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장쩌민 쇼크」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미래지향적인 관계구축을 목적으로 일본에 온 장주석이 과거문제를 그토록 강하게 제기하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 아키히토 일왕 주최 만찬에서 왜 인민복을 입었는가. 일중 공동선언의 전문을 중국에서 공표하지 않은 것은 무슨 까닭인가. 일본의 외교가는 장쩌민주석의일본 방문에 대한 평가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정부와 자민당일부에서는 『진절머리가 난다』 『과거문제제기로 미래지향이 어려워졌다』고 불만을 터뜨리고 있다.동북아를 무대로한 선진국들의 서밋행진이 일본-중국 정상회담으로 막을 내렸다. 11월12일 러일 정상회담을 시작으로 한국-중국,일본-미국, 한국-미국, 중국-러시아간 정상회담이 연속됐다.숨가빴던 이들 서밋행진에서 가장 관심을 끌었던 대목은 한반도를둘러싼 한중일 3국간 교차외교. 지정학적이나 역사적 측면에서 한국과 가장 밀접한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특히 장주석의 일본 방문은 최대 주목거리였다. 중국 국가원수로서는 첫 일본방문인데다 양국수교 25주년을 맞아 이뤄진 정상회담이었기 때문이었다.한국과 일본, 일본과 중국은 미래지향적인 파트너십을 구축키로 합의했다. 겉으로는 별차이가 없는 것처럼 볼수도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이는 바로 과거역사문제를 푸는 방법론의 차이로 인한 것이었다.장주석은 과거사 문제와 관련한 불만으로 「평화와 발전을 위한 우호협력 파트너십 구축」에 관한 공동선언문에 서명하지 않았다. 장주석은 일본 정계지도자들과의 회담및 와세다대 강연 등을 통해 『역사를 거울삼아 미래를 개척하자』고 강조했다. 지난달 30일 방일일정을 마치고 귀국하면서 일왕에게 보낸 전문에서도 과거침략행위에 대한 반성을 거듭 촉구했다.◆ 지나친 허리굽힘… 중국관계 악화올수도장주석이 이번 회담에서 과거역사를 문제삼고 나온 이유는 무엇일까. 정권의 기반인 군부와 보수파를 의식, 대일 강경노선을 택했다는 것이 외교가의 분석이다. 경제위기를 계기로 되살아나고 있는일본의 아시아주도 움직임에 제동을 걸기 위한 것이라는 분석이다.결론적으로 말해 일중 정상회담은 과거문제로 미래지향적인 파트너십을 구축하는데 실패했다는게 일반적인 평가다.이에비해 한일 정상회담에 대한 일본측의 평가는 한마디로 판이하다. 고무라 외상은 『김대중대통령은 역사를 청산하겠다는 의사가확실했으나 장주석의 경우는 달랐다』고 강조했다. 외교 소식통은『김대통령의 미래지향적인 자세와는 달리 장주석은 과거에만 너무집착했다』고 지적했다. 김대통령은 정상회담에서 「과거에 대해더이상 언급하지 않을 것」이라고 못박았었다. 과거청산을 위한 의지 차이가 결국 정상회담의 성패를 결정짓고 말았다는 것이다.한일 정상회담이후 두나라간 협력무드가 급속도로 다져지고 있다.정상회담에서 합의된 「새로운 파트너십 구축」을 실현하기 위해지난달 28일 가고시마에서 열린 한일 각료간담회에서 투자협정체결무역자유화 등을추진키로 했다. 새로운 어업협정도 체결했다.이 뿐만 아니다. 김종필총리는 이번 회의에서 일본주도로 아시아통화기금(AMF)을 창설할 것을 제안했다. 김총리는 『일본이 이제아시아의 리더가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오부치총리를 세계적인 지도자로 치켜세우기도 했다.한일간에 새로운 역사의 장이 열리고 있는 것은 분명한것 같다. 문제는 우리정부가 일본과의 관계 재정립을 너무 서두르고 있다는 점이다. 외교 소식통들은 『한국이 경제적인 지원을 노려 일본에 지나치게 허리를 굽히고 있지않느냐』고 지적하고 있다. 일부에서는『일본과의 밀착이 중국과의 관계를 악화시킬 수도 있을 것』으로분석하고 있다. 한일간을 가로 막았던 역사의 벽은 뛰어넘되 과거를 완전히 단절시켜서는 안될 것이라는 주문이다.◆ 한국이 아시아공조 중개역할 맡아야IMF사태의 의미를 역사적으로 평가하기엔 아직 이르다. 