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니스 포커스]
그래픽=송영 기자
그래픽=송영 기자
3%대 인플레이션과 고금리·고물가·고환율 등 ‘신(新) 3고(高) 현상’이 지속되는 가운데 중동발 지정학적 리스크까지 덮치며 금융시장이 출렁이고 있다.

수익성 악화와 경기침체 장기화 우려가 커지면서 기업들은 감량 경영에 돌입해 자산 매각, 채산성 없는 사업부문 철수, 설비투자 축소, 인력 감축 등을 통한 ‘군살 빼기 작업’을 본격화하고 있다.

공격 투자→팔자로 돌아선 SK그룹

최근 자산 매각에 가장 적극적인 곳은 SK그룹이다. SK그룹은 공격적인 투자와 M&A를 성장 엔진으로 삼아왔지만 최태원 회장이 ‘서든데스’ 위기를 언급했던 지난해 하반기부터 그룹 내 각 사업을 점검하고 최적화하는 리밸런싱 작업에 한창이다.

특히 최창원 SK수펙스추구협의회 의장 취임 이후 투자조직 통폐합, ‘확장’에서 ‘긴축’으로 경영 기조가 완전히 바뀌면서 ‘팔자’ 기조로 돌아섰다. 일시적 수요 둔화에 직면한 전기차 배터리와 그린 사업 경쟁력 제고가 최대 화두다.
서울 종로구 SK그룹 사옥. 사진=한국경제신문
서울 종로구 SK그룹 사옥. 사진=한국경제신문
SK는 그룹 차원에서 글로벌 컨설팅업체 맥킨지에 배터리 사업의 경쟁력 강화 및 구조 개편 방안을 마련해달라고 의뢰한 바 있다. 맥킨지 보고서와 ‘SK 경쟁력 강화 태스크포스(TF)’의 제안을 토대로 사업 재편 방안이 수립될 전망이다. 빠르면 6월 열리는 확대경영회의에서 사업 재편안의 윤곽이 드러날 것으로 예상된다.

각 계열사들도 자산효율화 작업에 분주하다. SK이노베이션의 석유개발 자회사 SK어스온은 지난 2월 페루 LNG광구 지분 20%를 미드오션 에너지에 3400억원에 매각했다. 계열사와 중첩된 LNG 사업을 축소하고 탄소포집저장(CCS) 등 미래 성장 사업 추진에 속도를 낸다는 전략이다.

SK스퀘어는 반도체 중심으로 포트폴리오를 전환하기 위해 보유 중이던 크래프톤 지분 2.2% 전량을 최근 블록딜 방식으로 매각하며 약 2600억원의 현금을 확보했다. SK스퀘어는 지난해 SK쉴더스의 지분 일부를 스웨덴 발렌베리 가문의 글로벌 투자회사 EQT파트너스에 매각해 8600억원을 마련했다.

SK네트웍스는 자회사 SK매직이 가전 일부 영업권을 매각한데 이어 최근 어피너티에쿼티파트너스에 SK렌터카 매각을 추진하고 있다. SK렌터카 매각으로 8500억원 수준의 현금을 확보해 ‘인공지능(AI) 컴퍼니’ 전환에 박차를 가한다는 계획이다.

SKC는 지난해 자회사 SK엔펄스의 파인세라믹 사업부를 한앤컴퍼니에 3600억원에 팔았다. SK하이닉스는 이천캠퍼스 수처리센터를 같은 그룹 계열사인 SK리츠에 매각해 세일앤리스백(매각 후 재임차) 방식으로 1조1000억원 이상의 유동성을 확보했다. 미래 투자 자금을 확보하고 자산 효율성과 재무건전성을 높이기 위한 ‘애셋 라이트’ 전략의 일환이다.
서울 중구 CJ그룹 사옥. 사진=한국경제신문
서울 중구 CJ그룹 사옥. 사진=한국경제신문
LG·CJ도 비핵심 사업 ‘매각 드라이브’

CJ제일제당, CJ ENM 등 주력 계열사의 실적 부진으로 성장이 둔화한 CJ그룹은 매각 드라이브에 속도를 내고 있다. CJ제일제당의 사료 제조·축산 자회사인 CJ피드앤케어 매각을 추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CJ피드앤케어는 지난해 865억원의 영업손실을 내고 적자전환해 CJ제일제당 사업부문 가운데 유일한 적자를 기록했다. CJ제일제당은 지난해 중국 자회사 지상쥐에 이어 브라질 자회사 CJ셀렉타의 보유 지분 매각도 추진 중이다. 선택과 집중 전략으로 비핵심 자산을 매각해 확보한 현금으로 기존 식품 사업을 강화하고 신사업 진출에 속도를 낼 것으로 보인다.

LG그룹에서는 LG화학이 비핵심 자산 매각에 나서며 수익성 개선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LG화학은 중국발 공급 과잉 여파로 석유화학 업황이 악화하며 1분기 영업이익이 67% 급감했다. 석유화학 부문은 2개 분기 연속 적자를 냈다.

차동석 LG화학 최고재무책임자(CFO) 사장은 1분기 실적 콘퍼런스콜에서 “최근 당사 영업 창출 능력이 과거에 비해 현저하게 낮아진 상황”이라며 “비핵심자산 매각을 지속 추진할 것”이라고 말했다.

