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말 올리버 스톤이 감독한 영화 <월스트리트 designtimesp=19992>를 기억하는가. 주인공인 월스트리트의 순진한 증권맨 찰리쉰의 우상은 유명 펀드매니저나 애널리스트가 아니다. 그가 우러러보는 월가의 영웅은 마이클 더글러스가 연기한 ‘기업사냥꾼(Corporate raider)’이다.고든 게코라는 이름의 이 기업사냥꾼은 소액주주들의 지지속에 무능한 경영진과 이사들을 쫓아내며 회사를 ‘접수’한다. 접수한 회사는 가치를 올려 되팔거나 이익이 되는 사업부문을 쪼개 팔아버린다. 나중에는 내부자 정보를 이용, 적대적 M&A를 시도하다가 법의 심판을 받는다.스토리는 지극히 할리우드적이지만 영화의 분위기는 비교적 사실적이었다. 80년대와 90년대에 월가를 주름잡던 스타는 펀드매니저가 아니라 ‘기업사냥꾼’이었다.칼 아이칸(Carl Icahn)이나 ‘정크본드의 왕’으로 불린 마이클 밀큰(Michael Milken) 같은 이들은 소자본으로 레버리지를 일으키면서 적대적M&A를 주도했다.타깃은 주로 경영자의 무능으로 주가가 헐값이 된 기업들이었다. 성공할 경우 이들은 경영자와 이사를 쫓아내고 이익을 내는 사업을 분리매각하고 부동산 등의 자산은 처분했다. 이들이 노리는 기업은 주가가 급등하는 등 ‘레이더’로 불리면서도 이들은 시장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적대적 M&A 물결 밀려온다지금 한국의 자본시장에도 변화의 물결이 밀려오고 있다. 적대적 M&A를 활성화하고 ‘경영권시장’을 만들려는 분위기가 정부정책과 시장에서 감지되고 있다.적대적 M&A란 ‘회사의 대주주나 경영진의 의사에 반하는 지배권의 취득행위’이다. 대개 공개매수(TOB: Take Over Bid, Tender offer)나 목표기업주식을 사들이는 시장매집(Market Sweep), 위임장대결(Proxy Fight) 등 세가지 형태로 진행된다.기업이나 경영권에 대해 사고 판다는 인식이 없는 국내에서 적대적 M&A의 역사는 짧다. 그러나 95년 증권거래법 2백조(주식대량소유제한제도)폐지 및 공개매수제도 도입으로 M&A 환경에 변화가 일어났다. 이후 20여건에 달하는 사례가 발생했다. 96년말 벌어진 한화종금에 대한 2대주주(우풍상호신용금고)의 적대적 M&A 시도는 대표적 사례이다.이것은 한화종금이 경영권 방어를 위해 백기사를 끌어들이고 사모전환사채(CB)를 발행하는 등 각종 방어전략과 수차례의 법정소송으로 이어졌다.이밖에 한솔그룹의 구동해투금인수(시장매집,성공), 신원그룹의 제일물산 인수(2대주주협력 및 시장매집,성공), 효성그룹의 한국카프로락탐 인수시도(시장매집, 실패), 큐닉스컴퓨터의 범한정기 매수시도(공개매수,실패), 신동방의 미도파인수시도(시장매집, 타협)에 이어 올들어 골드뱅크사례 및 KTB네트워크에 대한 동원증권의 시장매집 사례 등이 있다.최근 적대적 M&A가 관심의 초점이 된 것은 이달부터 특정기업주식을 50%까지 편입할 수 있는 사모주식형펀드의 등장이 계기가 됐다. 기존 펀드는 특정종목주식을 10%까지만 편입할 수 있었다. 2백조원으로 추산되는 시중의 유동성도 M&A활성화를 부추길 가능성이 높다.미국에서도 적대적 M&A가 성행했던 80년대는 시장에 유동성이 넘치면서 영업이익에 만족하지 못한 자본들이 경영권시장으로 몰려들었다.적대적 M&A는 이론적으로는 소수의 지분으로도 기업을 장악해온 재벌의 지배구조를 개선하는 효율적 시장수단이 될 수도 있다. 다시 말해 현재 지지부진한 상태인 구조조정을 극적으로 앞당기고 시장논리로 재벌을 해체시킬 수도 있다는 뜻이다.최근 많은 상장사들이 주식형 사모펀드에 관심을 갖고 수면 아래에서 M&A전문가를 찾아 다니는 것은 이같은 우려를 반영한 것이다. 덕분에 M&A브띠끄로 불려온 M&A컨설팅업체들과 대형 로펌, 회계법인 등은 호황을 맞고 있다. 현대증권 대우증권 삼성증권 굿모닝증권 등 증권회사들도 M&A 수요를 겨냥해 전담팀을 만들고 있다. 그러나 가장 큰 수혜는 M&A브띠끄와 로펌이 누릴 것으로 보인다.◆ 사모주식형펀드 등장 계기 관심고조“M&A 절차를 투자은행들이 관장하는 미국과 달리 한국에서는 증권사보다는 로펌이 오히려 주도적인 역할을 하기때문”이라고 M&A컨설팅업체 아이파이낸스글로벌(IFG) 원준희 사장은 설명한다.그러나 적대적 M&A가 활성화될 수 있을지에 대한 전문가들의 전망은 다소 부정적이다. 가장 큰 것이 기업재무면에서 여전히 투명성이 부족, 신뢰할 수 없다는 점이다.김·장 법률사무소의 박병무변호사는 “우호적 M&A조차 영업양수도만 하겠다고 한다”면서 “숨겨진 부채 등에 대한 우려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뿐만 아니라 대다수 기업에서 대주주 지분이 차명으로 분산돼 있거나 대주주관련 기업과의 부적절한 거래가 많은 것도 적대적 M&A에 나서는 것을 어렵게 만드는 요소이다.