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가뭄 어떻게 풀까
시중에 돈 가뭄이 심하다고 한다. 그러나 정확하게 표현하면 돈이 제대로 돌지 않고 있는 것이다. 2008년 9월 15일 벌어졌던 리먼브러더스 도산 사태 이후 금융 경색을 막기 위해 한국은행이 네 차례에 걸쳐 기준금리를 5.25%에서 역대 최저 수준인 3%대로 내린 바 있다. 이도 모자라 공개시장 조작 등을 통해 총 19조5000억 원에 달하는 자금을 세 달여에 걸쳐 시중에 살포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장의 자금 사정이 좋아졌다는 징후는 보이지 않는다. 아궁이에 불은 많이 땠다고 하는데 정작 방 안의 체감온도는 점점 떨어지고 있는 형국이다.왜 이런 현상이 벌어지는 것일까. 한국은행이 풀었다고 하는 돈이 시중에 풀리지 않고 금융권에서만 맴돌다가 다시 한국은행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2008년 12월 중순에 한국은행은 환매조건부채권(RP)의 매각 규모를 금융권의 응찰 규모인 10조4000억 원에 크게 못 미치는 5조 원으로 축소한 바 있다. 한마디로 금융권에는 자금이 넘치지만 시중에 공급되는 파이프가 막히게 되니까 역류하고 있는 것이다.그러면 자금이 시중에 풀리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은행 등 금융회사도 기본적으로 이윤을 추구하는 집단이다. 대출을 해야 이자 수익이 들어오고 그래야만 고객들이 맡긴 돈에 대한 이자도 지급하고 은행 운영에 들어가는 비용도 생기는 것이다. 은행의 입장에서는 대출을 많이 할수록 수익이 더 커지는 구조다. 그런데 문제는 대출이라는 것이 이자라는 수익을 가져다주기도 하지만 원금 자체가 날아갈 수도 있는 양면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렇기 때문에 금융권에서는 요즘처럼 불분명한 때에 더욱 보수적으로 자금을 운용할 수밖에 없다.물론 정부의 바람대로 자금난에 허덕이는 중소기업에 직접적으로 자금이 지원될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중소기업의 담보 능력은 한계에 달했기 때문에 추가 자금 지원이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것이 문제다. 기존의 자산들은 이미 담보로 제공된 것이 대부분이고, 그나마 그 담보물이라는 것도 경기 침체로 담보의 가치를 제대로 못하는 것이 상당수 있기 때문이다.주택은 기본적인 수요가 많기 때문에 금융권에서 차압을 하더라도 처분에 따른 손실이 없거나 규모가 작다. 그러나 공장의 경우는 경기의 부침에 따라 담보 가치가 크게 달라진다. 경기가 좋을 때는 공장 부지를 구하기 어려우니 자산 가치가 올라간다고 하더라도 경기가 나쁠 때는 팔려는 매물은 많지만 사려는 사람이 없어 시세 형성조차 안되는 경우가 많다.이 때문에 중소기업을 지원해야 한다는 총론에는 누구나 공감하면서도 각론에 들어가면 대출은 실제로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담보도 없이 신용만으로 대출을 해 주었다가 문제가 생기면 대출해 준 담당자나 지점장만 문책을 받을 것이 뻔하다. 중소기업 지원이라는 명분은 구두선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실제로 중소기업 대출에 대한 금융권 대출 담당자들의 애기를 들어 보면 알 수가 있다. 2008년 10월 한국은행이 발표한 금융회사 대출 행태 서베이 결과에 따르면 중소기업은 마이너스 41점으로 주택 담보대출 마이너스 9에 비해 대출의 위험도를 아주 높게 잡고 있다고 조사되고 있다. 더구나 이런 현상은 불경기와 맞물려 점점 심화되고 있다고 한다.이런 현실 속에서 한국은행의 유동성 공급을 시중에 풀 수 있는 방법은 담보대출밖에 없다. 정부는 2008년 11월 3일 6억 원 이상의 고가 주택에 대해 대출 한도(LTV)를 기존의 40%에서 60%로 확대한 바 있다. 그러나 정작 고가 주택이 밀집된 강남·서초·송파 3개구를 제외함으로써 그 효과가 제대로 나타나고 있지 않다. 표면적인 이유는 부동산 시장이 불안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미국발 경기 침체가 전 세계로 확대되고 있는 상황에서 담보대출 한도를 푼다고 해서 강남 집값이 급등할 가능성은 그다지 높지 않다.더구나 대출 한도를 확대하더라도 현재 상황에서 신규 수요가 급격하게 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시중 대출금리 수준이 아직은 매매 수요를 자극할 만큼 떨어지지 않은 때문이다. 현재 기준금리만 보면 2004년 말의 3.25%보다 낮은 역대 최저 금리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주택 담보대출 금리의 기준이 되는 양도성예금증서(CD)금리를 보면 2008년 12월 31일 현재 3.93%로 2004년 11월 중순에 기록했던 3.35%보다 높은 편이다. 