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기 미래성장동력 창출 앞장설 것’

몇 년 전 경기도의 한 중소기업 사장이 자사를 방문한 허범도 경기지방중소기업청장(당시)에게 눈물로 호소했다. 도무지 기업을 경영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면서.사연은 이랬다. 오랜만에 수주가 많아 공장 내에 제품을 쌓아둘 데가 없자 할 수 없이 공장 마당에 야적했다. 비를 맞을까봐 처마와 연결해 천막을 늘어뜨려 놓았는데 건축법 위반으로 고발당했다는 것. 수백만 원의 벌금을 물릴 처지에 놓여 있었고 그로 인해 전과자로 기록될 판이었다. 게다가 경찰서 출두통보 등 번거로운 일들이 이어져 경영을 하는 데도 지장을 받게 됐다.허 청장은 각계를 쫓아다니며 해당 중소기업의 어려움을 호소했고 결국 이 일이 잘 해결되도록 해줬다. 공무원은 모든 일을 규정대로 처리하면 그 뿐이다. 번거롭게 뛰어다니며 해결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허 청장은 공무원 시절 이런 일을 하도 많이 해 ‘공무원답지 않은 공무원’이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1975년 행정고시에 합격한 뒤 1979년 상공부에서 공직생활을 시작해 중소기업청 차장을 거쳐 산업자원부 차관보를 끝으로 작년 4월 중소기업진흥공단 이사장으로 자리를 옮긴 그를 만나봤다.중소기업청 근무 당시 일화가 많았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경기도 포천의 한 업체를 방문했을 때 당시 그곳에는 인터넷선이 깔려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 업체는 먼 곳에 떨어진 PC방에 가서 외국 바이어와 e메일을 주고받는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백본망에서 1km 정도 떨어진 산속에 업체가 있어 자사 부담으로 깔아야 하는데 이것도 쉽지 않았지요. 그래서 인터넷망 업체에 요청해 설치할 수 있도록 해준 적도 있습니다.매일같이 중소기업 현장을 방문하는 ‘1일1사(社)’를 실천하고 계신데요.중소기업 지원책은 현장감이 있어야 합니다. 탁상에서 만드는 정책은 필요가 없습니다. 현장에 가야 생동감 있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고 어려움을 피부로 느낄 수 있습니다. 1996년 중소기업청 개청 이후 지금까지 약 1600개 회사를 방문했습니다. 공휴일을 빼고 나면 하루 1개 업체를 방문한 셈입니다. 이들로부터 자금 인력 기술 판매 등의 어려움을 들었습니다. 이를 해결하고 도와주는데 초점을 맞추면서 일을 해 왔지요.현장에서 호소하는 어려움에는 어떤 게 많던가요.여러 가지가 있습니다만 아까 예를 든 대로 건축 환경 노동 등 각종 규제에 걸려 본의 아니게 전과자가 되는 중소기업인들이 부지기수입니다. 사업 의욕이 떨어지는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해당 부처는 법의 규정에 따라 집행하는 것입니다만 융통성 없게 집행되면 중소기업들이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그러나 공무원으로선 어쩔 수 없는 것 아닙니까.다산 정약용 선생은 ‘백성에게 도움을 주지 못하는 학문은 무용지물’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마찬가지로 기업을 도와주지 않는 정책은 필요 없습니다. 공무원들은 실용적인 사고를 가져야 합니다. 제도가 불합리하면 고치고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중소기업을 지원해야 합니다. 기업은 우리 국민을 먹여 살리는 일자리를 제공해 주지 않습니까. 일자리만큼 중요한 게 어디 있습니까.더구나 중소기업은 국내 기업체 수의 99%, 일자리의 88%, 연간 수출액 1000억 달러를 넘어서는 등 ‘구구팔팔천’의 엄청난 역할을 수행하고 있지 않습니까. 각 지방자치단체 역시 중소기업을 격려하고 도와줘야 합니다.중소기업들의 가장 큰 애로 중 하나가 자금 문제인데 올해 중진공은 어떤 식으로 자금을 지원할 계획인지요.우선 지원 규모는 3조1315억 원으로 지난해와 비슷한 수준입니다. 당초 이 예산이 대폭 삭감될 뻔했으나 정부와 국회 등지에 적극적으로 뛰어다니며 작년 수준의 예산을 확보했습니다. 올해 정책자금 구조 개편의 큰 틀은 성장 단계와 정책 목적에 따라 정책자금을 지원한다는 데 두고 있습니다. 