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산층, 노후 준비는 어떻게?

얼마 전 한 보험회사에서 FC(Financial Consultant)로 활동하는 대학 동창을 만났다. 이런저런 안부 얘기가 지난 후 요즘 자신의 비즈니스 고민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과거 보험 시장은 종신보험 시장이었는데 2000년대 들어서는 변액보험과 같은 투자형 보험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고 했다. 자신도 이런 시장의 흐름을 읽고 노후 준비를 위한 상품 위주로 영업 활동을 전개했었다고 말했다.
용인 수지지구  아파트시세가 약세를 보이고 있다
2010.04.30
/양윤모기자yoonmo@hankyung.com
용인 수지지구 아파트시세가 약세를 보이고 있다 2010.04.30 /양윤모기자yoonmo@hankyung.com
그런데 정작 최근 시장에서 자신이 경험한 것을 놓고 보니 결코 만만치 않다는 결론을 얻었다고 한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노후 준비용 보험 상품인 변액 상품의 주 가입층인 30~40대가 돈이 없다는 걸 알게 됐기 때문이다.

중소기업에 다니는 직장인들을 말할 것도 없고 대한민국에서 일류 직장으로 분류되는 대기업체 직원들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겉으로 보기엔 중산층으로 분류될 만한 사람들이 노후를 준비하는데 자금을 전혀 할당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이들이 노후 생활에 대한 고민이나 관심이 없는 것도 아니라고 한다.

평균수명이 길어지면서 ‘어떻게 하면 직장 생활을 오래할 수 있을까’라는 고민을 한결같이 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왜 한국의 중산층들은 자산 관리의 최종 종착역이라고 부르는 노후 준비에 자금을 할당하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그들이 아껴 쓰고 과소비해서일까, 아니면 저축 마인드가 부족해서일까, 또 아니면 노후 준비의 중요성을 몰라서일까.

대학 동창의 말은 이랬다. “돈이 없어서라기보다 더 정확히 말하면 현금 흐름이 너무 나쁘다. 집을 마련하면서 대출을 많이 받았고 자녀 교육비 부담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즉, 주거비와 교육비 때문에 각 가정의 현금 흐름이 너무 나빠졌고, 그러다 보니 노후 준비에 자금을 할당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형 ‘맞벌이 함정’

지난 2003년 미국에서 출간된 ‘맞벌이의 함정(The Two-Income Trap)’이란 책이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국내에서도 번역된 이 책의 결론은 이렇다. ‘정상적인 맞벌이 부부들이 과소비를 하지도 않았는데 파산자가 크게 늘었다. 그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주거비, 다른 하나는 교육비다’. 저자는 경제 전문가가 아니라 파산법 전문가로 하버드대학 법대의 엘리자베스 워런 교수인데, 그는 파산법을 연구하다가 중산층 맞벌이 부부들의 파산자가 늘어나는 것을 보고 이 책을 쓰게 됐다고 한다. 그전까지 파산자라고 하면 과소비를 하거나 돈을 관리하지 못한 사람들을 떠올렸는데, 이런 이미지들은 모두 잘못된 신화라는 것이다.

저자가 지적한 파산의 원인들의 리스트를 살펴보면 현재 우리의 모습과 너무나 유사해 놀라울 정도다. 미국의 중산층들은 자녀들을 위해 그 어느 때보다 돈을 많이 쓰기 시작했고 좋은 학군의 입찰 경쟁에 참여했다.

지속적으로 교육비는 올랐고 학군이 좋은 곳의 비싼 집에 살기 위해 더 많은 돈을 대출 받았다. 이들은 낭비하지 않았고 알뜰살뜰 가계 살림을 꾸려갔지만 결국 커다란 재정적 위험에 빠지게 됐던 것이다. 저자는 이를 두고 ‘맞벌이 함정’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우리나라 중산층들이 겪는 문제도 미국과 크게 다르지 않다. 2000년대 들어 치솟는 집값과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 우리나라 중산층들은 ‘좋은 학군 입찰 경쟁’에 뛰어들었다. 학군이 좋은 지역과 그렇지 않은 지역 간에 격차는 더욱 커졌지만 중산층들은 이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해 더 많은 금액을 교육과 집에 투자했다. 게다가 금리도 낮았다.

