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20세기는 1차대전의 발발로 시작됐고, 이의 실질적인 마감은 1989년 전세계를 주목케한 베를린장벽의 붕괴였다. 그러면유럽의 21세기는 무엇으로 시작될 것인가. 2002년으로 예정된 유럽의 단일통화통합, 즉 유러화의 탄생이 이를 상징할 것임을 부정하기 어려울 듯 싶다.20세기의 마감이 목전에 임박한 오늘날 전세계의 초강국들은 새로운 이념을 내걸고 각기 국가전략의 기획안을 은밀하게 노출하고 있다. 미국은 시장개방과 규제완화의 이념을 내세우면서 자국이 자신있게 경쟁력을 갖춘 금융산업에서의 글로벌 기반강화를위해 자본자유화를 밀어붙이고 있다. 지난 1년반의 기간중 아시아, 러시아, 중남미가 극히 유사한 성질의 외환금융위기에 빠져값비싼 희생을 치르고 있음에도 미국은 투기자본의 폐해에 대한구체적인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국제적인 자본규제책의 도입을반대하고 있다.독일의 신임 슈뢰더 총리는 1차대전 종전 80주년 기념식에 참석해달라는 자크 시라크 프랑스대통령의 초청을 전후 독일 총리로서는 최초로 거부했다. 독일의 반성도 중요하지만 독일의 전후세대가 과거의 도덕적 채무를 계속 짊어지고 가는 것은 바람직하지않다는 그의 주장이다. 아울러 슈뢰더는 NATO 중심의 유럽방위체제에도 변화가 불가피하다고 지적하면서 그간 성역시되어온 미국패권체제에 의문을 제기했다.◆ 독일 일본 중국도 미국 패권체제에 반기일본은 아시아 외환위기 이후 자신에게 빗발치게 쏟아진 서방의압력과 협박을 피해 줄곧 낮은 포복자세로 엎드려 있다가 지난9월 달러의 약세화를 틈타 엔화 국제화에 대한 지역의 암묵적인동의를 이끌어내고 있다. 아시아 위기가 러시아 중남미로 확산되면서 미국의 아시아전략이 중심을 잃고 혼선을 빚게 되자, 일본은 즉각 숨겨둔 아시아 지원의 보따리를 풀어젖히면서 역내 금융경제 리더십의 확보를 위한 야심을 드러내고 있다.중국은 이미 지난 20년간 개혁개방의 괄목할만한 성과를 거두면서 더 이상 「잠자는 호랑이」가 아님을 전세계에 과시했고, 아시아 위기 속에서도 위앤화의 절하를 의연하게 자제함으로써 맏형으로서의 자질과 의지가 있음을 천명했다. 당장 일본과 맞서아시아의 패권다툼을 벌일 생각은 없지만 신중한 견제력을 구사하면서 시간벌기에 임하고 있다.실로 세기말 우리를 둘러싼 세계정치경제구도의 변화는 심상치않다. 새로운 천년의 변화를 예측하는 것은 어렵지만, 적어도 전후체제의 종식이 역사적인 수순을 밟고 있음을 우리는 감지할 수있다. 여기서 전후 체제의 종식이란 구공산권의 붕괴로 이미 절반은 실현되었고, 나머지 절반은 패전국 독일, 일본의 국제적인지위확대라는 과제로 남아 있다. 다시말해 독일과 일본이 전후경제적인 실력을 비약적으로 높여왔지만, 전범국가의 낙인으로인해 정치적 군사적으로 운신의 폭을 갖지 못하고 있다는 불균형의 현실, 미국이 세계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종전 당시의45%로부터 20여% 남짓으로 지속적으로 하락되어왔지만 미국의 패권의지는 오히려 증대되고 있다는 모순의 현실은 새로운 세기가해결해야 할 최우선의 과제일는지도 모른다. 다만 이것이 극단적인 대립과 파국을 통해 해결될 것인지 혹은 합종연횡과 조정을통해 자연스럽게 해결될 것인지만이 문제일 뿐이다.어찌됐건 세계는 전후 미국과 달러에 의한 일극지배체제로부터분할지배체제로 서서히 변화해 갈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가풀어야 하는 의문은 독일과 일본은 왜 이다지도 달러에 대항하여새로운 통화권을 형성하는데 절치부심하고 있는가이다. 이에 대한 해답은 미국이 달러를 통해 누리고 있는 실익을 해명함으로써밝혀질 수 있다.오늘날 달러화는 국제준비통화이자 국제결제통화로서 거의 독점적인 지위를 향유하고 있다. 각국 정부와 통화당국은 달리 대안이 없기에 자신이 보유한 대외유동성을 달러자산을 통해 운용하고 있고, 민간부문에서는 무역과 투자활동에서 달러화를 결제통화로 절대 의존하고 있다. 이같은 달러의 준강제적인 통용성은곧바로 미국의 금융시장과 금융산업의 발전이라는 실익으로 연결된다. 