기준금리는 그 당시보다 0.25%포인트나 낮은데 비해 CD금리는 오히려 0.59%나 높은 것이다. 기준금리와 CD금리 간의 스프레드가 0.93%나 벌어져 역대 최저 수준이었던 2004년 11월 중순의 0.10%에 미치지 못하는 것은 물론 지난 5년간 평균 스프레드인 0.38%에도 크게 못 미치는 수준인 것이다. 물론 리먼브러더스의 도산으로 촉발된 금융 위기가 한창이었던 2008년 10월에 스프레드가 1.93%까지 벌어졌던 것을 감안하면 그동안의 한국은행의 노력은 칭찬받을만하지만 아직도 갈 길은 멀다.아궁이 온도와 방 안의 온도가 다른 이유는 여기에만 있지 않다. 시중은행 내부의 보수적인 대출 분위기도 한몫하고 있다. 은행에 따라 대출금리를 정하는 기준은 조금씩 다르지만 변동금리의 경우 CD금리를 기본으로 하고 있다. 은행이 비용이나 이익을 감안해 CD금리에 일정한 가산 금리를 붙이는데, 과거 시중에 자금 사정이 풍부했을 때는 평균적으로 1% 이하에서 결정됐다. 이 때문에 4%대의 대출금리가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나 현재는 은행마다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평균적으로 가산 금리를 2% 정도로 적용하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기준금리가 역대 최저 수준으로 내려왔지만 시중 대출금리는 5% 후반이나 6% 초반에서 멈춰 있는 것이다.물론 은행의 입장에서는 지난 가을 금융 위기 때 일시적인 자금난을 돌파하기 위해 높은 수준의 정기예금을 유치했고, 최근에는 국제결제은행(BIS) 자기자본 비율을 맞추기 위해 높은 금리의 후순위 채권을 발행한 것이 부담이 되기 때문이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예금금리보다 대출금리가 더 낮아지는 이자 역전 현상이 벌어질 수 있다.이것은 반대로 생각해 보면 강남 3구의 대출 한도 확대가 수요 확대로 바로 이어지지는 않을 것이라는 방증이기도 하다. 그러면 실수요자들이 원하는 대출금리 수준은 어느 정도일까. 2008년 12월 말에 4만여 아기곰 동호회 회원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 737명 중 22% 정도만 현행 대출금리 수준인 6.0% 정도라도 대출을 받아 내 집 마련에 나설 수 있다고 응답했고 나머지 78% 정도는 현재 대출금리 수준보다 더 내려가야 내 집 마련에 나설 것이라고 응답했다. 조사에 응한 737명의 평균 희망 금리는 5.0%였다. 현재의 대출금리 수준에서 최소한 1%포인트 정도 더 내려가야 대출 수요가 늘어난다는 의미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강남3구의 대출 한도 확대는 시중의 자금 사정을 완화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현재 대출이 막혀 있는 자영업자나 중소기업 경영자의 경우 주택 담보대출을 통해서라도 운영 자금을 융통할 수 있다면 현재의 위기를 헤쳐 나가는 데 큰 힘이 될 것이다. 또한 송파 잠실의 대규모 입주로 촉발된 역전세란을 해소하는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 2008년도에 송파구에만 2만2000여 가구가 입주하면서 인근의 전세가를 떨어뜨렸다. 전세가가 하향 안정화되는 것 자체야 문제가 아니지만 전세금을 제때에 돌려받지 못해 이사를 가지 못하는 부작용까지 나타나고 있는 형편이다. 이럴 때 강남3구의 대출 한도를 다른 곳과 같은 수준인 60%로 확대한다면, 대출을 받아서라도 전세금을 해결해 주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에 역전세란 해소에 일조할 수 있는 것이다.아궁이에 불을 때는 것은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아궁이에 불을 때는 이유는 방을 따뜻하게 만드는 데 있다. 아궁이가 막혔다면 그것을 먼저 뚫어주고 불을 때는 것이 맞는 순서다.미국 캘리포니아에 있는 마케팅 회사의 최고재무관리책임자(CFO)로 재직 중이며 국내 최대 부동산 동호회인 ‘아기곰동호회’의 운영자이자 저명한 부동산 칼럼니스트다. 어느 쪽에도 치우침 없는 객관적인 사고와 통계적 근거를 앞세우는 과학적 분석으로 노무현 정부의 부동산 기조를 정확히 예측한 바 있으며 기존의 부동산 투자 이론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켰다는 평을 듣고 있다. 최근 신간 ‘부동산 비타민’을 내놓았다.아기곰 a-cute-bear@hanmail.net©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