저금리가 주택 시장에서 의미하는 바는 조달 금리를 낮출 수 있다는 데 있다. 학군 입찰 경쟁, 집값 상승, 저금리가 맞물리면서 한국의 중산층들은 그 어느 때보다 주택에 많은 자산을 투자했다.
2011대입전략설명회가 28일 잠실 종합운동장 실내체육관에서 입시학원 메가스터디 주최로 열렸다. 학부모와 학생 1만여명이 몰려 큰 관심을 보였다.
/김병언 기자 misaeon@ 20100228..
2011대입전략설명회가 28일 잠실 종합운동장 실내체육관에서 입시학원 메가스터디 주최로 열렸다. 학부모와 학생 1만여명이 몰려 큰 관심을 보였다. /김병언 기자 misaeon@ 20100228..
여기에 교육비는 해마다 올랐다. 우리나라의 사교육비 수준이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대학 등록금은 거의 매년 인상됐다.

반면 경제가 저성장 국면으로 접어들면서 일자리가 창출되지 않자 청년들의 실업률은 높아졌다. 문은 좁아지고 취업을 해야 할 청년들이 많아지면서 이들 사이에 경쟁은 더욱 치열해졌고 이 경쟁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 한국의 중산층들은 자녀들의 스펙을 만드는 데 더 많은 자원을 투자하게 됐다.

대출금과 교육비 때문에 한국 중산층들의 저축 여력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우리나라의 평균 순 가계 저축률은 지난 1991년 24.4%였지만 지난해에는 3.9%로 대폭 낮아졌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주요 선진국의 가계 순 저축률 평균이 1991년 11.4%에서 2009년 8.3%로 3.1%포인트 떨어진 것에 비하면 우리나라의 하락 폭이 상대적으로 크다.

OECD는 우리나라의 올해 가계 저축률(저축액÷가처분소득)이 3.2%로 일본과 함께 최하위를 기록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지금과 같은 상황이라면 저축률을 단기간에 반전시키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사고의 패러다임을 바꿔야 할 때

한국의 중산층들이 미국처럼 맞벌이의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먼저 사고의 전환으로부터 시작할 필요가 있다. 행동에 앞서 더 필요한 것은 사고의 프레임이다. ‘어떻게 볼 것인가’가 더 중요하다는 얘기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가계 자산 구성에서 부동산이 차지하는 비중은 무려 80%에 달한다. 게다가 부동산 자산에는 상당한 금액의 대출이 포함돼 있다. 그것도 20~30년에 걸친 장기 대출이다. 이런 구조는 자칫 잘못하면 매우 위험한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집이라는 가정의 공간이라는 무형적 가치를 제외하고 순수하고 자산 투자의 관점에서 장기 대출을 바라보자.

20~30년간의 장기 대출이 유효하기 위해서는 집값이 최소한 같은 기간 동안 인플레이션 상승률과 대출이자 비용을 합한 것보다 더 많이 올라야 한다. 어떤 나라든지 고성장 국가를 제외하고 이런 식의 상승률을 보인 예는 거의 없다.

설사 과거에 그랬다고 하더라도 앞으로 20~30년 동안 과거와 같은 패턴이 부동산 시장에서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 낙관적인 생각이다. 게다가 이런 장기 대출은 퇴직 시점에 커다란 부담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

가령 30세에 30년짜리 장기 대출을 받으면 60세 시점에 모든 대출 상환이 끝난다. 그러나 우리나라 급여 생활자들 중 60세까지 일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노후 준비를 위해 필요한 조치 중 하나는 은퇴 시점에 부채가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부터라도 관점을 바꿔 대출을 축소하는 다운사이징 전략이 필요하다고 할 것이다.

향후 금리도 주택 시장의 편이 되기 어렵다. 최근 들어 금리가 떨어져 고정금리 대출에서 변동금리 대출로 갈아타려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는 뉴스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금리 구조를 정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상당한 리스크를 떠안는 행위가 될 가능성이 높다.

2007년 글로벌 금융 위기 이후 우리나라를 비롯한 세계 각국은 위기 탈출의 해법으로 금리를 낮추고 돈을 풀었다. 이런 정책은 정상적인 경제정책이 아닌 비상조치였다. 비상조치란 말 그대로 그 비상한 시기가 끝나면 더 이상 그 조치가 지속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금리가 오르면 변동금리로 대출 받은 사람들의 현금 흐름이 더욱 나빠질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노후 준비는 장기적 관점에서 이뤄져야 한다. 현재 시점에서 생각하지 말고 가급적이면 먼 시점에서 사고할 필요가 있다. 장기적 관점에서 지금 한국 중산층이 겪는 고통을 다시 한 번 되짚어 볼 때가 아닌가 싶다.

약력 : 서강대 신문방송학과 졸업 후 한국경제TV, 이코노미스트 등 경제 전문 매체의 재테크 담당 기자를 거쳐 미래에셋투자교육연구소 이사로 재직 중이다.

이상건 미래에셋투자교육연구소 이사 lsggg@miraeasset.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