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에서는 고대부터 각종 점복 행위가 있었다. 모든 운명 예측술들은 천문과 역법, 그리고 음양오행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 수많은 왕과 장수들이 운명 예측술을 바탕으로 위대한 결정을 하곤 했다.<삼국유사>를 보면 신라시대에 음양오행에 입각한 미래 예측을 했다는 흥미로운 기록이 있다. 신라 27대 선덕여왕은 매우 총명했다. 어느 겨울날 영묘사라는 절에 있는 연못 옥문지에서 개구리가 모여서 사나흘을 울었다. 이에 여왕은 급히 무신에게 명해 군사를 이끌고 서쪽 근교의 여근곡으로 보내 그곳에 숨어 있던 백제군 500명을 섬멸했다. 신하들은 왕이 어떻게 적병이 여근곡에 숨어 있었는지 의아해했다. 이에 선덕여왕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개구리가 운 것은 병사가 있음을 말한다. 옥문은 곧 여근이다. 여근은 음이고 그 색상은 백색이다. 이는 서방을 뜻한다. 그러니 병사가 서방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남근이 여근 안에 들어가면 곧 힘을 잃고 죽는다. 그러므로 그들을 쉽게 잡을 수 있을 것으로 예측했다.”선덕여왕은 또 자신이 죽을 날을 미리 알아 죽을 연월일을 예언했는데 정확히 예언한 날에 죽었다고 한다.<삼국지>에 나오는 위, 촉, 오의 기라성 같은 장수들 역시 큰 싸움에 앞서 천명을 살피곤 했다. 역리학적 관점에서 보면 장수들은 전투를 하기 전에 천문과 지리를 살펴서 미리 일의 방향을 점쳤던 것이다. ‘죽은 공명이 산 중달을 쫓다’는 대목이 대표적이다.우리나라 역사에서도 마찬가지다. 최고의 장군이자 신화 같은 전승의 주인공 충무공 이순신도 점을 봤다. 그가 매일 적어 놓았던 친필 일기에 그 내용들이 적혀 있다.“갑오 9월1일 병자일. 이른 아침에 세수하고 조용히 앉아 아내의 병세에 대해 점을 쳤더니 ‘중이 환속하는 것 같다’는 괘를 얻고, 다시 ‘의심하다 기쁨을 얻은 것과 같다’는 괘를 얻었다. 아주 좋았다. 또 병세가 나아간다는 기별이 올 것인지에 대해서 점을 쳐 보니 ‘귀양지에서 친척을 만난 것 같다’는 괘였다. 이 역시 오늘 중 좋은 소식을 받을 징조였다. (중략) 병신 1월10일. 이른 아침에 적이 다시 나올지 안 나올지 점쳤더니 ‘수레에 바퀴가 없는 것 같다’는 괘가 나왔다. 다시 또 치니 ‘임금을 뵙는 것과 같다’는 괘가 나왔다. 모두 기쁘고 좋은 괘였다.”(<이순신의 일기>, 서울대학교 출판부)성웅 이순신 장군이 점을 봤다는 이야기는 그를 평가절하하려는 비판적 시각에서 예로 든 것이 아니다. 점 그 자체의 성향을 이야기하려는 것이다. 전쟁에 임하는 장군이기 전에 한 사람의 인간적인 면이 짙게 배어나오고 있다. 사람은 현재 자신이 처해 있는 입장이 불안정할 때 그것을 해결하는 방법 중 하나로 점을 치는 것이다. 그 점이 미래에 맞고 맞지 않고를 떠나 그 당시에 위안을 주고 용기를 주고 희망을 주기 때문이다. 바로 이 점이 사람들로 하여금 점을 치게 하는 중요한 이유가 된다.예언으로 황제를 만든 일화도 있다. 중국 당나라 때 세상을 풍미했던 희대의 천하여걸이 있었다. 바로 측천무후다. <당사>를 보면 측천무후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가 실려 있다.측천무후가 3살 때였다. 당시에 궁궐 안은 물론 장안과 온 나라에서 3살 된 여아가 나라의 주인인 황제가 될 것이라는 소문이 세상을 뒤덮었다. 이 소문을 들은 당태종은 당시에 가장 유명한 술가이자 승상이었던 이순풍을 은밀히 불러 그 소문의 진의와 실현 가능성을 물었다. 순풍의 대답은 놀라웠다. 소문은 사실이라고 했던 것이다. 이 말을 들은 당태종은 3살 된 여아는 모조리 죽이려 했다. 하지만 순풍이 극구 말렸다. 이는 인간이 할 수 없는 천명이니 하늘의 뜻을 거역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천명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그 여아가 황제가 되고 죽은 다음에는 다시 당태종의 후손들이 나라를 이끌어갈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여아를 찾아 죽인다면 나라를 영원히 잃게 된다고 했다. 당태종은 순풍의 말을 듣고 그대로 따랐다. 훗날 역사는 이순풍이 예언한 대로 진행됐다.한편 당태종 때 이순풍과 쌍벽을 이루었던 술사가 있었는데 바로 원천강이었다. 