앞서 LG화학은 지난해 IT 소재 사업부 내 편광판 및 편광판 소재 사업을 약 1조1000억원에 중국 기업에 매각했다. 지분 매각설이 꾸준히 나오는 나프타분해시설(NCC) 2공장에 대해선 합작법인(JV) 등 다양한 전략적 옵션을 검토 중이다.
서울 송파구 롯데월드타워. 사진=한국경제신문
서울 송파구 롯데월드타워. 사진=한국경제신문
손해라도 ‘앓던 이’ 빼자…국내외 부진사업 정리

현대차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2년 가까이 가동이 중단된 러시아 공장을 러시아 AGR자동차그룹에 1만 루블, 약 14만원에 매각했다. 다만 현대차는 매각 2년 내 공장을 되살 수 있는 바이백 조건을 내건 것으로 알려져 추후 공장을 재매입해 러시아 시장 재진출 가능성도 열어둔 것으로 보인다.

실적이 부진한 중국 사업 구조 개선을 위해 현지 공장도 다수 정리했다. 2021년 베이징 1공장에 이어 충칭 공장도 매각했으며 창저우 공장도 매각을 추진할 예정이다. 창저우 공장 매각이 완료되면 중국 내 5개 현지 공장 가운데 베이징 2·3공장만 남게 된다. 현대차는 중국과 러시아 시장을 대체할 시장으로 인도에 공을 들이고 있다.

신세계그룹은 신세계건설과 이마트 실적 악화 속에서 알리·테무·쉬인 등 중국 이커머스 업체들의 초저가 공세로 비상이 걸렸다. 여기에 SSG닷컴 풋옵션 리스크까지 겹쳤다. 지난해 창사 이래 첫 적자를 낸 이마트는 인력감축으로 비용을 줄이기 위해 처음으로 전사적 희망퇴직을 시행하는 등 고강도 경영 쇄신에 나서고 있다.

재무 효율화를 위해 간편결제서비스 SSG페이(쓱페이)·스마일페이를 토스 운영사인 비바리퍼블리카에 매각하려 했지만 1년여간 이어진 협상이 무산돼 원점으로 돌아왔다.

또한 SSG닷컴에 투자한 사모펀드(PEF) 어피너티에쿼티파트너스·BRV캐피탈과 1조원 규모의 풋옵션(특정 가격에 주식을 팔 권리) 행사 가능 여부를 놓고 법적공방으로 번질 우려도 제기되고 있다. 이커머스 산업 호황기에 받은 투자금이 독이 됐다는 평가다. 그동안 수조원의 차입금 조달로 진행한 이마트의 공격적 M&A가 재무구조 약화라는 부메랑으로 돌아와 발목이 잡혔다.

롯데그룹은 신동빈 회장이 올해 초 “부진한 사업은 매각하고 4개 신성장 영역으로 그룹의 사업 교체를 추진하겠다”고 밝힌 만큼 올해 그룹 밸류체인에서 중요도가 떨어지거나 시너지가 나지 않는 비핵심 사업을 대상으로 구조조정 작업을 벌일 것으로 예상된다.

롯데케미칼은 말레이시아 생산기지인 롯데케미칼타이탄(LC타이탄) 매각을 검토 중이나 중국의 자급력 확대, 석유화학 시황 악화에 지난해 영업손실까지 겹쳐 제값을 받기는 어려울 것으로 전망된다. 파키스탄 법인 롯데케미칼파키스탄리미티드(LCPL) 매각은 올해 초 현지 경쟁 당국의 반대로 무산됐으나 연내 재매각을 추진한다는 방침이다.

유통부문에서 수년간 이어온 중국 사업 정리도 마무리 수순에 들어갔다. 사드 보복 사태로 공사가 수년간 중단됐던 중국 랴오닝성 선양에 조성하던 초대형 복합단지 ‘롯데월드 선양’을 선양시 자회사에 매각하는 절차를 밟고 있다.

매각 금액은 공개하지 않았으나 4500억원 수준인 것으로 업계는 추산하고 있다. 롯데가 복합단지 조성을 위해 지금까지 투자한 금액은 총 1조2000억원이다. 중국 내 마지막 유통매장인 롯데백화점 청두점의 매각도 추진 중이다.

삼성, LG 등 주요 기업이 신사업 분야에서 ‘빅딜’을 예고한 가운데 올해 1분기 회사채 발행액은 총 38조8676억원으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이 중 SK그룹과 LG그룹 두 그룹에서만 올해 회사채 발행액이 각각 3조7920억원, 3조6700억원에 달했다. 회사채 발행으로 투자 실탄을 장전한 것이다. 올해 대형 M&A 가능성을 시사한 삼성전자도 지난해 말 기준 79조6900억원의 현금을 보유하고 있다.

재계 관계자는 “경기 부진으로 실적 부진과 재무부담이 커지면서 선택과 집중 전략으로 포트폴리오를 재점검하고 비주력 사업을 정리하는 추세가 당분간 이어질 것”이라며 “장기적인 투자 여력이 위축된 상황이지만 M&A 시장에 알짜 매물이 쏟아질 것에 대비해 현금 확보에 주력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안옥희 기자 ahnoh05@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