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너리티는 옛말… 신흥국 ‘새판 짜자’
세계경제 지도가 바뀌고 있다.구미 선진국들이 세계경제를 좌지우지하던 시대는 가고 이제는 신흥개도국들이 세계경제는 물론 선진국 국내경제에까지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세계경제 무대에서 파워시프트(Power Shift)가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영국의 <이코노미스트>는 최근호에서 이머징 이코노미(Emerging Economies)로 불리는 신흥경제국들의 국내총생산(GDP·구매력 평가 기준) 합계가 지난해 처음으로 선진국들의 국내총생산 합계를 앞질렀다고 보도했다. 물론 현재의 환율을 기준으로 환산했을 경우 신흥국들의 GDP 합계는 아직도 전세계 GDP의 30% 정도에 그치고 있으나 이 기준을 적용하더라도 신흥국들의 경제력 발전은 눈부시다. 현재 환율을 기준으로 한 지난해 글로벌 생산 증가액의 절반을 훨씬 넘는 부분이 개도국의 몫이기 때문이다.다른 통계들도 세계 경제력의 중심축이 선진국에서 이머징 국가들, 특히 아시아로 옮아가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신흥국들은 현재 세계 에너지의 절반 이상을 사용하고 있으며 최근 5년간 전세계 석유수요 증가분의 80%를 신흥국들이 소비했다. 신흥국들은 또 세계 외환보유액의 70%를 보유하고 있다. 이들이 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지난 1970년대 20%에서 최근에는 43%로 뛰어올랐다.이 같은 신흥국으로의 급속한 경제권력 이동은 전세계로 확산되고 있다. 비록 아프리카대륙이 약간 뒤처지고는 있지만 각 대륙에서 신흥개도국들이 잇따라 글로벌 경제무대에 주역으로 등장하고 있는 셈이다.흔히 신흥경제국 하면 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 등을 떠올리지만 이들 국가의 총생산합계가 전체 신흥국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40%에 불과하다. 그만큼 신흥국으로 분류되는 국가들이 전세계 각 대륙에 골고루 등장하고 있다는 증거다. 세계 도처에서 신흥경제국이 새로 탄생하고 있는 것이다.<이코노미스트>는 이 같은 통계들은 세계경제가 중요한 분기점에 와 있다는 것을 보여주며 더 이상 선진국들이 세계경제를 지배할 수 없게 됐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해석했다.세계 경제력의 핵심축이 북미, 서유럽, 일본, 호주 등 선진국에서 아시아 등 신흥국으로 급속히 옮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신흥국들은 이제 세계경제 성장을 이끌고 있으며 선진국의 인플레, 금리, 임금 수준, 기업 이익 등 국내경제 변수에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분석이다.<이코노미스트>는 “산업혁명은 세계 인구의 3분의 1 정도에만 해당되는 사건이었지만 세계경제에서 신흥국의 부상은 전세계 거의 모든 인구에 영향을 주는 만큼 파급효과가 엄청나다”며 세계경제 사상 가장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고 평가했다.역사상 모든 사회·경제적 커다란 변화에는 반드시 분쟁이 따랐듯이 신흥국 부상의 이면에도 국가간 이해관계에 따른 마찰과 이견이 발생하고 있다.가장 시끄러운 문제는 중국, 인도로 대표되는 소위 저임금의 아웃소싱 기지의 부상으로 선진국에서 일자리가 줄어든다는 데 대한 선진국 내의 반발이다. 미국, 유럽의 선진국 내 노동계는 신흥국들을 자신들의 일자리를 빼앗아가는 주범으로 지목, 자국 내 기업들의 해외 아웃소싱과 진출을 막는 길을 모색하고 있다. 그러나 글로벌화가 진행될수록 이 같은 경향은 더욱 심화될 것이며 이에 따른 선진국 내 ‘아우성’ 역시 더욱 커지는 것은 불가피하다.이 같은 일자리의 이동을 포함, 글로벌화는 국제관계에서 여러가지 결과를 가져온다. 단적인 예로 아시아에서 경제발전을 토대로 한 중국의 급부상은 이에 위협을 느낀 일본과 인도로 하여금 미국과 더 가까운 노선을 걷게 만들었다. 인도는 미국과 민간부문 핵협정을 체결했고, 일본은 그 어느 때보다 미국과 친밀한 관계를 지속하고 있다. 반면 일본은 중국과는 신사참배와 역사인식 문제, 그리고 동중국해 유전개발 등을 둘러싸고 사사건건 대립각을 세우고 있다.