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과 집중’ 구조조정 효과 - 차세대 히트상품 주도 여부가 관건
지난 10월 초 일본의 소니는 디스플레이 두께가 3㎜에 불과한 11인치형 유기발광다이오드(OLED)-TV를 올해 말부터 본격 시판한다고 발표했다. 세계 최초로 OLED-TV 상용화에 성공했음을 공식 선언한 것이다.OLED-TV는 초박막이면서도 고화질을 구현할 수 있다. 때문에 액정이나 PDP 등 평판TV 시장에서 차세대 제품으로 주목받고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디스플레이 수명과 제조 기술상의 어려움으로 인해 상용화가 지연돼 왔다. 이 같은 OLED-TV의 상용화에 소니가 먼저 성공함에 따라 차세대 초박막TV 시장 경쟁에서 유리한 고지에 오르게 됐다.소니는 2000년대 초 고화질 브라운관TV 개발에 집착하는 바람에 마쓰시타 샤프 등에 비해 평판TV 시장에 한 발 늦게 진출해 지금까지 어려움을 겪어 왔다. 소니의 이하라 가쓰미 가전 사업부문 사장은 “OLED-TV 상용화는 ‘기술 소니’가 부활했다는 상징”이라며 “이를 계기로 그동안 경쟁사에 밀렸던 TV시장에서의 역전을 위한 공세를 강화할 것”이라고 말했다.일본 전자업계가 다시 일어서고 있다. 그동안 반도체 박막TV 분야 등에서 한국과 대만 기업들에 치이며 고전을 면치 못하던 일본 전자회사들이 강도 높은 구조조정으로 부활을 꿈꾸고 있다. 지난해부터 경영실적도 개선돼 올 들어선 사상 최고 매출과 이익 기록을 잇달아 쏟아내고 있다.일본 전자업계의 약진은 역시 소니가 선도하고 있다. 소니는 올 회계연도 상반기(2007년 4~9월) 결산에서 4조595억 엔(약 32조4000억 원)의 매출액을 달성했다. 전년 상반기에 비해 12.8% 증가한 것. 본업에서 얼마나 돈을 벌었느냐를 보여주는 영업이익은 전년 동기의 62억 엔에 비해 무려 30배 이상인 1898억 엔으로 늘었다.요즘 세계 전자업계 관계자들은 “소니가 중병에 걸린 줄 알았더니 감기에 걸린 것이었다”는 말을 자주 한다. 소니가 브라운관TV 판매 호조에 안주해 액정TV 개발에 소홀했다가 2003년 실적이 급락하자 사람들은 “이제 소니는 끝났다”고 말했었다. 그러나 한 발 늦게 시작한 액정TV 시장에서 소니는 세계 1위로 떠오르며 올해는 사상 최대 매출과 견조한 이익을 겨냥하고 있다.소니의 재기엔 액정TV 브랜드 ‘브라비아’가 효자노릇을 했다. 소니는 지난해 브라비아를 전년의 2배가 넘는 600만 대나 팔았다. 이로써 액정TV 판매에서 샤프를 제치고 세계 1위에 올랐다. ‘가전 왕자’ 소니의 자존심을 회복한 것. 소니는 늦게 출발한 만큼 핵심 부품인 액정패널의 자체 개발을 고집하지 않고 한국의 삼성전자와 제휴해 시간을 벌었다. ‘소니답지 못하다’는 비판도 있었지만 이 전략이 먹혔다.소니는 작년 회계연도(2006년 4월~2007년 3월)엔 8조2957억 엔(약 66조 원)의 매출을 올렸다. 전년보다 10.5% 늘어난 것으로 사상 최대 규모다. 다만 이익은 신통치 않았다. 영업이익은 718억 엔으로 전년 2264억 엔에서 감소했다. 당기순이익도 1263억 엔으로 전년(1236억 엔)과 비슷한 수준. 영업이익이 줄어든 건 작년 11월 시장에 내놓은 게임기 ‘플레이스테이션3’의 막대한 개발비용이 반영된 탓이다. 게임부문에서만 2000억 엔이 넘는 적자가 발생했다.그러나 TV 등 전기부문 실적은 좋았다. 소니는 액정TV의 호조에 힘입어 올해도 사상 최대 실적을 낼 것으로 예상된다. 매출은 작년보다 6% 많은 8조7800억 엔, 영업이익은 전년보다 513% 늘어난 4400억 원으로 잡았다. 매출액 대비 영업이익률이 5%를 넘는 것으로 마쓰시타나 샤프 등 경쟁사에 비해 손색이 없는 수익성이다.소니뿐만이 아니다. 마쓰시타전기도 올 상반기 매출액이 전년동기 대비 3.1% 늘어난 4조5253억 엔을 기록했다. 사상 최고치다. 영업이익도 2199억 엔으로 6.1% 증가했다. 상반기만 따지면 6년 연속 영업이익이 증가한 것이다.반도체가 주력인 도시바도 금년 상반기 매출액이 3조6899억 엔으로 전년 상반기보다 16.7% 늘었다. 영업이익과 당기순이익은 각각 825억 엔과 457억 엔으로 전년동기 대비 26.5%와 17.8%씩 신장됐다. 도시바는 금년 전체 영업이익을 전년에 비해 12% 정도 증가한 2900억 엔으로 전망하고 있다. 