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급 인터뷰
리먼브러더스의 파산으로 불거진 미국의 금융 불안이 심상치 않다. 사상 초유의 금융사 도산 사태에 미국의 월스트리트는 공포에 휩싸여 있다. 앨런 그린스펀 전 미국 연방제도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은 “100년에 한번 올까 말까한 금융위기”라고 말했다.위기의 근본 원인은 무엇이고, 이 위기는 언제쯤 수습될까. 그 답을 찾기 위해 한때 ‘미스터 엔’으로 유명했던 사카키바라 에이스케(67) 와세다대 교수를 찾았다. 미국 정부가 경영 위기에 몰린 보험사 AIG에 850억 달러 규모의 긴급 구제금융을 발표한 9월 17일. 일본 도쿄 아카사카에 있는 연구실에서 만난 사카키바라 교수는 “미국의 금융 불안은 2010년까지 지속될 것”이란 비관적인 전망을 내놓았다.그때까지 미국의 집값 하락이 이어질 것이기 때문에 위기는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는 게 그의 분석이었다. 사카키바라 교수는 “이번 위기는 근본적으로 과잉 유동성에 의한 버블(거품)이 완전히 해소되기 전까지는 끝나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하기도 했다. 사카키바라 교수의 미국 금융 위기에 대한 진단과 전망을 들어보자.“이번 위기는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 담보대출) 부실 문제 때문만이 아니다. 그동안 금융시장에 범람했던 다양한 형태의 증권화 상품 가격이 일시에 떨어지면서 대형 투자은행들이 큰 손해를 본 것이다. 미국의 투자은행 ‘빅5’ 중 메릴린치 리먼브러더스 베어스턴스 등 3개사가 쓰러지거나 위기에 처했다. 1위인 골드만삭스와 2위 모건스탠리도 앞으로 안전하다는 보장이 없다. 이들도 미국 중앙은행에 손을 벌리지 말라는 법이 없다.”“AIG에 대한 구제금융은 시장의 파탄을 막기 위한 고육책으로 이해할 수 있다. AIG는 구제금융으로 당장 파산하는 건 피했다. 그렇다고 AIG가 회생한다는 보장을 받은 건 아니다. AIG는 앞으로 보유 자산을 매각하는 강도 높은 구조조정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결국 파산 위기에 몰렸던 AIG가 살아났다고 금융 위기가 끝난 것은 아니다. 금융 위기의 근본 원인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세계적인 과잉 유동성에 의한 금융 버블이다. 신흥국의 성장, 자원 보유국의 국부 팽창 등이 국제 금융시장에 과잉 유동성을 공급했다. 시장에 돈이 넘쳐 나는 와중에서 미국의 투자은행들은 다양한 증권화 상품과 파생상품을 만들어 냈다. 그들은 또 과도한 레버리지(차입 투자)를 통해 넘치는 유동성을 더욱 넘쳐흐르게 만들었다. 그게 거품이 된 것이고, 지금은 그 거품이 터진 것이다.”“2년 정도는 더 갈 것이다. 금융 위기의 원인 중 하나가 주택 값 하락이다. 기술적 지표로 분석해 보면 미국의 집값은 2010년 5~6월까지는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그때까지는 금융 회사들의 손실이 이어질 것이고 이런저런 위기가 터져 나올 것이다.”“매우 어려운 문제다. 지금은 제2차 세계대전 후 최대의 금융 위기다. 게다가 그동안 진행된 증권화·파생상품화 등 금융 혁신의 부작용이 터져 나온 것이기 때문에 더욱 치유가 어렵다. 정부가 어떤 조치를 한다고 해소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공적 자금 투입은 쉽게 얘기할 문제가 아니다. 미국 정부도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그건 어느나라 정부나 마찬가지다. 바로 금융 회사들의 모럴해저드(도덕적 해이) 때문이다. 그동안 떼돈을 벌던 투자은행이 지금 당장 어려워졌다고 정부가 국민들의 세금을 쏟아 붓는다면 어느 국민이 납득하겠는가. 한국이 1998년 경제 위기 때 공적 자금을 과감히 투입해 금융사 구조조정을 했던 것은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라는 초비상 시국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물론 미국의 금융 위기가 시장 시스템 리스크로까지 확대될 정도라면 미국 정부가 공적 자금을 투입해야 한다. 