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를 보는 시각이 이렇게도 다를 수 있는가. 최근 경기부양 여부를 놓고 정책당국자들이 벌이는 설전에 어리둥절해 하는 사람들이많다. 각종 금융지표의 호전을 거품으로 폄하하는 쪽이 있는가 하면 금리인하가 오히려 경기회복을 지연시킬 수 있다는 시각도 제기되고 있다. 도무지 평범한 경제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얘기들도 오가고 있다. 여기에는 물론 정부내 경제정책의 주도권을 둘러싼 역학관계도 작용하고 있지만 경제의 흐름을 바라보는 시각 자체에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다고 볼수 있다. 그러면 논란이 촉발된 발단부터 살펴보자.◆ 한은, ‘주가만 상승 경제’ 비정상작년말부터 추진해온 정부의 경기부양책은 「뜻밖에도」 치밀하고정교한 것이었다는 지적이다. 「뜻밖」이라는 의미는 경기부양 시나리오중 아무도 예상치 못한 부분이 있었다는 뜻이다. 정부가 당초 통화확대와 금리인하를 통해 경기회복에 나서겠다고 선언했을때만 해도 대다수의 경제전문가들은 이를 반신반의했다. 돈을 찍고이자율을 낮출 경우 금융경색은 어느정도 해소되겠지만 실물경기에그다지 큰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정부, 특히재정경제부는 히든카드를 준비하고 있었다.그것은 다름아닌 증시활황이었다. 저금리로 갈 곳을 잃은 시중의여유자금들이 대거 증시로 몰리면서 주가는 천정부지로 올랐다. 마침 유가와 환율도 동반하락하면서 금융장세를 부추겼다. 정부는 새해초 종합주가지수가 6백선을 돌파하자 마침내 숨겨놓은 카드를 내밀었다. 기업들의 대폭적인 유·무상증자 허용과 함께 상장요건을완화한다는 내용이었다.증시의 풍부한 자금을 기업쪽에 수혈하기 위한 조치였다. 우량기업이든 부실기업이든 직접금융을 통해 종전보다 높은 가격에 주식을팔 수 있는 길이 열리게된 것이다. 저금리로 원리금 상환부담을 줄일 수 있는 상황에서 증자여건까지 호전된다면 기업들의 자금난은눈에 띄게 완화될게 분명하다. 당연히 기업들의 설비투자가 늘어날것이고 고용여력도 증대할 것으로 예상된다.재경부가 한사코 「인위적인」 금리인하를 밀어붙인 배경에는 이처럼 「원대한」 구상이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재경부는최근의 주가급등을 반기며 「약발」을 만끽하는 입장이다. 주가가단기간에 폭등한 것은 사실이지만 현재 시장여건을 감안할 때 이정도의 상승은 당연하다는 것이다. 재경부 관계자는 『최근의 주가상승은 금리하락과 기업의 수익성 개선, 실물경기 호전에 대한 미래의 기대가 반영된 것』이라며 『주가상승이 실물경제의 가시적인회복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정책역량을 집중시킬 계획』이라고 밝혔다.그러나 전통적으로 재경부의 「저격수」 역할을 해왔던 한국은행이가만 있을리 없다. 재경부의 득의에 찬 경기부양 시나리오에 「거품론」으로 찬물을 끼얹으며 논란을 촉발시키고 있다. 전통적으로두 기관의 갈등은 워낙 해묵은 것이어서 새삼 주목할 필요가 있겠느냐는 의견도 없지는 않다. 그러나 최근의 논쟁은 향후 경제정책의 향배가 달려 있다는 측면에서 많은 사람들이 촉각을 곤두세우고있다.우선 한은측은 실물경기의 호전이 뒷받침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주가폭등은 일반투자자들에게 큰 손실을 안겨다줄 수 있다는 입장이다. 사실 지표상으로만 볼 때 한은의 이같은 우려는 하등 이상할것이 없다. 작년 10월과 비교할 때 종합주가지수는 두배 이상 올랐으나 실물경제의 호전은 미미한 수준이다. 한은 관계자는 『재경부의 시나리오는 결과적으로 개미군단의 여유자금을 기업쪽으로 쓸어넣는 것』이라며 『경기가 되살아나지 않고 기업들의 수익성도 개선되지 않을 경우 투자자들이 엄청난 손해를 볼 것이 뻔하다』고우려했다.한은은 따라서 금리하락에 따른 주가상승이 거품으로 끝날 가능성이 높다는 생각이다. 오히려 구조조정의 지연으로 경기회복이 늦어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KDI(한국개발연구원) 역시 한은과 비슷한 의견이다. KDI측은 『금융권의 안정에도 불구하고 취약한 기업재무구조와 금융권의 잠재부실 등 한국경제의 구조적인 문제점은 여전히 치유되지 않고있다』며 경계의 목소리를 늦추지 않고 있다. 대기업들의 과잉투자가 해소되지 않은 상황이기 때문에 설비투자 증가를 기대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소비가 완전히 회복세로 돌아섰다고 보기도 어려워 「주가만 상승하는」 경제는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라는 것이다.◆ 정부, ‘효과 있다’ 재경부 손들어설상가상으로 주가에서 촉발된 거품논쟁은 물가쪽으로 옮겨졌다.금리인하를 위해 통화확대를 주장하는 재경부측은 연5% 이상의 물가상승률을 제시하는 반면 한은은 3%선을 고집하고 있다. 분야는달라도 동일한 논리에 의한 동일한 주체들의 설전이다.상황이 이렇게 되자 청와대가 서둘러 교통정리에 나섰다. 강봉균청와대 경제수석은 최근 「경제정책 상호간의 마찰시 조정원칙」이라는 것을 만들어 해당기관에 열람토록 했다. 강수석은 『증시회복은 기업의 재무구조 개선에 큰 도움이 되기 때문에 긍정적 효과가더 크다』면서 『플러스 성장을 지향하는 경기부양은 원활한 구조조정의 추진에도 도움이 된다』고 말해 재경부의 입장을 지지하는편에 섰다. 또 환율안정을 위해 금리의 추가인하가 필요하다는 견해를 밝혀 한은측에 등을 돌렸다.강수석은 물론 『모든 것을 희생하면서 경기부양에 나서는 것은 곤란하며 구태여 구조개혁과 경기부양중 우선순위를 밝히라면 구조개혁의 완결』이라고 덧붙임으로써 한은측의 체면을 살려주긴 했다.그러나 전체적으로는 정책의 우선순위에서 재경부의 손을 들어주었다는 평이 지배적이다.문제는 한은이 내심 승복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청와대의 개입으로목소리를 낮추고는 있지만 금리와 물가에 관한 정책결정권이 자신들에게 있는 이상 호락호락 당할 수만은 없다는 입장이다.어쨌든 이 와중에 각 경제연구소들도 올해 경제전망을 소폭 수정하기 시작했다. 경기를 놓고 치열한 논란이 전개되는 상황에서 작금의 경제상황을 더욱 꼼꼼하게 들여다본 탓이다.한국금융연구원의 지동현박사는 『금리가 대폭 떨어지면서 부실기업들의 채무상환 가능성이 높아졌기 때문에 경기가 호전된 것은 사실』이라며 『금융지표의 호전이 실물경기에 미치는 경로를 감안하면 올해 5월쯤에 가시적인 효과가 나타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또 대우경제연구소의 하정훈 박사는 『당초 올해 경제성장률을0.5%로 예상했으나 이를 상향조정하는 작업에 들어갔다』며 『내수가 살아나고 재고도 다소 늘어날 것으로 보여 상반기중에 플러스성장도 가능할 것 같다』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