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현 SK그룹회장이 지난 8월26일 새벽 자택인 서울 광장동 워커힐아파트에서 향년 68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재계 총리」라는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의 회장을 3회나 연임하면서 재계의 화합을도모하고 자유시장경제를 추구해왔던 최회장의 갑작스런 작고에 재계에서는 『큰 별이 졌다』며 최회장이 생전에 보여준 리더십을 다시 볼수 없다는 사실에 대해 안타까워하고 있다.재계에서 높이 평가하고 아쉬워하는 최회장의 리더십은 생전에 재벌총수, 전문경영인, 전경련회장으로서 튼튼한 학문적 지식을 토대로 보여준 합리적이고 절제된 리더십을 가리키는 것이다. 기업경영에 대해 감각적 본능적인 다른 경영인들과 달리 현실에 대한 정확한 분석과 해법 제시, 미래에 대해 탁월한 통찰력과 이를 비전과연결시켜 밀고 나가는 강력한 추진력 등을 보였다는 것이다. 이승윤 전 부총리(현 금호그룹 고문)는 『최종현 회장은 경영인으로서드물게 학문적 지식과 경영철학, 경영능력을 겸비한 재벌총수로 세계 그 누구와 견주어도 결코 뒤지지 않는 리더십을 가진 경영인이었다』고 말했다.◆ 재벌총수로서의 리더십SK그룹을 이끄는 재벌총수로서 최회장이 보여준 리더십의 요체는탁월한 통찰력. 「가장 효과적으로 조직을 발전시킬 수 있는 요소는 통찰력」(미국 슬로얀스쿨 E.H.샤인 교수)이라는 말처럼 최회장은 미래에 대한 흐름을 잡으려고 노력하며 그것을 기필코 실현하는스타일이었다. 이 전부총리는 『변화와 흐름을 주시하며 미래지향적인 큰 가닥만을 최회장 자신이 잡아주고 나머지는 전문경영인들에게 맡기는, 거시적인 경영을 하는 그룹 총수였다』고 말했다.「10년 앞을 내다보고 사업을 한다」는 최회장의 미래에 대한 통찰력이 잘 나타난 것은 재계 5위의 대기업으로 발돋움하는 도약대가됐던 지난 80년의 대한석유공사(옛 유공, 현 SK) 인수와 94년의 한국이동통신(현 SK텔레콤) 인수를 들 수 있다. 지난 73년 이미 「석유에서 섬유까지」라는 수직계열화를 경영목표로 내세운 최회장은삼성 등 굵직한 대기업들을 물리치고 대한석유공사를 인수, 지난91년 6개의 대규모 석유화학공장을 준공함으로써 결국 수직계열화의 집념을 실현하는 「뚝심」을 보여주기도 했다.지난 1월초 대학교수들과의 신년하례모임에서는 『김영삼대통령에게 96년12월에 경제비상사태를 선언하라고 요구했고 지난해 11월1일에는 면회신청까지 해 위기가 임박했다고 말했으나 받아들여지지않았다』고 밝혀 큰 아쉬움을 주기도 했다.◆ 전문경영인으로서의 리더십창업자인 형 최종건 회장의 돌연한 사망으로 경영대권을 이어받아스스로를 「창업 1.5세대」라고 불렀던 최회장은 서구식 합리주의와 인간주의에 바탕을 두고 철저한 자율경영을 추구한 전문경영인이기도 했다. 전문경영인들이 오전에 주요업무를 처리하는 것을 감안해 아예 자신의 집무실로 나가는 시각을 오후로 늦추는 세심한배려를 보일 정도였다. SK텔레콤에 소액주주소송을 벌이기도 했던참여연대의 한 인사는 『(SK텔레콤의 경영진이)문제가 발생하면이를 전향적으로 해결하려는 노력하는 태도였으며, 다른 그룹총수들과 달리 계열사 사장들에게 많은 독립적인 권한을 부여하고 힘을얹어주는 인상을 받았다』고 말했다.지난 78년에는 경영관리교범이라고 할수 있는 선경경영관리체계(SKMS)를 창안, 이를 바탕으로 세계 초일류기업을 추구하는 수펙스(SUPEX)개념을 전사적으로 추진하면서 기업중 가장 먼저 세계화를 경영목표로 제시하는 등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경영방식을 현실로 구현하려 했다.