기업과 경영권에 대한 사회적 정서 역시 장애물이다. IFG 원사장은 “경제논리 이외에 국민정서 등의 리스크가 많아 적대적 M&A가 성공하기는 쉽지 않다”고 말한다.제도적으로도 총발행주식수의 5% 이상을 취득하면 증권감독원에 보고해야 하는 ‘5%보고제도’를 통해 무분별한 적대적 M&A는 규제하고 있다.그럼에도 “적대적 M&A 자체에 대한 가치 판단은 무의미하며 내용과 결과에 따라 바람직한 적대적 M&A와 바람직하지 못한 적대적 M&A를 구분해야 한다”고 한국M&A 권재륜 대표는 주장한다.대주주의 경영능력 부족이나 경영소홀로 부실화될 가능성이 있는 기업이 적대적 M&A를 통해 보다 경영능력이 뛰어난 매수자에게 경영권이 넘어간다면 당연히 바람직하다는 설명이다.삼성경제연구소 강원 수석연구원도 “누가 어느 기업을 인수하느냐 보다는 경제적 효율성과 거래가격의 적정성, 소액주주의 보호에 초점을 둬야 한다”고 강조한다. 특히 신경제 벤처기업의 경우 핵심 역량이 경영진에 있는 경우가 많아 인수후에도 기존의 경영자를 경영에 참여시키는 등 소유와 경영권에 대한 전략적 사고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그럼에도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적대적 M&A 허용이 증시에 커다란 활력을 줄 것이라는데에 공감을 표시한다.★ 인터뷰 / 박병무 김·장법률사무소 변호사투명성 부족, 활성화 어려워대표적 M&A전문 변호사인 박병무 변호사는 적대적 M&A가 당장 활발해지기는 어려울 것으로 내다봤다.▶ 한국에서 적대적 M&A가 활성화될 것으로 보는가.80년대 미국처럼 활발하지는 못할 것이다. M&A를 시도하려는 측에서 볼 때 국내 기업의 투명성이 부족하다는 점이 가장 큰 리스크이다. 재벌 계열사들은 숨겨진 부채가 많고 일반 기업들도 재무상황에 대해 신뢰하기가 힘들다. 지분측면에서 볼 때는 차명주식 등으로 지분이 분산돼 있는 경우가 많다.▶ 시장에서는 외국인에 의한 국내 저평가기업의 M&A 가능성도 많이 제기되는데.투명성의 이유에서 회의적으로 본다. 국내 기업들 사이의 우호적 M&A조차 부실부채는 빼고 영업양수도만 하는 경우가 많다. 외국인이 지분을 매집한다면 경영권보다는 자본이득을 노린 그린메일의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미국 등 선진국에서 적대적 M&A관련 소송의 최근 흐름은.절대로 비밀매집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기본룰이다. 경영권에 필요한 지분매집에는 시장가격 이상의 프리미엄을 지불해야 하는데 안한다면 불공정하다는 논리다. 최근에는 적대적 M&A가 회사의 장기적 이익에 반한다고 판단되면 공격 정도에 비례한 방어 행위는 허용하는 추세이다.▶ 최근 적대적 M&A와 관련해서 방어전략 등을 문의하는 기업이 많지 않은가.시중에 돈이 많이 돌다보니까 물밑에서 움직임은 많은 것 같다. 그러나 대개 로펌을 찾을 때는 이미 상대편의 적대적M&A가 진행될 때가 돼서야 뒤늦게 오는 경우가 많다.★ 인터뷰 / 이상훈 맥킨지 파트너시너지 효과낼 기업인수 늘듯IMF 이후 국내 대기업간 빅딜과 구조조정 과정을 컨설팅한 맥킨지의 이상훈 파트너 역시 기업투명성결여 등의 이유로 적대적 M&A가 활성화되기는 어려울 것으로 내다봤다.▶ 국내에서 M&A 활성화가 어려울 것으로 보는 이유는.기업수익증대 가능성(upside potential)의 측면에서 볼 때 아직도 국내 기업은 싸지 않다고 본다. 재무적으로도 투명하지 않아 부실 부분이 얼마나 될지 알기 힘들다. 국내기업들은 또 차명지분과 보이지 않는 네트워크가 있어 적대적 M&A가 성공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기업을 공격, 인수 후 이익되는 사업을 파는 ‘기업사냥꾼’이 국내에도 등장할 것인가.한국은 미국의 사례를 보았기 때문에 미국식 방법은 안통할 가능성이 높다. 최근 전세계적으로 적대적 M&A의 컨셉도 변화해서 인수 후 기업을 쪼개 파는 LBO방식은 드물다. 대신 자신의 업체와 시너지 효과를 내거나 인수해서 기업가치를 높일 수 있는 기업에 대해 시도되는 경우가 많다.▶ 인수후 기업가치를 높이는 성공적인 적대적 M&A는 어떤 것인가.우호적 M&A와 마찬가지로 모기업에서 보조금을 받아야 하는 문제기업끼리 인수합병하는 경우는 실패 가능성이 높다. 시장에서 가장 우호적으로 평가받는 사례는 가장 강력한 기업이 약한 기업을 인수할 때이다. 약한 기업의 잠재력있는 수익성을 현실화해내는 네트워크와 인적 물적 자원이 있기 때문이다. 강한 기업이 강한 기업을 인수하는 것 역시 양 조직의 갈등 가능성 등으로 성공하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