당초 목표보다 300억 엔 정도 많은 것이다. 사상 최고 이익을 냈던 1990년의 3150억 엔에 근접하는 실적이기도 하다.액정TV 분야에서 강점을 갖고 있는 샤프도 지난 상반기 매출이 전년동기 대비 12.0% 늘어난 1조6408억 엔, 영업이익은 12.3% 신장된 790억 엔을 달성했다.일본 전자업체들의 실적 호전은 ‘선택과 집중’을 바탕으로 한 구조조정의 결과다. 일본 전자업계는 채산성이 없거나 시너지(상승)효과가 떨어지는 사업은 과감하게 버리고, 유망한 분야만 골라 집중 투자하는 ‘선택과 집중’ 전략을 가속화하고 있다. 글로벌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한정된 경영자원을 여기저기 흩뿌리기보다는 자신 있는 분야에만 집중 투자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판단에서다.지난 수년간 실적부진에 허덕이던 소니가 수익을 못 내는 강아지 로봇 ‘아이보’와 게임기용 반도체 생산시설을 정리한 것이 대표적이다. 소니는 최근 반도체 사업에서 철수하기 위해 기존의 첨단 반도체 공장을 일본 최대 반도체사인 도시바에 매각하기로 했다.소니가 매각하는 반도체 부문은 자회사인 소니세미컨덕터규슈의 나가사키 공장에 있는 시스템 LSI(대규모 집적회로) 제조 라인. 이 라인에선 플레이스테이션3 등 게임기의 심장부라고 할 수 있는 MPU(초소형 연산처리장치) 등을 생산하고 있다. 공장 매각 가격은 1000억 엔(약 8000억 원)으로 예상된다.도시바도 주력인 반도체와 원자력발전 사업에만 집중하는 전략을 추진 중이다. 이를 위해 도쿄 중심부인 긴자의 옛 본사 건물과 영상·음악 관련 자회사를 처분하기로 했다. 대신 반도체 분야에는 오는 2009년도까지 그룹 총 설비투자액의 58%에 해당하는 약 1조 엔을 쏟아 부을 방침이다. 도시바는 반도체와 원자력 발전, 평판TV 등 디지털 제품의 핵심 3사업에 경영자원을 집중하고 시너지 효과가 적은 사업을 정리하는 전형적인 ‘선택과 집중’ 경영을 하고 있는 것.히타치도 컴퓨터 생산에서 전면 철수하기로 했다. 히타치는 이미 업무용 PC 생산을 미국 휴렛 팩커드(HP)에 모두 위탁하고 있다. 이어 가정용 PC 생산과 신기술 개발도 전면 중단할 예정이다. 정보기술(IT) 기기 분야의 과당 경쟁에 따른 경쟁력 저하로 채산성 확보가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산요전기도 휴대전화와 통신 관련 사업에서 전면 철수를 결정했다. 휴대전화 사업은 교세라에 매각하는 방향으로 교섭을 벌이고 있다.마루와증권 오타니 마사유키 애널리스트는 “일본 전자업체들은 각자 경쟁력 있는 전략 분야에만 집중하면서 한국과 중국의 경쟁사들보다 한 발 앞서기 위한 신기술 투자에 나서고 있다”며 “그 같은 노력이 실적 호전이란 결실을 맺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물론 일본 전자업계의 앞길이 탄탄대로인 것만은 아니다. 평판TV의 세계적인 가격경쟁이 심화되면 가전회사들의 이익률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특히 소니는 액정패널을 독자 기술로 자체 생산하지 못하고 있다. 때문에 다른 경쟁사에 비해서 비용을 줄이는 데 한계가 있다.결국 차세대 전자제품 분야에서 끊임없이 히트상품을 내놓을 수 있느냐가 관건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마이클 패처 웨드부시모건증권 애널리스트는 “약한 부문을 버리고 강한 부문만 키우는 구조조정 전략만으론 한계가 있다”며 “결국 일본 전자업체가 화려하게 부활하느냐, 마느냐는 과거와 같은 히트 전자상품을 얼마나 내놓느냐에 달려 있다”고 지적했다. 예컨대 소니가 전력투구하고 있는 OLEL-TV 등이 차세대TV로 자리를 잡느냐가 열쇠란 얘기다.트랜지스터 라디오(1955년 발매) 워크맨(1970년) 등과 같은 세계 최초의 전자제품을 내놓으며 ‘가전왕국 일본’의 명성을 쌓아 올렸던 일본 전자업체들이 명예회복과 부활에 성공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차병석·한국경제 도쿄특파원 chabs@hankyung.com©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