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성 내면의 깊은 곳, 본성적으로 보면 노무현 대통령은 숫기가 적고 부끄러움을 타는 성향이 있다. 대중정치인이다 보니 뽐내고 싶고 자랑하고 싶고 국내외 대형행사에서 폼 잡는 형식을 결코 싫어하지 않지만 성격의 가장 아래 깔린 기저는 그런 것 같다. 영어로 말하자면 ‘샤이(Shy)한 성격’쯤 되겠다.2005년 후반기까지 집권 3년간 “쓸데없이 사진이나 찍고 폼이나 잡는, 전시형·과시형 행사는 않겠다”며 잘라 말했던 속내에는 이런 스타일이 분명히 작용했다. 중반기를 넘어서면서 참모와 청와대 밖의 조언그룹들은 다각도로 “민생현장을 두루 방문하시라”며 “재래시장 가고 중소기업에도 가고 사업자들도 만나고…” 하며 심심찮게 건의했지만 대개 비슷한 대답을 들었다고 한다. “사진 찍고 생색내는 일이 뭐 중요하냐”는 정색을 한 반문에 더 이상 말이 진행되지 않았던 것이다. 탄핵으로 직무가 정지되는 최악의 상황까지 벌어진 것도 천성적인 실용주의 관점을 고수하도록 하는 데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그러나 2006년 들어 많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일부에서는 ‘쇼’라고 비판도 하지만 정치일정과 행정과정 외에 필요한 모습도 있다고 인식한 것 같다. 노대통령이 외부로 발길을 적극 내디딘 데는 여러 참모들이 기여했다. 그중에는 조기숙 전 홍보수석도 있다. 조 전 수석은 청와대 참모 1년 생활을 정리하고 나가면서 “대통령이 민생현장으로 나가도록 여러 번 건의했고 약속을 받아냈다”는 취지로 자신이 홍보수석 근무기간에 기여한 부분이라며 설명한 바 있다.지난 3월28일 서울 남대문 옆 대한상공회의소 회관을 찾아가 대기업, 중소기업 대표 등 350명 가량의 CEO들을 대상으로 1시간30분짜리 특강을 한 것도 이렇게 근래 들어 생각이 바뀐 점에서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상의가 ‘신장개업’을 이유로 대통령의 특강을 요청했고 노대통령은 비교적 일찍 이를 받아들였다.물론 대통령의 외부특강이 이 행사가 처음은 아니다. 지난 2003년 5월 전남대 강연, 2004년 2월 전경련 신춘포럼 강연, 2004년 5월 연세대 리더십센터 특강, 2005년 11월 과천 중앙공무원연수원의 신임사무관 특강이 있었으니 이번이 다섯 번째 특강이다.3월31일 밤에는 김원기 국회의장, 이용훈 대법원장, 한덕수 총리 직무대행 등 3부요인과 윤영철 헌법재판소장, 손지열 중앙선관위원장 등 헌법기관장들을 초청해 만찬을 가졌다. 초청에 특별한 계기는 없었다. 굳이 명분을 가져다 붙이자면 3월 초 아프리카 3개국 순방결과를 설명한다는 것이었지만 행보를 적극적으로 넓혀나가는 것의 연장에서 보는 것이 맞겠다.4월1일 강신호 전경련 회장, 손경식 대한상의 회장, 김용구 기협중앙회장, 이수영 경총회장, 이희범 무역협회장 등 경제5단체장을 부부동반으로 초청, 청와대 내 상춘재에서 오찬간담회를 가진 것도 같은 맥락이다. 경제5단체장과의 오찬은 토요일이어서 주목됐다. 노대통령은 보통 토요일엔 측근과 오랜 지인 등 아주 가까운 사람들과 비공식적으로 만나거나 참모들과 토론회 등을 가질 뿐 외부에 드러나는 공식행사를 갖지 않는다. 5단체장 부부초청행사에 대해 김만수 청와대 대변인은 의미 있는 한마디 설명을 붙였다. “각계각층과 소통하기 위한 것이다. 적극적인 대화를 위한 것이다.” 여야 원내대표를 만났고 인터넷 국민대화를 가진 것의 연장이라는 말이다.또 4월 첫째주에는 국회 법사위 소속 여야의원들을 초청해 만찬을 겸하는 간담회를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노대통령은 상임위별로 의원들을 따로따로 만나 주요 국정현안에 대한 법제화를 부탁한다는 생각을 일찍부터 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실제로는 2005년도 교육위 소속 여당의원들을 청와대로 한 번 초청한 게 전부였다. 이전에는 정치적 제스처로 보일 수 있는 일이라며 마다했던 것을 새로 하기 시작한 것이다.각계와 두루 만나겠다지만 노대통령이 집중적으로 만나는 층은 일단 경제계 리더들과 국회의원들이라고 볼 수 있다. 남은 임기 중 주력하겠다고 밝힌 양극화 해소 및 동반성장을 위해서는 기업들의 적극적인 지원과 든든한 후원이 무엇보다 필요한 시점이기도 하다. 노대통령 스스로도 “양극화 해소는 좋은 일자리 창출에서부터”라는 인식을 드러냈고 세금문제에서도 추가과세는 경제적 상류층에 집중될 것이라는 점을 거듭 밝혀왔었다. 모두 기업 상층부의 의지와 직결되는 사안이다.국회도 당연히 노대통령의 남은 집중과제 해결에 필수적이다. 입법 작업은 물론이고 국회에서 행정부처 일에 하나하나 시비를 걸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더구나 여당도 확실히 장악할 수 없는 형편인데다 여소야대의 상황이다.임기의 내리막길에 접어들면서 노대통령의 스타일에 적잖은 변화가 나타났다. 이 변화가 끝까지 계속될까. 또 국정운영의 각론으로도 이어질 것인가. 3월17일 여야 원내대표들과 만찬간담회에서 노대통령은 청와대의 높은 담을 허물어나간 과정을 소개하면서 “이제 마음도 개방해가고 싶다”고 했다. 그 말처럼 대화정치와 화합행정을 주도해 나갈 것인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