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브랜드 개발 비화

아파트 브랜드는 한국만의 독특한 시장구조에서 나왔다. 연간 수만 가구를 대량 공급하는 한국과 달리 해외에서는 유사한 브랜드 체계를 찾기 힘들다. 일본의 경우 미쓰이부동산이 상품 특성에 따라 ‘파크 홈즈’, ‘파크 맨션’, ‘파크 시티’, ‘파크 타워’ 등의 브랜드를 사용하고 있고 센텍스는 ‘센텍스 홈즈’, ‘웨인 홈즈’, ‘폭스 앤 제이콥스 홈즈’ 등 공급 단지에 따라 별도로 이름을 붙이기도 한다.이런 의미에서 2000년 국내 두 회사에서 간발의 차이를 두고 동시다발적으로 아파트에 브랜드를 붙인 것은 마케팅사(Marketing史)에서 획기적인 것으로 볼 수 있다. 대림산업과 삼성물산은 ‘최초’라는 것을 두고 자존심 대결을 벌이기도 했는데, 이는 삼성물산이 ‘래미안’을 먼저 발표하기는 했지만 브랜드를 걸고 분양한 최초의 사례는 대림산업의 ‘e-편한세상(이편한세상)’이기 때문이다. 삼성물산은 ‘삼성아파트’로 분양한 뒤 입주 때 ‘래미안’을 붙인 수원 ‘래미안 천천’을 효시로 주장하고 있다.대림산업과 삼성물산의 브랜드 론칭은 전혀 다른 의도에서 시작됐다. 대림산업은 주택 사업 규모가 국내 5위 내였지만 브랜드 인지도는 이에 못 미치는 것이 고민이었다. 삼성·LG(당시)·대우처럼 그룹의 후광이 크지 않았던 것도 한 이유였다.‘회사 이름이 경쟁력이 없으면 브랜드로 시장을 넓히자’는 것이 브랜드를 만들게 된 계기였다. 그러나 당장 회사 내부의 반대에 부딪쳤다. 브랜드 광고·홍보비로 50억 원의 예산이 필요하다고 하자 1970~80년대를 거치며 건설 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회사 간부들은 ‘잘 만들기만 하면 되지 브랜드에 꼭 돈을 써야 하느냐’며 반대하고 나섰다.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를 거치며 어려워진 건설 경기에 당장 영업이익이 줄어들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브랜드 이름을 정하는 것도 우여곡절을 겪었다. 처음에는 ‘빌’, ‘움’, ‘파크’ 등으로 끝나는 이름들이 나왔다. 프레젠테이션을 앞두고 있던 한 네이밍 전문 업체 직원들은 3일 밤낮을 쉬지 않고 브레인스토밍(떠오르는 아이디어를 중구난방으로 얘기하는 것)을 하고 있었다. 피곤에 지친 나머지 한 직원이 무심코 “이런 피티(PT:프레젠테이션) 없는 편한 세상에서 살고 싶다”고 중얼거렸다. 그러나 이 말을 들은 다른 팀원들의 머리는 번쩍 뜨이고 있었다. 마침내 ‘이렇게 편한 세상’이 기초 브랜드로 나왔고 당시 뜨기 시작하던 정보기술(IT) 붐을 접목, ‘e-편한세상’이 세상에 나오게 됐다.아파트 광고에 빅 모델을 쓰는 것도 처음이었다. 톱모델인 채시라를 1년간 장기 계약하는 것은 모델 측에서도 처음이라 주저했고 경영진도 확신을 갖지 못했다. 당시는 분양하는 아파트에 한해 인쇄 광고를 찍기는 했지만 분양이 끝나면 모델 얼굴이 덕지덕지 붙어 있는 등 연예인들에게 선호도가 낮았다. 홍보팀은 채시라와 경영진 양쪽을 설득해 마침내 계약 성사 단계 이르렀다. 그러나 사장이 해외 출장 중이어서 ‘조금 더 기다리라’고 계약을 미루면서 채시라 측도 발을 뗄 기미가 보이자 참다못한 홍보팀장이 사장 귀국 하루 전에 계약서에 도장을 찍으면서 2000년 3월 ‘e-편한세상’이 전파를 탈 수 있었다.삼성물산의 래미안은 이보다 두 달 빠른 2000년 1월 론칭 광고가 시작됐다. 삼성물산은 삼성이라는 강력한 후광효과로 상품성에서는 우위가 있었지만 무조건 최고여야 한다는 삼성 브랜드에 부합하지 못하고 있었다. 확실한 차별적 가치를 지닌 강력한 브랜드가 필요하다는 인식 아래 브랜딩 작업이 시작됐다.사내 공모와 네이밍 전문 회사의 참여로 진행됐고 최종적으로 ‘리벡스(LIVEX)’, ‘다우스(DAUS)’, ‘이하임(e-Heim)’ 등의 후보안을 제치고 ‘래미안’이 선택됐다. 삼성물산은 론칭 광고에서 빅 모델을 쓴 것 외에는 스타를 광고 모델로 쓰지 않고 있다. 