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귀금속 전시회, 바이어 끌며 성황 ... 품질 우수해 10억달러 수출 가능

로스앤젤레스 코리아타운에 있는 래디슨윌셔호텔. 한국에서 막 도착한 기업인 13명이 손에 검은 가방을 들고 들어섰다. 이코노미클래스를 타고온 이들은 매우 피곤했지만 쉴 틈도 없었다. 체크인을 하자마자 컨벤션센터로 내려왔다. 기대와 불안감을 한몸에 안고서. 센터를 둘러보는 이들의 머리속에는 어떻게 하면 전시회를 성공리에 치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가득했다.귀금속 가공업체 대표들. 난생 처음 미국에서 대규모 전시회를 열겠다고 가방에 보석을 담아 찾아온 것이다. 각오는 비장했다. 때는 작년 6월초.외환위기 여파로 이들은 죽느냐 사느냐 하는 기로에 직면해 있었다. 금을 수출하는 바람에 원료를 확보할 수 없었다. 국가적으로 달러 확보가 시급한만큼 한마디도 벙긋하지 못한채 범국민적 행사에 동참해야만 했다. 더욱이 상당수 예비부부들이 결혼을 연기하는 바람에 판매도 격감했다. 1만4천개의 금은방 가운데 줄잡아 5천개가 문을 닫았다. 13만명에 달하던 종사자도 9만명으로 줄어든 상태.◆ 뉴욕 귀금속전시회에 한국관 개설이들의 진로는 분명했다. 가만히 앉아서 문을 닫느냐 아니면 수출로 돌파구를 찾느냐 하는 것뿐이었다. 순금을 수출하면 돈당 4만여원밖에 못받지만 가공해 수출하면 5만원을 넘게 받을 수 있다. 고용도 창출할 수 있다. 부가가치를 높일 수 있는 가공제품 수출이 훨씬 나은 것은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수출 노하우가 없었다. 일반 금은방을 상대로 귀금속을 가공해 공급하던 내수업체였기 때문.한국귀금속가공업협동조합연합회장으로 이들을 인솔한 강문희(59) 신우쥬얼리사장은 호텔에 도착해 전시회를 준비하는 일주일 동안 한잠도 잘 수 없었다. 스스로 아이디어를 내 전시회를 열자고 제의했건만 자신이 없었다. 자칫 실패하는 날에는 참가업체의 비난을 한몸에 받아야 하는 것은 물론 1억원이나 되는 전시회출품비용을 꼼짝없이 물어줘야 할 판이었다. 무엇보다 귀금속가공업체의 희망이 없어진다는데 대한 두려움이 컸다.라디오코리아를 비롯한 한국계 방송사와 신문사를 찾아가 협조를 요청했다. 이들은 발벗고 나섰다. 모국에서 어려움을 겪는 기업인들이 첫번째 귀금속전시회를 연다는 내용을 대대적으로 소개했다.6월11일. 반지 귀고리 목걸이 팔찌 등 정교하게 가공된 금세공품 10만여점이 컨벤션센터를 화려하게 장식했다. 전시회가 시작되자 교포들이 주로 찾아왔다. 세련된 제품들이 선보이고 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점차 유태계 중간도매상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귀금속유통은 유태인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이들은 주로 말레이시아나 멕시코에서 수입 판매하고 있었는데 한국산을 보자 입을 다물지 못했다. 너무나도 정교하고 세련돼 다른 나라 제품과 비교할 수 없었던 것. 금관을 만든 선조의 피가 면면히 흐르고 국제기능올림픽 금세공부문에서 5연패 도합 열세번이나 우승한 한국인의 손재주가 현란하게 드러난 것.닷새 동안의 전시회는 대성공이었다. 마지막날은 전시회 종료시간인 오후 5시가 넘어서도 상담을 기다리는 바이어가 장사진을 이뤄 호텔룸으로 옮겨 밤 11시까지 상담을 해야 했다. 전시회 기간중 업체들이 판매한 액수는 80만달러. 전시회이후 이어진 주문은 무려 1억달러가 넘었다. 덕분에 신우쥬얼리도 지난해 1백30만달러를 수출했다.전시회를 마치고 돌아오는 기내에서 강사장은 실신했다. 태어나 한번도 쓰러져 본 적이 없는 정력의 소유자였지만 피로가 누적된데다 긴장이 풀리면서 기절한 것.귀금속가공업계는 이 행사로 수출에 자신감을 얻었다. 올해 3억달러를 목표로 잡고 있다. 신우쥬얼리 역시 지난해의 약 4배에 달하는 5백만달러를 목표로 세웠다. 올 8월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뉴욕 귀금속전시회에 24개 업체와 공동 출품해 한국관을 개설할 계획이다.강사장이 이 분야에 뛰어든 것은 82년. 경남 거창에서 태어나 서울 을지로에서 액세서리 수출을 해 온 그는 좀더 부가가치가 높은 귀금속분야로 진출키로 마음먹었다. 시계골목으로 불리는 종로 예지동에 금은방을 차려놓고 종묘 옆에 가공공장을 차렸다. 외환위기가 터지기 전만 해도 단순한 귀금속가공 판매업자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제는 액세서리 무역을 통해 익힌 수출경험을 살려 내수산업을 수출산업화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수년내 10억달러 수출은 가능합니다. 바이어의 마음을 사로잡을 정도로 품질이 우수하고 디자인이 세련돼 있으니까요. 하지만 수출을 늘리려면 업계가 겪고 있는 몇가지 애로를 풀어줘야 합니다.』◆ 원료인 금 부가세 폐지돼야무엇보다 시급한 것은 원자재인 금(골드 바)에 대한 부가가치세를 없애야 한다고 주장한다. 합법적으로 유통되는 금에 부가세를 부과하다보니 밀수 금보다 경쟁력이 떨어지고 음성적인 유통이 성행한다는 것. 이는 세원 확보는 물론 수출산업화에도 도움이 안된다고 강조한다. 원료 금에 대한 부가세를 폐지하는 대신 유통단계별로 적정세율을 적용하면 오히려 세수도 늘고 산업도 양성화할 수 있다고 덧붙인다.또 하나는 기능인력 채용시 고용보조금을 달라는 것. 귀금속 가공업체는 대부분 영세하다. 종업원이 5명이 안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수출이 늘면서 기능인력을 뽑으려 해도 신규 채용자의 전직장이 고용보험에 가입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고용보조금지급을 거절당하고 있다.강사장은 세계 정상급 귀금속 가공기술을 가진 한국의 기능인력중 3천여명이 미국과 일본에서 「머슴살이」를 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들이 한국에서 어엿한 산업역군 역할을 하려면 귀금속가공산업에 대한 각계의 관심과 배려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02)743-25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