우선 수요자인 중소기업을 창업과 성장 초기 단계, 성장과 혁신화 단계, 구조조정 단계, 긴급 상황(재해 등) 단계 등으로 나눠 각각 중소벤처창업, 개발기술사업화, 경영혁신(시설 개선, 지식 서비스, 기업간 협력), 구조조정, 경영 안정과 관련된 자금을 지원할 계획입니다.은행도 중소기업에 대출해 줍니다. 중진공이 이들 민간 금융회사와 차별화되는 점은 무엇인지요.벤처창업자금이나 개발기술사업화자금, 사업전환 무역조정, 수출금융, 대중소협력사업 지원 등과 같은 정책목적성 자금 지원을 확대해 민간 금융회사와 차별화할 생각입니다. 예를 들면 성장 가능성은 크지만 민간 금융회사에서 소외받는 창업 초기 기업, 성장 초기의 기술 개발 기업 등에 대한 지원을 늘릴 계획입니다. 또 원부자재 조달과 수출 애로, 재해 등 긴급 사항에 대응할 수 있는 능력을 높이기 위해 기존의 구조개선자금 중 특별경영안정자금(원부자재, 재해복구)과 수출금융을 경영안정자금으로 통합해 지원할 예정입니다. 이렇게 되면 중소기업도 환율 변동이나 고유가 등의 환경 변화에 훨씬 더 능동적으로 대응할 수 있을 것입니다.올해 새로 도입되는 정책자금이란 무엇인가요.특히 올해 사업전환지원(1000억 원), 무역조정지원(200억 원) 사업을 새롭게 운용할 계획입니다. 이 사업을 통해 한계 기업의 퇴출과 사업 전환 촉진 등 중소기업의 구조조정 지원을 강화할 생각입니다.무역조정지원자금은 각국과 자유무역협정(FTA)이 체결되고 이로 인해 피해를 보는 중소기업이 생길 경우 피해 조사 등을 위한 자금이고 사업전환지원자금은 해당 업체의 사업 전환을 도와주기 위한 자금입니다.세계 경제가 단일 시장으로 통합되는 국제 경제 환경에서 우리 중소기업들도 글로벌 경쟁력을 키우고 대비해야 된다고 생각됩니다.FTA 협상 등 무한 경쟁 시대인 글로벌 경제 환경에서, 그 영향을 분석하고 지원 제도를 마련하는 게 중소기업 지원 기관인 중진공의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장 올해 4월부터 제조업 등의 무역조정 지원에 관한 법률이 시행될 예정인데 중진공은 이 법률에 따라 올해 초까지 무역조정지원센터를 개소한다는 목표를 세우고 현재 전담반을 구성해 준비하고 있습니다.글로벌 경제 환경에서는 피해 기업을 단순히 구제하는 것만으로는 의미가 없습니다. 혁신형 중소기업의 창업 활성화와 아울러 구조조정을 통해 미래 성장 동력 창출하고 산업구조를 고도화하는 일이 절실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무역조정과 사업 전환을 지원하겠다는 겁니다.중소기업 가운데는 세계 수준의 국제 경쟁력을 보유한 업체들도 있는데 이들 업체를 위해 중진공이 추진하는 사업은.반도체, 전기전자, 디지털 영상, 자동차, 선박 분야 등에서는 많은 기업들이 세계적 경쟁력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중진공은 이런 기업들에는 업체 수준을 한 단계 높이고 자부심을 가질 수 있도록 다양한 지원책을 수립해 지원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성장 잠재력이 큰 기업을 선정해 세계 일류 기업 수준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각종 사업을 맞춤 지원하는 월드클래스사업(57개 업체 선정)과 모범 중소기업인 멤버십제도(40명) CEO클럽결성(약 120명) 등을 통해 돕고 있습니다.이사장님은 집무실 간판을 ‘이사장실’에서 ‘CEO실’로 바꾸셨는데요.고객인 중소기업들에 최고의 서비스를 제공하자는 스스로의 다짐입니다. 앞으로 중진공은 이사장뿐만 아니라 전 직원이 CEO가 되어 중소기업인들에게 용기와 자신감을 불어넣는 기관으로 거듭날 것입니다. CEO는 최고경영자(Chief Executive Officer)라는 의미와 고객격려조직(Customer Encouraging Organization)이라는 의미를 함께 갖고 있습니다. 임직원들은 모든 평가를 중소기업들로부터 받는다는 자세로 일하겠습니다.약력: 1950년생. 68년 경남고 졸업. 73년 부산대 상과대 졸업. 76년 서울대 행정대학원 졸업(석사). 75년 행정고시 합격. 79년 상공부 및 국무총리실 근무. 88년 UNCTAD, 대통령비서실, 산자부 총무과장. 96년 중소기업청 지방청장 및 중소기업정책국장. 2003년 중소기업청 차장. 2004년 산업자원부 무역위원회 상임위원 및 숭실대 국제경영대학원 졸업(박사). 2005년 산업자원부 차관보. 포상 97년 올해의 공무원상 수상(황조근정 훈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