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쇠는 상장기업의 신뢰 회복” … 경영자·주주 모두 이기는 윈윈게임돼야 발돌린 투자자 ‘컴백’

증권거래소 시장에 비상이 걸렸다. 50년 역사의 거래소가 한참 아우뻘인 코스닥시장에 거래량과 거래대금 모두 추월당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이같은 추세가 반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투자 주체들은 손절매까지 감행하면서 거래소 주식을 팔고 코스닥을 향하고 있다. 세계적 경쟁력을 가진 초우량기업을 포함, 국내 대표기업들의 주식이 거래되는 거래소시장의 황폐함은 6·25전쟁 이후 최대 국난이었던 IMF시대를 연상케 할 정도다. 과연 거래소의 회생책은 없는가.중견기업에 근무하는 회사원 박모(38)씨. 그는 주식투자를 해온지 올해로 10년이 넘었다. 80년대말 상업은행 주식을 주당 1만8천원에 2백주 사두고 장기투자라 생각하고 놓아두었다. 그랬더니 IMF와중에 한일은행과 합병하면서 10분의 1로 감자돼 주식수가 20주로 줄었다. 감자당시 주가는 주당 8천9백원. 투자자산이 20분의 1로 줄었다. 진작 팔지 못한 자신을 원망하면서 다시 또 주식을 하면 성을 갈겠다고 다짐했다.그러다 지난해 가을부터 전셋값이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올봄에 전세를 늘리려고 모아둔 돈 4천만원으로는 어려워 보였다. 그래서 다시 증권에 눈을 돌렸다. 마침 증시는 7, 8월 대우사태 고비를 넘기고 잘 버티고 있었고 주식으로 돈 번 친구들 이야기가 들렸다. 박씨는 상업은행사태를 떠올리고 이번에는 블루칩만 사자며 지난해 11월 포항제철 주식 1백주를 주당 16만원, 현대중공업 주식 2백주를 주당 6만원, 삼성물산 주식 5백주를 주당 2만6천원에 각각 사놓았다. 고수익 정기예금에 든 것 같이 뿌듯했었다.그러나 현재 포철주가는 11만원대. 현대중공업과 삼성물산은 각각 3만원, 1만3천원대이다. 세계 최대의 조선업체라는 현대중공업 주식이나 국내 최고 무역업체인 삼성물산주식은 박씨의 원금을 절반 정도 까먹었고 포항제철 역시 3분의1 토막이 날아갔다. 4천만원의 원금이 2천만원을 겨우 넘고 있다.반면 매출액 수십억에 영업이익 적자라는 코스닥기업에 투자한 직장동료중에는 지난해 11월 1천만원을 투자, 벌써 3천만원으로 불린 사람도 있다. 거래소 우량주중 반토막은 기본이라는 소리에 명함도 못내밀고 있지만 박씨는 요즘 증권의 ‘증’자만 들어도 열이 올라간다.거래소가 황폐하다. 코스닥시장이 연일 거래대금 거래량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는데 거래소는 썰렁하다. 나스닥이 뉴욕증권거래소(NYSE)를 앞질렀기 때문만은 아니다. 지난해 상장기업의 영업실적이 사상 최대이고 불안하던 금리가 한자릿수라 해도 거래소에는 돈이 몰려오지 않는다.거래규모뿐만이 아니다. 종합주가지수가 후퇴일로를 걷자 일반투자자들은 손실을 무릅쓰고 손절매까지 하면서 코스닥을 향해 떠나고 있다. 지난해 사상 최대의 이익을 냈다는 상장기업 가운데 23.8%는 IMF시절보다도 주가가 싼 곳이 하나둘이 아니기 때문이다.심지어 “버블이다” “기업가치에 비해 지나친 고평가다”라고 코스닥등록기업을 폄하했던 증권사와 펀드매니저 기관투자가들도 더 늦기전에 갈아 타자며 거래소 종목을 팔아 코스닥투자를 늘리는 지경이다.“한국통신공사 부도났나요?” “거래소기업주식, 다시는 안 쳐다본다” 어이없이 떨어지는 주가에 각 증권정보사이트에는 투자자들의 한숨섞인 글이 넘쳐난다.