그러나 최소한 미국이 우리에게 있어 더 이상 「아름다운 나라,미국(美國)」이 아니라는 시대전환의 아픔을 외면해서는 안된다.IMF를 내세워 그간의 모든 불만사항을 해결하려 한 미국, 말로만혈맹일 뿐 정작 구제금융 지원에서는 자신의 뒷마당인 멕시코나 브라질에 비해 현격하게 차별한 미국, 98년이 금융위기의 해였다면99년은 통상위기의 해가 될 것이라며 우리의 유일한 탈출구를 가로막는 미국. 이것은 한미관계의 변화된 현주소이고 우리로 하여금아시아 연대에 눈뜨게 한 중요한 계기임에 틀림없다.그간 우리는 철저히 아시아를 외면해왔다. 우리사회의 소프트웨어를 들여다보면 빼다박은듯 일본을 모방했지만 「일본은 없다」며그 실체를 부정했고, 덩치는 인정하지만 무엇하나 배울 것이 없다며 중국을 내심 매도해 온 우리의 이중성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이제 아시아 공조는 우리가 풀어야 할 최우선의 과제로 다가왔다.외환금융위기의 극복만해도 구조조정만으로는 결코 충분할 수 없다. 엔화와 위앤화의 환율이 현상태를 유지해야 한다는 우호적 외부조건이야말로 위기극복의 절대과제이다. 또한 미국의 장기버블이언젠가 파열하여 장기불황에 빠져들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에 우리는 아시아를 끌어안고 서로를 위한 완충의 시장을 마련하지 않으면 안된다.아시아연대에 있어 한국의 역할은 실로 막중하다. 실력만큼 대외적인 영향력을 갖는 것이 역사의 순리라면 중국과 일본도 서로를 옥죄는 불신의 고리를 끊어야 하며, 이때 중간자의 역할은 한국의 몫일 수 있다. 오늘날 일본은 미국의 전쟁수행비용을 도맡아 대고있지만 UN안보리의 상임이사국 자리를 얻지 못하고 있고, 러시아도옵서버로 참여하는 G7회의에 중국이 빠져 있다. 더욱 한심하게는전세계에서 유독 중국, 일본, 한국만이 지역경제권을 형성하지 않고 각개전투를 벌이고 있다. 최근 김종필 총리의 AMF창설 지지발언이 여론의 비판을 받았다. 미국과 중국이 찬성하지 않고 있는 사안을 성급하게 다루었다는 비판이다. 꼭 그렇기만 한 것일까. 공동의 위기야말로 구원의 청산을위한 절호의 기회일 수 있기에 이를 화두로 삼아보는 것은 어떨까.AMF창설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를 매개로 아시아가 함께 풀어야 할 모든 숙제를 총정리할 수 있다면 이 또한 큰 성과가아닐 수 없다.이미 달러의 광폭성은 백일하에 드러났고 아시아는 적어도 중국의위앤화가 국제통화로 실력을 키우기까지는 일본의 엔화에 의존하지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보는 각도에 따라서는 엔블록화는 이미 1단계의 수순을 밟고 있다. 지난 8월 아시아의 중앙은행장들이 만나국채환매협약을 체결했기 때문이다. 이는 아시아 각국이 평소 외환보유고의 일정 부분을 일본국채로 운영하다가 유사시에는 이를 일본 중앙은행에 빌려주는 대신 급전을 얻어 외환위기를 진화시킨다는 구도이다. 따라서 AMF창설 논의는 엔화의 역내 기축통화로서의지위를 당분간 인정하되 일본이 아시아경제를 좌지우지 못하도록적절한 안전장치를 마련하는 문제, 그리고 수평적 분업확대와 내수시장 진작 등 일본이 공헌해야 할 과제를 집중적으로 부각해야 한다.유럽통합은 견원지간인 독일과 프랑스를 양대축으로 추진되어 왔다. 전쟁재발의 방지를 위해서는 견제보다는 상호간의 협력체계가필요하다는 인식, 그리고 미국의 위압적 무게를 혼자 힘으로 짊어질 수 없다는 현실론이 그 발로가 되었다. 이때 우리가 흔히 간과하기 쉬운 점은 독일과 프랑스간에 베네룩스라는 중간자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벨기에는 EU의 본거지를 제공했고, 네덜란드는 유럽중앙은행의 초대총재직을 맡았다. 냉전체제 종식이후 전횡의 도를 더하고 있는 미국에 대한 견제는아시아 공조만이 가능하며, 이때 한국은 베네룩스의 역할을 맡아수행해야 한다. 말끝마다 아태강국이니 동북아 중심국가니 하는 포장형의 국가이념을 내세우지 말고 이제 우리나라는 지정학적 강점을 살려 중심 국가로서 자리매김함으로써 「작지만 실속있는 나라」를 구현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