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3일 서울 여의도 보람증권 빌딩 6층 노사정위원회 사무실.제2기 노사정 위원회가 출범한 이날 50평 남짓한 노사정위원회 사무실은 아침 일찍부터 북새통이었다. 오전 9시로 예정된 김원기 제2기 노사정위원장(61)의 출범 기자회견에 앞서 사무국 직원들과 보도진들이 뒤엉켜 이곳저곳에 전화를 걸어가며 밤을 새워 아침까지진행된 정부와 민주노총과의 노사정 참여협상 결과를 체크하느라분주했다. 2기 노사정 출범을 몇시간밖에 남기지 않은 상황에서 한국노총과 함께 노동계의 양대산맥중 하나인 민주노총의 참여 여부는 초미의 관심이 아닐 수 없었다.전날 밤부터 추적추적 내리는 비 탓에 기자회견장에 10여분 정도늦게 도착한 김원기 위원장이 9시20분께 보도진 앞에 섰다. 민주노총의 참여가 확정되지 않은 상황이어서인지 표정이 밝지 않았다.『존경하는 국민여러분. 오늘 제2기 노사정위원회가 국가의 위기를극복하려는 국민의 열망에 힘입어 출범하게 되었습니다. 그동안의숱한 진통을 극복하고 노사정의 3주체가 대화와 타협을 통하여 국난극복에 힘을 합치기로 뜻을 모았습니다. 저는 이 자리를 빌려 이런 역사적인 출발을 가능케 한 노사대표들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회견문을 읽어 내려가는 목소리도 무거웠다.『지금 이 시간에도민주노총의 합류를 위해 노력하는 중이며 반드시 참여할 것으로 확신합니다』라는 대목을 힘주어 읽긴 했지만 굳은 표정은 회견 내내풀리지 않았다. 기자들의 질문에 대답하면서 『민주노총이 오늘중엔 결단을 내릴 것』이라며 끝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으려고 애쓰는모습도 보였다.그러나 그날 오후 민주노총은 기자회견을 갖고 『정리해고제 등 쟁점사항에 대해 정부측과 이견을 좁히지 못해 노사정위에 불참키로결정했다』고 발표했다. 제2기 노사정의 선장을 맡은 김위원장 입장에선 돛 하나를 펴지 않고 항해를 시작하게 된 셈이다.그러나 김위원장은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다. 지난 5일 민주노총이총파업을 철회하고 노사정위 참여방침으로 선회했기 때문이다.4선 의원 출신에 13대 국회의 여소야대 정국에서 제1야당(평민당)원내총무로 5공청산 청문회개최 등 복잡한 현안들을 고도의 정치력과 타고난 협상력으로 풀어나갔던 김원기 위원장. 지난 3일 2기 노사정위원회의 불안한 출발은 협상의 명수라는 그에게 주어진 이번숙제가 결코 쉽지 않음을 단적으로 보여준 것에 불과하다. 사실 제2기 노사정은 지난 1기 노사정에 비해 안팎의 여건이 훨씬 어렵다는 게 중론이었다.무엇보다 지난 2월 1기 노사정의 대타협 때에 비해 경제위기의 긴박감이 덜한 데다 국민들의 긴장감도 많이 이완됐기 때문이다. 당시엔 발등에 떨어진 외환위기로 어떻게 해서든 노사정이 고통분담의 합의를 이끌어 내야 한다는 국민적 공감대가 강했다. 그러나 지금은 일단 외환위기는 모면했다는 인식 때문에 노사정 합의를 압박할만한 국민여론이 형성되지 못하고 있다.또 1기 때만 해도 기업들의 정리해고가 본격화되지 않아 대량 실업의 고통을 근로자나 국민들이 피부로 느끼지 못했었다. 하지만 이젠 실업자 수가 1백50만명을 넘어서면서 실업고통에 대한 저항감이서서히 싹트고 있다. 게다가 2기 노사정이 본격 가동되는 6∼7월엔각 기업에서 정리해고 협상등 임단협을 치러야 할 시점이기도 하다. 자칫하다가는 현장의 분위기가 격해져 노사정 협상에 악영향을미칠 공산이 크다.이 뿐 아니다. 1기 노사정은 정부과제 71개를 포함해 모두 90개 사항에 대해 합의를 도출하는 것으로 임무를 마쳤다. 그러나 2기 노사정은 1기에서 합의된 사항을 본격 이행시키고 또 새로운 의제를논의해야 하는 이중 부담을 안고 있다.◆ ‘숨은 복병’ 산재… “잘해야 본전”여기에 이미 제도를 완비한 정리해고제와 근로자 파견제에 대해서노동계가 재협상을 요구하고 있어 숨은 복병이 많다. 2기 노사정에서 논의해야할 의제중에도 범국민적 실업대책과 임금·퇴직금제 개선등 간단치 않은 문제들이 산재해 있다. 제1기 노사정 위원장을맡았던 한광옥 국민회의 부총재가 2기 노사정 위원장 연임을 극구고사했다는 얘기도 이해가 갈만하다. 노사정 위원장 자리야 말로「잘해야 본전이고 잘못하면 노사정 모두에게 욕을 먹는다」는 건상식이기까지 하다. 이처럼 간단치 않은 제2기 노사정의 험로를 김원기 위원장이 어떻게 헤쳐 나갈지에 모아지는 국민적 기대와 우려는 크다.물론 주변에선 우려보다는 기대가 많다. 김원기 위원장의 정치 이력이 말해주듯 그는 강한 소신과 탁월한 정치감각을 겸비한 정치가이기 때문이다. 김위원장은 실제로 「동교동 본류」가 아니면서도13대 평민당 원내총무로 발탁돼 수많은 정치협상을 이끌며 DJ의 신임을 얻었다. 이후 지난 95년 국민회의 창당 당시엔 민주당에 남았고 통추(국민통합추진회의)를 만들어 DJ와 다른 길을 걷기도 했다.지난 대선 막판에 국민회의에 합류해 현재 국민회의 상임고문을 맡고 있는 그의 정치행보는 「정치인 김원기」를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평소에 말이 적은데다 무게를 갖고 일을 추진하는 스타일때문에 그가 제2기 노사정 위원장에 내정되자 대부분의 첫 평가가「적임」이었던 것도 사실이다. 재계나 노동계 양측으로부터도 「무난하다」는 얘기를 들었다.당내 비주류 라는 입지상 대통령이나 정치권으로부터의 지원이 약하지 않겠느냐는 지적에 대해서도 측근들은 『절대 그렇지 않다』고 못박는다.『김대중 대통령이 대통령 당선 첫 소감발표에서 감사의 뜻을 표한 사람이 두사람 있었다. 그게 바로 당시 김종필 자민련총재와 김원기 통추 대표였다. 김원기 위원장에 대한 김대통령의배려는 아직도 각별하며 당내에서도 마찬가지다.』(김위원장 측근)어쨌든 김원기 위원장은 지난 5월13일 김대통령으로부터 2기 노사정 위원장 위촉장을 받고 『제2기 노사정의 합의도출을 필생의 과업으로 여기고 진력하겠다』고 말했다. 또 『앞으로 「정치인 김원기」가 아니라 「노사정위원장 김원기」라는 이름이 기억에 남을수 있도록 하루 24시간 이 일에만 전념할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다.과연 제2기 노사정이 마무리될 때 김원기 위원장이 활짝 웃을 수있을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