상황이 이렇다보니 거래소에 상장하겠다는 기업이 없다. 올해 코스닥증권시장에 등록할 업체는 3백여 업체가 넘는다. 하지만 올들어 “거래소에 상장하겠다는 업체는 아직까지는 하나도 없다.”(정원구 증권거래소 상장심사부장)벤처기업들의 원조격이면서도 거래소에 있다는 이유로 역차별받는 기업도 있다. 메디슨과 다우기술이 대표적 사례다.코스닥등록기업인 메디다스 한글과컴퓨터 비트컴퓨터 등의 대주주인 이 회사는 투자 유가증권 총액(7천억원)이 메디슨 시가총액(4천5백억원)을 웃돈다. 이렇게 되자 이들 첨단 기술력을 가진 거래소의 벤처형 기업들이 코스닥으로 옮긴다는 추측도 난무한다.◆ 침체 원인이처럼 거래소가 황량해진데 대해 증시주변의 전문가나 비전문가 모두 ‘수급문제’를 최대의 원인으로 꼽는다. 지난해 상장대기업들은 잇따라 유무상증자에 나섰다. 반면 증시주변의 유동성이 크게 늘지 않았다. 주식의 공급이 수요에 비해 너무 크게 늘었다는 설명이다.그러나 대다수 일반투자자, 특히 ‘개미’로 불리는 개인투자자들이 보는 이유는 다르다. 이들이 거래소에 등을 돌리게 된 것은 ‘거래소 시장과 기업에 대한 신뢰를 잃었기 때문’이다.▶ 거래소 상장 대기업에 대한 불신최근 각 증권정보사이트의 게시판에 올라오는 글을 보면 거래소 상장 대기업에 대한 분노는 거의 폭발 수준이다. 특히 장기투자자들의 원성이 쏠리는 기업은 현대그룹계열사. 현대중공업을 비롯, 현대자동차 현대상사그룹계열사중에는 지난해 최고가대비 주가가 절반 혹은 4분의 1에 미치지 못하는 곳도 많다. 지난해 최고가 1만2천원이던 현대상사는 액면가 이하인 3천4백원이고 수천억원의 이익을 낸 현대중공업도 공모가(5만2천원)를 밑돈지 오래다.사상 최고의 이익을 내도 주주에게 손해를 안겨주는 이들 기업의 재무제표나 내재가치는 공허한 메아리이다. ‘주주무시경영’을 하는 기업의 주식을 사겠다는 사람이 줄어드니 주가가 더욱 떨어질 수밖에 없다.배당이 적은 것도 일반투자자의 등을 돌리게 만든다. 벤처기업이나 신설기업과 달리 투자완료단계인 대기업들이 막대한 이익을 내부유보하는 것은 기업가치를 높이는데 별 도움이 안된다. 그렇다면 주주에게 이익을 돌리는 것이 순리다. 그런데도 대규모 흑자를 낸 상장 기업들 대부분이 시가배당에 인색하다. 주가의 1%도 안되는 액면가대비 배당으로 생색을 낸다. 증권거래소 자료에 따르면 98년기준 국내기업의 배당성향(배당금액/배당가능이익)은 15.7% 수준이다. 미국(43.6%)이나 일본(36.8%)보다 크게 낮다. 지난해 상장사의 영업이익이 사상 최대인 점을 감안하면 올해 많은 기업이 배당금액을 늘려도 배당성향은 더 낮아질 가능성이 높다.▶ 기관과 외국인투자가에 대한 불만거래소 증권사와 투신사 등 기관과 외국인투자가에 대한 불신도 대단히 크다. 일반투자자들의 불만이 집중되는 대목은 크게 세가지다. 우선 개인투자자와 달리 기관투자가나 투신사들은 거래증거금이 없이도 매수주문을 낼 수 있다. 이를 악용한 허위 매수·매도 주문이 남발한다. 기관의 거래관행에 익숙지 않은 투자자들은 이 때문에 불리한 가격으로 매수 매도주문을 내게 마련이다. 둘째, ‘단타’로 불리는 데이트레이딩. 특히 일부 증권사들은 하루에도 몇번씩 사고 팔면서 대량거래를 일으킨다. 증권사들의 거래는 수수료가 없기 때문이다. 증시의 버팀목 역할을 해야 할 증권사나 투신사 등의 주체가 버팀목은 커녕 교란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시각이다.셋째로 선물과 옵션매매에 의한 장세의 왜곡이다. 현물거래의 위험을 헤지하는 수단인 선물거래와 프로그램매매가 장세왜곡의 주범이라는 인식이다. 일례로 지난 2월8일 폐장직전까지 전날 보다 20포인트 이상 상승하면서 순탄한 거래를 보이던 시장이 폐장시간직전에 30포인트 이상 급락했다. 