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한국 첫 우주인’… 야망 불태워

대한민국 1호 우주인 선발절차가 온 국민의 관심 속에 진행되고 있다. 지난 9월17일 3만6,206명의 지원자 가운데 3.5㎞ 달리기 테스트를 통과한 3,176명이 필기시험을 치렀다. 이날 필기시험 응시자 가운데 재벌오너와 20여명의 전·현직 최고경영자(CEO)들이 포함돼 있어 눈길을 끌었다. 이미 사회적으로 안정된 지위에 오른 이들이 수십년 만에 새삼스럽게 시험지를 받아든 이유는 제각각이다. 그러나 항상 새로운 것을 찾는 끝없는 도전정신만은 닮아있다.우주인 선발 응모자 가운데 단연 화제의 주인공은 정재은 신세계 명예회장(67)이다. 그는 9월17일 1교시 과목인 영어듣기를 위해 보청기를 만지며 긴장하는 모습을 보였다. 1교시가 끝난 뒤 20분간의 쉬는 시간에도 밖으로 나오지 않고 자리를 지켰다. 그는 시험을 마친 뒤 “시험이 어려웠다”며 “우주의 아름다운 모습을 손자, 손녀에게 얘기해주고 싶다”고 말했다.정회장은 지난 9월2일 3.5㎞ 달리기 테스트를 가볍게 통과했다. 18분32초로 제한선인 23분을 훨씬 밑돌았다. 그는 체력평가에 대비해 한 달간 여의도와 잠실, 하와이에서 달리기 훈련을 하기도 했다. 정회장은 이날 “나이가 나이인 만큼 이번 우주인 선발은 내 인생의 마지막 도전”이라며 “3.5㎞ 코스를 달리다 보니 젊은이들도 중도에 포기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지만 난 끝까지 열심히 뛰어 통과했고, 다음에 있을 필기시험에 대비해 영어공부도 다시 할 것”이라며 의욕을 과시했다.정회장은 경기고와 서울대 전자공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컬럼비아대학에서 산업공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정상희 전 삼호방직·물산 회장의 둘째 아들로, 1967년 고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의 막내딸인 이명희 신세계 회장과 결혼하며 삼성가의 사위가 됐다. 정회장의 부친 정상희 회장은 양정고와 일본 명치대학 법학과를 졸업했다. 양정고 시절부터 육상선수로 두각을 나타냈으며, 48년 대한체육회 이사장을 맡는 등 우리나라 초기 육상·체육계에 큰 발자국을 남겼다. 또 충북에서 4대(58~60년)와 5대(60~61년) 국회의원을 지냈으며, 62년부터 삼호방직·물산 회장을 맡았다.당시 삼호는 삼성에 이은 재계 2위의 대그룹으로 삼호방직, 조선방직, 대전방직을 비롯해 제일은행, 동화통신, 삼호공업, 제일화재보험 등을 거느리고 있었다. 삼호의 창업주는 정재호 전 통화통신 사장으로 정상희 회장과 인척관계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재은 명예회장과 이명희 회장의 결혼은 당시 시각으로 보면 재계 1위와 2위의 혼사였던 셈이다. 삼성가와 인연을 맺은 후 정상희 회장 부자는 삼성 계열사의 CEO로 맹활약을 펼쳤다. 정상희 회장은 69년 삼성전자가 설립되면서 초대 사장을 맡았다. 이후 아들 정재은 명예회장도 83년 삼성전자 사장으로 부임해 부자가 나란히 사장을 맡게 된다.정회장은 삼성전자 사장 시절 미국 HP와 합작으로 ‘삼성HP’(현 한국HP) 설립을 성공시켜 향후 성장의 발판을 놓았다. 국내에 컴퓨터가 거의 없던 80년대 초 컴퓨터, 의료기기, 계측기기 분야에서 HP의 앞선 기술을 들여와 삼성 제품이 미국에 진출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다. 그후 정회장은 삼성전관, 삼성항공, 삼성종합화학을 차례로 맡아 삼성의 대표적 이공계 CEO로 이름을 떨쳤다.91년 신세계가 삼성에서 분리되면서 조선호텔 회장을 맡아 이명희 회장과 함께 신세계를 이끌었다. 96년부터는 신세계 명예회장으로 물러앉으며 공식적인 경영에서 손을 뗐다. 독서를 즐기는 학구적 면모를 갖췄으며, 평소 ‘인정미가 넘치는 기업경영’을 강조해 왔다. 정회장은 지난 9월7일 자신의 신세계 보유지분 7,000여억원어치를 아들 정용진 부사장과 딸 정유경 조선호텔 상무에게 증여해 사실상 빈손으로 돌아갔다. 사상 최고인 3,500억원 가량의 증여세를 ‘법대로’ 납부하기로 해 신선한 충격을 주기도 했다.윤종하 MBK파트너스 대표(44)도 정회장에 못지않은 화제의 인물이다. MBK파트너스는 칼라일그룹 아시아 회장을 지낸 김병주씨가 대표로 있는 국내 최대 사모펀드(PEF)로 올 6월 한미캐피탈을 인수한 데 이어 하나금융지주와 함께 LG카드 인수전에 뛰어드는 등 활발한 행보를 보여 ‘한국의 론스타’로 불린다. 