플렉스젯과 공동으로 운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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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서비스의 특징을 이해하려면 미국 비즈니스 제트기 시장의 구조를 먼저 들여다봐야 한다. 미국은 세계가 인정하는 비즈니스 제트기의 천국이다. 거의 1만 대에 육박하는 전용기들이 운항되고 있으며, 이들이 이용할 수 있는 전용 터미널만 해도 5000개에 달한다.

하지만 아무리 전용기 시장이 활성화돼 있다고 해도 최소 대당 가격이 100억 원이 넘는 제트기를 선뜻 구입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실제로 대부분의 미국인은 ‘항공기 공동 소유’나 ‘선불카드’라는 간접적인 방식으로 비즈니스 제트기를 이용하고 있다. 미국 전역에서 열리는 미국 남자프로골프협회(PGA) 투어에 참가할 때 전용기를 자주 이용하는 ‘골프 황제’ 타이거 우즈도 자신만의 비행기를 따로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항공기 공동 소유 업체를 통해 필요할 때마다 비즈니스 제트기를 자가용처럼 사용한다. 전용기를 직접 소유할 경우 비용도 비용이지만 유지·정비 등 관리 부담이 이만저만 아니다.

공동 소유라는 사업 모델을 처음 만들어낸 것은 1986년 설립된 넷젯이다. 넷젯은 이를 통해 비즈니스 제트기의 대중화 시대를 열었다. 현재 전설적인 투자가 워런 버핏이 이 회사의 최대 주주로 있다.

지난 2007년 대구 방문 때 비즈니스 제트기를 타고 와 화제를 모았던 워런 버핏은 미국 자동차 3사 CEO들이 전용기를 타고 구제금융을 요청하러 의회 청문회장에 참석해 구설에 오르자 “전용기는 비즈니스에 큰 도움이 된다”며 “기업 CEO들의 전용기 사용을 사악하게 보는 것은 문제”라고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대한항공, 미국 내 전용기 연결 서비스

항공기 공동 소유자는 보통 2~16명으로 이뤄진다. 16명이라면 비행기 가격의 16분의 1을 내고 2명이면 2분의 1을 낸다. 7인승 사이테이션 엑센 모델을 16명이 공동 소유 할 경우 최소 64만500달러가 필요하다.

이와 달리 선불카드는 일정 비행 시간을 미리 구매하는 것이다. 델타 에어엘리트의 10시간 선불카드는 4만3900달러부터 시작된다. 플렉스젯의 25시간 선불카드는 12만4900달러다.

대한항공이 내놓은 전용기 연결 서비스는 이보다 비용 부담을 훨씬 낮추면서 원하는 시간에 비즈니스 제트기를 이용할 수 있는 혜택을 제공한다. 정혜인 대한항공 마케팅개발팀 대리는 “미국 내 비즈니스 제트기 사업자와 상용기 사업자가 손을 잡은 첫 사례”라며 “정기편 공항과 제트기 터미널을 리무진으로 연결한다”고 말했다. 이용 요금은 시간당 리어젯 45XR(8인승)는 약 1만 달러, 챌린저 300(8인승)은 약 1만5000달러다.

대한항공은 미주노선 퍼스트 클래스 탑승객을 주 타깃으로 잡고 있다. 정 대리는 “국내 CEO 중에는 이미 미국 현지에서 선불카드 구입 등을 통해 비즈니스 제트기를 이용해 본 분들이 많다”며 “플렉스젯과의 제휴로 매우 저렴하고 안정적인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강점”이라고 말했다.

대한항공은 미국 내 비즈니스 제트기 수요는 향후 꾸준히 증가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저가 항공사들이 대거 탄생하면서 경쟁에 밀린 기존 대형사들이 노선 축소와 서비스 다운그레이드에 나서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 공항의 보안 검색이 강화되고 있는 것도 전용기 수요에는 긍정적이다. 비즈니스 제트기를 타면 입출국 수속이 편리해져 신발을 벗거나 벨트를 풀어야 하는 곤혹스러운 상황을 피할 수 있다.

글로벌 금융 위기의 영향으로 한때 전용기 매각 붐이 불었지만 지금은 주춤한 상황이다. 허희영 항공대 항공경영대학장은 “금융 위기 이후 비즈니스 제트기 시장이 큰 타격을 입을 것으로 예상했지만 소폭 하락에 그쳤다”며 “최근 경기 회복 조짐과 함께 다시 급성장세를 보이고 있다”고 말했다.

국내에서도 비즈니스 제트기 시장은 빠르게 확대되고 있다. 현재 자체 전용기를 보유한 그룹은 현대차를 포함해 삼성(BBJ2 1대, 글로벌 익스프레스 1대)과 LG(걸프스트림 G550 1대), SK(걸프스트림 G550 1대) 등 4곳이다. 허 학장은 “한화·포스코·현대중공업·STX 등이 전용기 구입을 적극 검토하고 있다”며 “내년 초면 전용기 보유 그룹이 10개가 넘을 것”이라고 말했다.

취재= 장승규 기자 skjang@hankyung.com
사진= 서범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