옵션만기일로 프로그램매도분량이 동시호가 시간에만 1천5백억원어치 몰렸기 때문이다. 결과는 전날 대비 10포인트 하락으로 끝났다. 이날 일반은 순매수였는데 대부분 장중에 이뤄진 것이라 결국 많은 손해를 본 셈이다. 이러다보니 프로그램매매를 당할 재간이 없는 일반투자자들이 선물거래와 옵션거래가 없는 코스닥시장으로 발길을 돌린다.◆ 해결 방안이처럼 투자자들이 손실을 무릅쓰면서까지 거래소 주식을 팔고 코스닥시장으로 몰려가자 정부는 지난달 23일 증권거래소와 함께 거래소 활성화방안을 발표했다.그러나 거래소활성화방안의 약발은 하루를 넘기지 못했다. 발표 당일 모처럼 30포인트 이상 올랐던 종합주가지수가 그 다음날 13포인트 떨어졌다. 정부방안에 대한 시장의 실망을 보여준 셈이다. ‘증시에서는 정부에 대항해 싸우지말라’는 증시격언마저 무색해지고 있다. 이틀 후 또 정부가 거래소시장의 등락폭을 현행 15%에서 20%로 확대하고 코스닥은 11%에서 15%로 높인다는 대책을 내놨으나 여전히 거래소시장의 침체는 계속됐다.제도적인 문제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보다 본질적인 해결책은 거래소 상장대기업과 투자자 사이에 신뢰가 구축돼야 한다는 점이다.소액주주운동을 펼치고 있는 참여연대 경제민주화위원인 고태관 변호사는 “상장 대기업의 주가하락은 기본적으로 경영투명성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이익을 많이 내봐야 내부유보하고 계열사의 자금조달 방편으로 이용하는 관행이 개선되지 않는 한 아무리 자사주매입해도 주가는 떨어진다”는 것이다.조동성 서울대 교수는 “코스닥과 거래소에 대해 투자자의 시각차이가 존재한다”고 지적한다. 그 차이는 이렇다. 거래소에 상장된 대기업이나 코스닥에 등록된 벤처기업 경영자나 똑같은 이윤을 추구하지만 방법이 다르다.벤처기업 경영자들은 경영권의 혜택보다는 보유주식의 가치상승에서 오는 재산형성에 주목한다. 따라서 주가가 높아질수록 경영자와 주주 모두 이기는 윈윈게임이다. 반면 대기업 오너경영자들은 50%가 안되는 지분율로 경영권을 행사하고 있다. 주가가 너무 높으면 증자시 오너들이 지분율만큼 참여하기 어렵다.다시 말해 인위적으로 주가를 낮추는 주가관리를 해야 경영권이 안정적으로 유지된다는 결론이다. 일반투자자들은 거래소 상장기업의 경영자들이 자신을 제로섬게임의 적으로 보는 반면 코스닥등록기업의 경영자들은 자신을 윈윈게임의 동지로 대한다고 느낀다는 것이다.따라서 조교수는 “거래소 기업 경영자들이 경영권에 연연하지 말고 주가상승을 통해 기업의 시가총액을 높이고 개인자산의 증대를 추구해야 한다”고 지적한다.이같은 분석은 거래소 상장 대기업과 코스닥 대표벤처기업의 홈페이지를 찾아가보면 즉각 확인된다. 거래소 상장 대기업 가운데 홈페이지에 소액주주들이 자유롭게 의견을 올릴 수 있는 게시판을 둔 곳은 손에 꼽을 정도다. 반면 새롬기술이나 다음 등 코스닥기업들은 창업 당시부터 주주게시판 등을 홈페이지의 주요사이트로 관리해왔다. 주주소리에 귀를 기울이다보니 무상증자 유상증자 자사주취득 등 주가관리도 거래소 대기업에 한 수 앞선다. 또 사소한 사업내용도 친절하게 주주들에게 알려주는 투명경영 마인드도 거래소기업들을 앞선다.결국 거래소를 되살리는 열쇠는 그 누구보다도 상장기업에 달려 있다는 결론이다. 상장기업이 투명경영을 하고 기업가치를 높이고 주주에게 손해를 주지않는다는 믿음이 있으면 거래소주식을 팔면서까지 코스닥으로 떠났던 투자자들은 돌아오게 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