그는 고위관료가 아니었고 일반인들에게 예언을 하면서 살아가는 술사였다. 하지만 그의 신통력은 이순풍에게 밀리지 않고 오히려 그를 능가할 만했다. 원천강이 집필한 책은 조선조에서 명리학과 과거 시험과목이 됐을 정도이니 그 인기와 정확도가 얼마나 대단했는지는 가히 짐작이 간다. 원천강이 측천무후가 3살 때 명을 봤는데 가히 천제가 될 것이라고 예언을 했고, 그의 예언은 정확히 실현됐다.근대의 역술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해방 이후 오늘날까지 ‘용하다’는 명성이 높았던 역술인들이 적잖다.작고한 대가들 중에서는 이석영 선생이 첫손에 꼽힌다. 현재 역술인들 중에서 가장 많이 회자되고 있는 인물 중 하나이다. 그는 한국전쟁 때 이북에서 월남했다고 한다. 그리고 서울 중구 필동에서 오랫동안 상담을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노력으로 관인 역술학원이 개설될 정도였다. 당시 관인 역술학원이 2곳밖에 없었는데 그중 한 곳이 바로 그의 영향력으로 생겨났다고 한다. 그는 당대 내로라하는 많은 정치인, 경제인들이 몰래 찾아가 상담을 받았을 정도로 대단한 역술인이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론이다. 그는 단순히 글뿐 아니라 기의 영역까지 섭렵했던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박재완 선생은 대전에 자리잡은 역술대가였다. 서울에 이석영옹이 있었다면 대전에는 박재완옹이 있었다. 그는 소위 기가 접합되지 않은 순수 명리로만 상담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당대의 저명인들도 많이 찾았지만 그의 주 고객들은 평범한 일반서민들이었다고 한다. 그의 집에는 늘 사람들이 길게 줄지어 서 기다리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대인관계가 좋았으며 사람들에게 늘 친절하게 대했고 비교적 인품이 좋았다고 평판이 나 있다.지창용 선생은 제3공화국 때의 인물로 사단법인 역술인협회를 만든 실력자이며 30년 이상을 역술인협회 회장직을 지냈다. 그는 관상과 풍수지리에 능했다. 지금의 경부고속도로는 그의 풍수안목이 많은 영향을 줬으며,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의 위치도 그의 예지력이 많이 작용했다고 하는 후문이다. 또 육영수 여사 묘지를 쓴 주인공이기도 하다. 훗날 박정희 대통령이 총에 맞아 시해당했을 때 육여사의 묘소를 잘못 썼기 때문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의 집안은 조선조 때 관상도감 출신이라고 하는 이야기가 함께 전해지고 있다.이외에도 부산 박도사의 이야기가 심심찮게 역술인들 사이에서는 회자되고 있다. 그는 60세 전후해 혈압과 관련된 풍의 질환으로 몇 년간 고생하다 사망했다는 후문이다.용하다고 소문난 역술인 중에서는 실제 능력 이상으로 포장된 경우도 간혹 있다. 그리고 용하다는 기준과 정확도를 검증한다는 것은 모호한 부분이 있다. 그러므로 소문보다는 상담을 통해 자신과 가장 잘 맞는 역술인이야말로 최고의 역술 대가라 할 수 있다.현재 활동 중인 역술인 중에서는 특별히 두각을 나타내는 ‘역술 스타’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 마치 춘추전국시대와도 같다. 역술 분야도 많은 변화의 바람을 타고 있다. 인터넷이 대중적으로 보급이 되고, 인터넷 역술 사이트들이 인기를 끌면서 점문화를 대중화시키는 데 많은 공헌을 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들이 사업적으로 성공했는지는 베일에 가려져 있다.이런 시대흐름을 타면서 인터넷이나 각종 언론을 통해 자연스럽게 알려지게 된 역술인들이 새로운 역술 명인으로 자리잡고 있다. 필자 역시 2002한ㆍ일월드컵 때 누구도 예상치 못한 한국의 4강 신화를 인터넷과 지상파 TV를 통해서 예언, 유명해졌다.흔히 운칠기삼(運七氣三)이라고 한다. 하지만 운오기오(運五氣五)가 돼야 한다. 천문은 지리만 못하고 지리는 인화만 못하다고 한다. 또 사주는 심상만 못하다고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마음가짐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