인재의 중요성을 일찍이 간파하고 인재양성에 전념한 것도 전문경영인으로서 최회장의 리더십을 보여주는 사례다. 일찍이 「경영경쟁의 시대가 다가오고 결국 인적자원의 질이 승패를 가른다」고 판단한 최회장은 지난 73년부터 96년10월까지 문화방송의 장학퀴즈프로그램을 후원하는 한편 74년 사재를 털어 한국고등교육재단을 세우는 등 후학양성에 열성을 다했다. 최회장의 지원으로 외국에서박사학위를 받고 국내외에서 활동하는 교수만도 2백여명이나 된다.한국고등교육재단의 도움으로 미국에서 유학을 한 이수종교수(서울대 물리학과)는 『후일에 어떤 대가를 바라거나 회사의 이익을 염두에 둔 지원이 아니었다』며 『생전에 만날 때마다 토론을 즐긴최회장은 어떤 방법으로 인재육성을 지원해야 나라에 도움이 되고인재가 제 몫을 다할지 항상 궁금해했다』고 말했다.◆ 전경련 회장으로서의 리더십전경련 회장직을 연임하면서 정부를 상대로 철저한 시장경제를 강조하는 한편 안으로 재계의 화합과 조정을 강조한 최회장의 리더십은 철저한 합리적 시장경제주의자라는 평이 뒤따른다. 이 전부총리는 『최회장은 자유시장경제에 대한 신봉자로 학풍이 자유로운 시카고대학에서 공부(경제학석사)를 한 영향이 컸다』고 최회장에 대한 기억을 되살렸다. 최회장의 시장경제에 대한 확고한 신념은 6공화국시절 재무장관과 통화·금리논쟁을 벌일 정도였으며 지난 95년에는 전경련 회장연임 기자회견에서 당시 경기과열이라고 판단한정부의 총수요억제정책을 비판한 대가로 세무조사를 당하는 곤욕을당하기도 했다.시장경제주의를 신봉하는 최회장의 신념은 대상에 관계없이 조금도굽혀지질 않았다. 지난 93년 우루과이라운드 타결을 앞두고 쌀시장개방의 불가피성을 역설한 것과 96년말 앞으로의 경영환경이 불확실한 점을 들며 대그룹의 5년간 임금동결을 제안하기도 했다. 물론당시 농민이나 노조 등으로부터 격한 항의를 받기도 했지만 결국쌀수입과 IMF구제금융으로 현실로 드러나기도 했다.그러나 최회장에게도 어려움은 있었다. 노태우 전대통령과 사돈관계를 맺은 이유로 힘들게 인수한 한국이동통신을 반납해야 했으며지난해 6월에는 폐암수술차 미국에 있던 자신의 병간호로 과로한부인 박계희여사를 먼저 저세상으로 떠나보내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재계에서 금슬좋기로 소문났던 최회장부부였다. 그러나 이러한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최회장은 단전호흡으로 심신을 다스리며 자신에게 철저했다. 작고하기 전에도 기수련에 관련한 두번째 책을집필중이었다.『평소 최회장은 세계최고의 대학을 만드는 것이 꿈이라고 자주 말해 왔습니다. 이를 위해 엄청난 자금과 인재가 필요하다고 생각한최회장은 20여년전에 경기도 남부지역의 불모지를 개간해 최고급가구원목으로 꼽히는 블랙월넛이라는 호도나무를 심었습니다. 보통30~40년되면 사용할 수 있는 나무로 지금 숲을 이루고 있습니다.얼마 안 있으면 이 나무들을 팔아서 자금을 마련할 기대에 부풀기도 했습니다. 인재양성을 위한 교수진도 이미 한국고등교육재단을통해 키워왔고요. 장학금지원시 SK에서 일하라는 조건 같은 것은전혀 없었어요. 오직 국가와 민족을 위해 능력을 키우고 써달라는주문 뿐이었어요. 그만큼 사욕이 없는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그 큰꿈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가셨습니다. 과연 최회장만큼 큰 흐름을보는 경영자가 다시 나올지 안타깝기만 합니다.』 이전부총리의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