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아버지가 근무하는 철도청에 찾아가 아버지가 직원들에게 기술을 가르치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아버지처럼 돼야겠다는 마음을 갖기도 했던 것 같다.아버지는 구례 산동마을에서 태어났다. 지금은 지리산 온천으로 유명한 곳이며 산수유나무의 빨간 열매가 가득한 곳이다. 계곡 물이 어찌나 맑은지 물속 깊이를 가늠하지 못할 정도다. 이곳에서 아버지는 유년 시절을 보내셨다고 한다.할아버지는 일제 강점기 때 일본으로 끌려가 광산에서 일하다 매몰 당해 돌아가셨다. 시신을 찾지 못해 위패만 근처 절에서 모시고 있다고 한다. 아버지는 22년생이시니 지금 89세다. 10년 전에 아버지는 나에게 할아버지를 뵈러 일본에 가자고 했는데 차일피일 미루다 지금은 갈 수 없게 됐다.요즘은 거동이 불편할 정도로 건강이 좋지 않아 할아버지 관련 자료를 챙겨주시며 “할아버지께 인사드리고 와야 한다”고 말씀하신다.할아버지께 가지 못하는 아버지의 심정을 생각하면 눈시울이 붉어진다.그런데도 할아버지 위패가 모셔진 절에 가서 공양 좀 하고 오라는 아비지의 부탁을 아직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아버지는 다섯 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를 따라 일본에 갔다. 아버지는 일본에서 철도대학을 나온 우리나라에 몇 안 되는 철도 기계 기술자로 순천철도청에 근무하셨다. 철도공무원으로 35년을 근무하다 정년퇴직하셨다.어렸을 때 아버지가 근무하는 철도청에 찾아가 아버지가 직원들에게 기술을 가르치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아버지처럼 돼야겠다는 마음을 갖기도 했던 것 같다. 그때 아버지는 자랑스러웠고 나의 미래였다.아버지 형제는 동생인 작은아버지밖에 없고 그 위로 5대가 독자로 가문을 이어왔다. 그러다 보니 친척이 거의 없다. 아버지가 남달리 자식에 대한 욕심이 많은 것도 이러한 환경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우리 집은 9남매다. 공무원 박봉에 9남매를 키운다는 것이 참으로 힘들었으리라.모든 아버지가 마찬가지이지만 아버지의 자식에 대한 사랑은 맹목적이었다. 아버지의 지론도 공부보다 건강하게 자라는 것이었다.설 명절에 고향을 찾았다. 아버지 건강이 많이 좋아진 것 같아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요즘 요양원에서 건강관리를 했던 게 건강해진 원인일 게다. 팔순이신 노부모 두 분이 모두 살아 있다는 게 자식으로서는 대단한 축복이라고 생각한다.우리 가족이 살림살이가 변변치 않아도 화목했던 이유는 아버지 때문이다. 아버지는 일에 대한 자긍심을 자식들에게 보여주셨고 가정에도 충실하셨다.이런 아버지의 영향은 그대로 가족들에게 전달됐다. 지금도 항상 어려울 때면 함께 고민하고 논의하는 가족이 있는 난 더없이 행복하다.재물에 욕심을 갖지 않은 청백리로, 일에 자부심으로 철도 역사에 큰 업적을 남기신 아버지를 나는 존경한다.아버지는 전쟁 속 숱한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꿋꿋하게 자신의 업무를 챙기신 그 일로 최근 국가유공자로 선정되셨다.구십을 앞둔 아버지는 한 시대의 역사를 간직하고 계신다. 국가에 중요한 역할을 하신 아버지가 자랑스럽다. 지병 없이 지금까지 살아계신 아버지가 감사하다. 아들의 성공을 바라며 자식이 나온 신문기사나 변동 사항 하나하나를 챙기시는 아버지가 존경스럽다.하지만 자식의 도리를 다해야겠다는 생각만 있을 뿐 현실에 파묻혀 잊곤 한다. 다시 한 번 다짐해 본다. 아버지에게 효도를 다해 드리리라. 틈만 나면 찾아뵈려고 되새겨 본다.아버지. 정말 존경하며 사랑합니다. 오래 사셔야 합니다. 100세까지 건강하셔야 해요.1964년생. 2000년 기업 간(B2B) 전자상거래 보증 사업을 추진하는 컴에이지 창업. 중소기업기술혁신협회 부회장, 중소기업중앙회 벤처위원 등으로 활동하면서 중소기업 성장을 도모하고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