처음 모델로 썼던 황수정이 마약에 연루된 데다 ‘최음제’ 발언까지 겹치며 이미지 동반 실추라는 나쁜 사례를 경험했기 때문이다. 이후 삼성물산은 제품 자체의 장점에 집중해 일반인 모델 위주로 광고를 제작하고 있다. 다소 늦은 2002년 9월 브랜드를 론칭한 GS건설(당시 LG건설)은 처음 ‘예지움’으로 브랜드를 정했지만 발표 직전에 신성건설이 ‘미소지움’을 내놓으면서 전략을 바꿔야 했다. ‘자이(Xi)’는 원래 네이밍 전문 회사가 제안할 때 최종안이 아닌 ‘이런 것도 고민할 수 있습니다’라고 곁다리로 써 놓은 것으로, 처음에는 아무도 관심 있게 보지 않았던 것이다. 자이는 원래 LG전자의 프리미엄 전자 제품인 엑스캔버스(X-Canvas), 엑스노트(X-Note)의 엑스(X)에서 따온 단순한 아이디어였다.그러나 최종 브랜드를 폐기하는 우여곡절을 겪으며 ‘비슷한 이름이 아예 나오지 못하도록 하자’는 절치부심 끝에 자이를 선택한 것이다. 논의 과정에서 나온 ‘움’, ‘팰리스’, ‘빌’ 등 건축물과 아파트를 연상시키는 단어들은 모두 폐기했다. 기억하기 쉽지만 건물 이상의 가치를 제공하지 못한다는 이유였다. 또 당시 유행하던 첨단기술(IT)을 연상케 하는 ‘e’, ‘사이버’ 등도 배제했다. 트렌드에는 맞지만 고급스럽지 않기 때문이었다. 기존의 제안서들이 모두 다 폐기되면서 마지막에 남은 ‘자이’가 선택됐다.2000년 직후 아파트 브랜드가 우후죽순으로 난립하면서 비슷비슷한 이름이 여기저기 등장하기 시작했다. 금강주택은 ‘센테리움’을 출시했다가 ‘센트리움’을 출시한 동도건설이 소송을 걸면서 ‘펜테리움’으로 개명하는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다.우종국 기자 xyz@kbizweek.com---------------------------------------------------------------------------------------- l 부동산114가 지난 2009년 12월 14~17일 전국의 부동산114 회원 1402명을 대상으로 ‘2009년 하반기 아파트 브랜드 선호도 및 인지도’를 e메일을 통해 조사한 결과 전년에 비해 인지도가 오른 주요 브랜드는 △래미안 △푸르지오 △e-편한세상 △더샵(the #) 등이었다. 이들 브랜드의 경우 수도권 분양 물량이 상대적으로 많았고 청약 수요가 몰리는 등 이슈가 된 지역에서 분양 공급을 많이 한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인천 송도나 서울 도심 뉴타운, 광교신도시 등 선호도가 높은 지역에서 분양에 나섰던 브랜드의 인지도가 크게 높아졌다.선호도와 인지도가 높은 10대 아파트 브랜드로는 전년과 동일하게 △더샵 △래미안 △센트레빌 △아이파크 △위브 △자이 △캐슬 △푸르지오 △힐스테이트 △e-편한세상(가나다순)이 이름을 올렸다. ‘아파트 브랜드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브랜드는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는 래미안·자이·푸르지오가 전국 기준 톱3를 지켰다. 이 밖에 상위권 브랜드 인지도는 수도권과 지방에서 미묘한 차이를 보였는데 수도권에서는 힐스테이트가, 지방에서는 캐슬의 인지도가 상대적으로 높았다.지역별로 선호하는 브랜드는 약간 차이를 보였다. 수도권을 제외한 지방에서는 휴먼시아가 10위권에 이름을 올려 눈길을 끌었다. 인천에서는 송도지구에 대규모 분양을 진행하고 있는 더샵의 선호도가 타 지역보다 두드러지게 높았다. 울산에서는 1000가구 이상 규모의 대단지 분양이 두 곳이나 진행된 푸르지오의 선호도가 크게 증가했다.한편 몇몇 컨소시엄 사업장의 고유 명칭이나 특화한 서브 콘셉트의 브랜드를 아파트 브랜드로 인식하는 경우도 등장했다. 서울 반포지구의 래미안 퍼스티지가 대표적이다. 다만 기존 대표 브랜드를 그대로 사용한 경우보다 고유 명칭 등을 사용한 경우에는 대단지이거나 지역을 대표할 만한 이슈 단지인 경우에도 홍보 효과는 기존 브랜드를 그대로 사용한 경우보다 다소 낮은 것으로 분석됐다.김한나 부동산114 미래에셋부동산연구소 선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