세계각지의 금융위기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금융시장이 유독 활황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바로 달러에 유인되어 미국에 대거 유입되고 있는 거대한 외국자본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미국의금융기관들은 이를 통해 손쉽게 국제경쟁력을 확보하고 있다. 아울러 현금통화로서의 달러는 미국에게 막대한 부가가치를 창출하고 있다. 전세계 여행객들이 사용하고 있는 달러지폐 뿐만 아니라 마약 매춘 무기 등의 밀거래에서 독점사용되고 있는 달러지폐는 사실상 미국의 최대 수출상품의 하나이며, 미국은 거의 생산원가의 부담없이 지폐의 액면가치를 부가가치로 건지고 있다.◆ 2002년이면 유럽 각국 통화 사라져더욱 중요한 실익의 원천은 경제정책의 실패를 타국에 전가할 수있다는 점이다. 1980년대 레이건의 넌센스 경제학에 의해 미국은세계최대의 적자국, 채무국으로 전락했지만 미국의 금융시장이불안해지면 전세계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이유로 자신의 구조조정은 지속적으로 회피하면서 일본을 위시한 여타국들에 고압적인 정책협조를 요구하고 있다. 지난 10년간 일본이 겪은 버블의 발생과 파열 그리고 금융부실의 누적과 장기불황은 미국의 경제정책 실패에서 비롯되었다는 측면을 우리는 간과해서는 안된다.유러화통합은 내년도부터 2002년까지 준비단계를 거치게 된다.당분간 독일의 마르크화, 프랑스의 프랑화, 이탈리아의 리라화등 각국 통화의 일상적인 통용은 그대로 유지되지만 회원국 정부간의 거래, 은행간의 거래에서는 유러화를 결제통화로 사용하게되며, 물건가격은 반드시 해당국통화와 유러화로 중복 표기토록되어 있다. 일종의 시험도입기간을 거친다는 의미이다. 이후2002년 하반기부터는 유럽각국의 유서깊은 통화는 전면적으로 자취를 감추게 된다.유러화통합을 통해 유럽은 금융경제상의 지위를 크게 확대할 것임에 틀림없다. 유럽은 GDP와 수출 등 실물경제 규모에 있어 이미 미국을 상회하므로 금융경제면에서도 상응하는 대우를 받고자할 것이다. 결국 현재 60%에 상당하는 달러의 시장점유율은 저하될 것이고 궁극적으로는 달러 40 대 유러 40의 구도가 펼쳐질 전망이다. 지난 한달반 사이에 미국이 3차례나 금리를 인하했지만독일의 분데스은행이 전례없이 동반금리인하를 거부하고 있는 것은 유러화의 강세통화 이미지를 굳히기 위한 시장쟁탈전략의 일환임을 눈여겨 보아야 한다.최근 영국 독일 프랑스 등 유럽 주요국에서 속속 사회주의정권이집권함에 따라 유러화의 좌초를 점치는 혹은 이를 희망하는 자들이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유러화의 통합은 이미 결정적인 고비를 넘어섰다고 보아야 한다. 현재 미참가 상태인 영국도 결국에는 유럽의 일원임을 선택할 것이며, 토니 블레어의 제3의 길도어찌보면 좌파정권의 명분을 잃지 않으면서 유럽통합이라는 시장논리를 수용하기 위한 고육지책임을 이해해야 한다.그러면 유러화의 통합은 우리나라를 포함한 아시아에 어떠한 의미를 갖는 것일까. 일단 유러화 출범으로 국제금융시장에서 경쟁적인 쌍두마차 체제가 작동하게 되므로 급격한 외환금융위기의가능성이 다소 낮아진다고 볼수 있다. 무역자유화의 부작용이 미국과 유럽간의 통상마찰로 인해 다소 완화되었듯이 자본자유화의폐해도 다소 완충될 수 있으리라는 기대이다. 한편 유럽의 금융중심지가 기존의 런던으로부터 유럽중앙은행이 소재한 프랑크루르트로 이행할 가능성도 점쳐볼 수 있으므로 이에 대한 대비책을서둘러야 한다.그러나 아시아는 보다 근본적인 대응을 회피해서는 안된다. 언제까지나 서방의 일방적인 기획에 뒤따라 가기만 할 것인가. 그간실물경제 일변도로 서방을 추종해온 전략이 외환금융위기를 통해그 한계를 명확히 노출했다면 아시아는 금융경제 측면에서 공동의 자주적인 대응책을 마련해가야 한다. 아직 중국의 위앤화가국제통화로서 자격을 갖기에 미흡하므로 당분간 아시아는 금융경제면에서 일본의 리더십을 인정해야 한다. 어쩌면 일본으로 인해가장 많은 희생을 치른 한국이 일본 손들어주기의 역할을 자임해야 할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