파국을 막기 위해선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처음부터 모든 부실 금융사에 국민 세금으로 투입해서 구제할 순 없다.”“이번 위기에 금리 인하는 별 효과가 없을 것이다. 위기의 원인이 유동성 문제이지, 금리가 높아서가 아니기 때문이다. 현재 미국의 기준금리는 연 2.0%이지만 물가를 감안한 실질금리는 이미 마이너스 수준이다. 지금과 같은 금융 경색 때 금리 인하는 상징적인 의미는 있을지 모르지만 실질적인 효과는 없다.”“미국의 금융 불안은 필연적으로 미국의 실물경제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다. 당장 금융사 파산으로 고용이 줄면, 소비가 위축될 수밖에 없다. 그럴 경우 미국에 수출을 많이 하는 한국 일본 등도 타격을 입을 게 뻔하다. 자칫 세계적인 동반 불황이 찾아올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한국과 일본은 미국 경기 둔화로 인해 실물경제가 입을 타격을 최소화하는 데 주력해야 한다. 글로벌 금융 위기에 개별 국가가 대응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물론 금융 경색 조짐이 나타나면 시장에 유동성을 풍부하게 공급해 돈줄이 마르지 않도록 해야 한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고용 악화 등으로 실물경제가 침체되지 않도록 내수 등에 신경을 쓰는 것이다.”“결국 ‘공짜 점심’은 없다는 것이다. 미국 투자은행들은 그동안 적은 자기자본으로 돈을 빌려 너무 위험한 투자에 몰두해 왔다. 고위험 투자를 한 만큼 큰 수익을 얻기도 했지만, 지금은 큰 손실을 입고 파탄지경에 이른 것이다. 당분간은 미국식 투자은행 모델은 시장에서 사라질 것이다.”일본 대장성 재무관(외환담당 차관보)을 지낸 국제금융 전문가다. 시장엔 ‘미스터 엔’이란 별명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그가 이 별명을 얻은 건 1995년 대장성 국제금융국장 시절. 1994년 멕시코 페소화 위기로 주요국 통화가 강세를 띠면서 엔화 가치는 당시 달러당 79엔까지 올라갔었다. 이 같은 엔고를 단번에 엔 약세로 돌려놓은 게 사카키바라 국제금융국장이었다.그는 강도 높은 시장 개입(엔화 매각, 달러 매입)과 거침없는 발언을 쏟아내며 국제 외환시장을 흔들어댔다. 결국 엔화 가치를 1995년 말 달러당 104엔, 1996년 말엔 123엔까지 끌어내렸다. 1995년 한 해 동안 외환시장 개입에 쓴 돈만 4조7000억 엔에 달했다.1997년 7월 재무관으로 승진하면서는 영향력이 더 커져 당시 앨런 그린스펀 FRB 의장, 로버트 루빈 미국 재무장관과 함께 국제 외환시장의 ‘3인방’으로 불리기도 했다.1997년 말 한국 등이 겪은 아시아 외환 위기도 바로 곁에서 지켜봤다. 그는 아시아 통화 위기에 대한 미국과 국제통화기금(IMF)의 시장근본주의적 처방을 비판하는 입장이었다. 그는 대안으로 아시아통화기금(AMF) 창설을 제안해 관심을 모았다.아시아 주요국들이 1000억 달러의 기금을 조성해 회원국 통화가치가 급락할 때 시장에 개입, 환율을 안정시키는 아시아판 IMF를 추진한 것. 그러나 일본의 AMF 추진을 아시아에서의 패권 도전으로 인식한 미국이 반대해 결국 좌절됐다.1999년 관직에서 물러나 학계에서 연구와 경제 평론 활동을 왕성히 하고 있다. 게이오대 글로벌시큐리티센터 소장을 거쳐 현재는 와세다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최근엔 인도 경제에 관심이 많아 와세다대 인도경제연구소장을 맡으며 중국과 인도를 중심으로 한 아시아 생산네트워크에 대한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약력 : 1941년 일본 가나가와현 출생. 64년 도쿄대 경제학부 졸업. 65년 대장성(재무성) 입성. 69년 미국 미시간대 경제학박사. 95년 대장성 국제금융국장. 97년 대장성 재무관. 99년 게이오대 글로벌시큐리티센터 소장. 2006년~현재 와세다대 교수 겸 인도경제연구소장. 주요 저서 : ‘진보주의로부터의 결별(2000년)’, ‘일본과 세계가 흔들린 날(2000년)’, ‘외환을 알면 세계가 보인다(2002년)’, ‘경제의 세계세력도(2005년)’, ‘인도를 읽는다(2005년)’차병석·한국경제 도쿄 특파원chabs@hankyung.com©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