중국의 부상은 또 한국과 미국이 최근 상대적으로 소원해지는 데도 어느 정도 영향을 줬다는 게 국제관계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한때 가난한 나라였던 중국은 이제 전세계에서 생산되는 원자재의 상당부분을 소비하는 ‘원자재 블랙홀’로 불릴 정도이며,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한 석유회사를 인수하려는 시도를 할 정도로 국제사회에서 위상을 높여가고 있다.물론 신흥국가들의 부상에는 나름대로 부작용도 있다.중국의 인구는 노령화돼 가고 인도는 부패한 학교 문제가 골칫거리다. 그래서 아마도 신흥국들은 현재와 같은 성장속도(선진국들의 과거 성장속도의 약 세 배 가량)를 지속적으로 유지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지적도 많다. 이런 맥락에서 “오는 2040년까지 브라질, 러시아, 멕시코, 인도, 중국 등이 세계 상위 10대 경제국이 될 것”이라는 골드만삭스의 전망이 이뤄지는 데는 시간이 좀더 걸릴지도 모른다.글로벌화로 다양하고 복잡한 정치적 문제도 발생했다. 저임 신흥국의 수출품으로 자국 산업이 피해를 입자 미국을 위시해 최근 보호무역 움직임이 다시 고개를 들고 있는 것이 대표적이다. 세계무역기구(WTO) 도하라운드 협상이 결렬 위기를 맞고 있는 것도 사실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글로벌화의 진행, 신흥국의 부상과 직접적 관련이 있다.신흥국들의 새로운 등장은 서구 국가 정치인들의 입장에서 볼 때 새로운 골칫거리가 된 것임은 분명하다. 이들 국가의 경제행위로 인해 손해를 입은 자국 내 유권자들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게 됐기 때문이다.신흥국들의 부상은 전세계적으로 낮은 인플레와 저금리라는 바람직한 경제환경을 조성했지만 유가를 비롯, 각종 원자재가격 상승과 부동산 등 자산 버블을 만들어낸 것도 사실이다. 이들 신흥국가은 또 세계가 미국에 덜 의존하도록 만들었지만 미국이 점증하는 경상적자에도 불구, 이를 계속 유지할 수 있도록 만들기도 했다. 결국 글로벌 불균형도 키워온 셈이다.이 같은 부정적 측면에도 불구, 신흥국들이 앞으로 세계경제에서 영향력을 더욱 확대할 것이라는 점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다만 특정 단계에 이르는 시기가 언제일 것이냐란 논란 정도가 존재할 뿐이다. 그리고 그 속도는 예상외로 더 빨라질 수도 있다. 97년 외환위기를 겪던 아시아 국가들은 가장 낙관적인 전망보다도 빨리 경제난을 극복해낸 경험을 갖고 있다.역사는 반복되는 것이고 19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인도와 중국은 세계에서 가장 큰 경제대국이었다. 그러나 이후 서구 국가들이 갖춘 기술과 자유정신, 개척정신 등이 이들을 뛰어넘게 만들었다. 이와는 반대로 현재의 신흥국이 선진국을 다시 제치고 세계경제 무대에서 주역으로 자리잡을 날이 멀다고만은 말할 수 없게 됐다.이러한 세계경제 질서의 재편이 세계경제를 위해서 바람직한 부분도 많다.사실 신흥국들의 부상과 성장으로 개도국뿐 아니라 선진국 역시 이득을 얻었다.세계화는 제로섬 게임이 아니다. 멕시코, 한국, 폴란드가 미국, 일본, 독일 등 기존 선진국들의 일방적 희생을 통해 성장한 것은 아니다. 개도국은 이미 미국, 일본, 유로존 전체 수출의 절반을 수입하고 있다. 개도국들이 현재보다 더 부유해지면 선진국으로부터의 수입량도 더 늘어날 것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이코노미스트>는 이머징 이코노미의 부상은 글로벌 경제의 성장은 물론 선진국의 물가안정과 수출증대를 가져오는 등 긍정적 면이 더 큰 만큼 이를 저지하려는 보호주의 움직임은 경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세계경제는 지난 2000년 이후 연간 3.2%라는 사상 초유의 높은 성장세를 지속하고 있다. 이는 1차 세계대전으로 막을 내린 이전의 글로벌 고속성장 시대에 달성했던 성장속도보다 훨씬 빠른 성장세다.<이코노미스트>는 이 같은 고속성장세는 우리가 신흥국의 부상을 환영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라고 강조했다.©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