최근에는 대우일렉트로닉스 매각에서 차순위협상대상자로 선정됐다. 김병주 회장은 박태준 전 포철 회장의 넷째 사위로 칼라일의 한미은행 인수와 매각을 주도한 인물이다.윤대표는 미국 조지타운대를 졸업했으며, 하버드대와 시카고대에서 석사(공공정책학)와 박사(경제학) 학위를 받았다. 한때 한국개발연구원(KDI)에 근무하기도 했다. 산동회계법인 국제조세부 이사로 일하다 2005년 김병주 회장과 함께 MBK파트너스를 세웠다.치열한 인수·합병의 정글 속을 종횡무진 하는 윤대표지만 우주인 선발시험이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평소 운동을 좋아해 체력 테스트는 쉽게 통과했다”며 “하지만 필기시험이 생각보다 어려워 걱정”이라고 말했다. 그는 우주인 선발 지원 사실을 가족을 빼곤 주변에 알리지 않았다고 했다. 그는 지원동기 등에 대해서도 말을 아꼈다.하지만 항공우주산업은 그의 관심영역 중의 하나다. 물론 투자 차원에서의 관심이다. 그는 “우주산업의 전 단계가 항공산업”이라며 “우리나라 항공산업이 상당한 발전을 이뤘고, 정부의 정책적 지원도 확실한 만큼 충분히 가능성 있다”고 말했다.정근섭 에이스이노텍 대표(47)도 우주인 선발에 도전한 CEO 중 한 명이다. 강원도 양구 출신인 그는 금오공고와 금오공대를 졸업한 후 12년 동안 대우 계열사로 브라운관을 만들던 오리온전자에서 일했다. 미국 현지법인에서 5년 동안 근무한 뒤 귀국과 함께 독립해 2003년 에이스이노텍을 창업했다. 에이스이노텍은 구미에 본사를 둔 공장자동화 설비업체로 현재 LG필립스LCD에 자동화 설비를 공급하고 있다.정대표는 “가난한 산골마을에서 태어나 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에서도 일하면서 도전하면 어떤 일이든 할 수 있다는 것을 느꼈다”며 “현실에 안주하기보다 끊임없이 도전하는 모습을 아이들이나 나 자신에게 보여주고 싶어 지원했다”고 말한다. 정대표는 줄곧 기계, 장비를 만지는 일을 해와 과학에 대한 관심이 남다르다. 미국생활 시절 9~10시간 동안 차를 몰아 휴스턴 우주기지를 찾아간 적도 있다. 올 어린이날에는 아이들을 데리고 대전 한국항공우주연구원에 가 우주선 제작 과정을 지켜보기도 했다.박성동 쌔트랙아이 대표(39)는 인공위성 전문가다. 한국과학기술원(KAIST) 재학 시절 우리별 인공위성 발사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졸업과 함께 영국 서리대학에서 우리별 1~3호를 개발하며 석사학위를 받았다. 쌔트랙아이는 이때 함께 일하던 개발팀이 주축이 돼 2001년 창업한 위성개발 벤처기업이다. 지난해 말레이시아에 200㎏ 무게의 소형위성을 수출했다. 가격은 150억원. 현재 5개 수출 프로젝트가 진행 중이다.박대표는 “위성분야 일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관심을 갖게 됐다”며 “회사 직원 1명이 같이 지원했는데, 필기시험을 포기해 아쉽다”고 말했다. 그는 또 “시험이 너무 어렵게 나와 걱정이지만, 내 이름이 별 ‘성’(星), 동녘 ‘동’(東)”이라며 “꼭 우주인이 돼라는 의미로 지어주신 이름이라고 생각한다”며 웃었다.90년대 중반만 해도 국내 위성산업은 대기업이 잇달아 뛰어들면서 활기를 띠었다. 하지만 지금은 대부분의 기업이 사업을 대폭 축소한 상태다. 박대표는 “당시 대기업에서 일하던 연구자 가운데 상당수가 이 분야를 떠났다”며 “국내시장 의존도가 높은 게 가장 큰 문제였다”고 말한다. 국내 위성발사가 활발할 때는 관련기업의 매출이 증가하고 고용도 늘게 되지만, 일단 제작이 완료되거나 발사가 지연되면 매출이 급감한다. 매출의 굴곡이 심해 인력과 시설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게 쉽지 않은 구조인 것이다. 박대표는 “해외수출 비중을 늘리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고 말한다. 현재 쌔트랙아이는 해외매출 비중이 70%에 이른다.우주인 선발 이벤트는 항공우주업계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 관련산업에 대한 일반인의 관심이 커지기 때문이다. 박대표는 “위성기술의 해외 의존도가 아직은 높다”며 “전체 개발비 중 해외로 빠져나가는 비율을 꾸준히 낮추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우주인으로 최종선발되면 회사 이미지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며 “꼭 꿈이 실현되기를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