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스토랑·패스트푸드업계 등 ‘맛 창조’ 분주 … 식품업계로 번져

‘퓨전’이란 용어가 국내에 알려진 것은 ‘퓨전재즈’를 통해서였다. 그러나 음악애호가가 아닌 일반인에게 퓨전은 여전히 낯선 용어였다. 이렇게 낯설기만 했던 퓨전이 일대 혁명처럼 국내 소비자들에게 널리 쓰이기 시작한 것은 사실상 요리때문이었다.◆국내 퓨전 바람 ‘로데오거리에서 먼저’퓨전요리와 퓨전레스토랑. 이들이 바로 국내에 퓨전바람을 일으킨 주역이었다고나 할까. 강남의 로데오 거리에서 일부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퓨전레스토랑은 현재 열병처럼 전국으로 확산되고 있다. 새로 문을 여는 레스토랑은 웬만하면 ‘퓨전레스토랑’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음식재료나 요리법이 약간만 섞여도 ‘퓨전요리’임을 내세운다. 호텔이나 패스트푸드점, 심지어 일반 식품업체도 예외가 아니다.우선 퓨전요리의 유래부터 살펴보자. 퓨전요리는 원래 미국내에서도 가장 다양한 인종들이 살고 있는 캘리포니아주에서 80년대부터 개발되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시아계, 멕시코계 등 여러 민족들이 어울려 살면서 서로의 요리를 맛보고, 그 요리법을 교환, 혼합해 새로운 맛을 창조해 내면서 일종의 다국적 요리인 퓨전요리가 탄생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80년대 들어 건강식에 관한 미국인의 관심이 높아지면서 상대적으로 기름기가 적은 동양요리의 재료와 소스를 미국인들이 적극적으로 활용한 것도 퓨전요리 개발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또한 90년대의 세계화 바람도 퓨전요리를 유행시킨 하나의 트렌드였다. 따라서 미국, 유럽 등지에서 본격적인 퓨전요리 열풍은 90년대 중반부터 불기 시작했다.국내에 퓨전레스토랑 바람이 분 것은 1998년 청담동 로데오거리에 ‘시안(Xian)’이 생기면서부터였다. 동서양을 연결하는 중국 도시의 이름을 딴 시안의 기본 컨셉은 프랑스 요리와 아시아 요리가 결합한 프렌치-아시안 식당이었다. 그렇지만 이 식당이 처음부터 ‘퓨전’을 표방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프랑스식과 아시아식이 섞인 색다른 요리를 먹어본 사람들이 이를 알리는 과정에서 일반인이 이해하기 쉽도록 ‘퓨전’이란 용어를 썼고, 이 때문에 퓨전레스토랑으로 자리매김했다는 것이다. 이후 청담동 일대에는 퓨전요리를 표방한 식당들이 우후죽순격으로 생겼다. 그러나 그중 상당수는 퓨전의 개념을 잘못 이해하고 ‘무늬만 퓨전’인 요리를 제공, 소비자들에게 외면을 받으면서 ‘퓨전요리=정크요리’라는 잘못된 인식을 심어주기도 했다.그런 가운데서도 현재 비교적 품위있는 퓨전레스토랑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곳으로는 서울 종로의 ‘탑클라우드’와 청담동 신로데오 거리의 ‘파진’을 들 수 있다. 99년12월 종로타워 33층에 문을 연 탑클라우드는 가운데가 뻥 뚫린 독특한 외관으로도 주목받는 곳. 신라호텔이 운영하는 이 식당은 1백30여가지의 퓨전요리를 제공한다. 초고추장으로 양념한 참치스시, 된장과 간장, 귤 등을 섞어 소스를 만든 송아지요리 등이 대표적인 퓨전요리.탑클라우드 서상호 주방장은 “퓨전요리라고 하면 동서양의 재료 및 양념류를 무조건 섞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이는 잘못”이라고 지적한다. 모든 부재료나 양념류는 주재료의 맛을 살리는 선에서 혼합돼야 한다는 것이다. 또 환경과 입맛에 맞춘 맛의 변형이란 의미에서 사실상 자장면을 비롯해 국내에 소개되는 모든 중국 및 서양요리는 퓨전요리의 일종이라는게 서주방장의 견해다.‘파진’은 중국요리를 기본으로 한 퓨전요리 전문점. 미국 롱아일랜드 대학에서 경영학석사(MBA)학위를 받은 도세훈사장(36)이 ‘범민족적 레스토랑’을 표방하며 지난해 12월 오픈했다. 현재 제공되는 퓨전메뉴는 디저트포함 45가지. 귤껍질을 이용한 진피향의 가자미튀김, 달짝지근한 중국식 소스에 매운 태국고추를 활용한 ‘매콤달콤 왕새우요리’, 프랑스식 구이법에 중국소스를 쓴 ‘연꽃으로 싼 돌대구 소금구이’ 등이 이 집에서 인기있는 퓨전요리다.좀더 대중적인 퓨전레스토랑으로 꼽히는 곳이 신촌의 아수라. 신촌 현대백화점 별관 5층에 자리잡은 아수라는 고대 페르시아를 연상시키는 독특한 인테리어와 밥을 기본으로 한 퓨전요리가 특징. 현재 인도네시아, 스페인 요리 등을 기본으로 한 7가지의 퓨전볶음밥을 내놓고 있는데, 이국적인 향에 한국적인 맛으로 전체 매출의 40%를 차지할 정도로 인기가 높다.◆롯데리아, 퓨전요리 불고기버거 인기패스트푸드업계의 퓨전요리 선두주자는 롯데리아. 외국계 패스트푸드점에 맞서 한국인 입맛에 맞도록 92년 개발한 ‘불고기버거’가 인기를 끌면서 사실상 패스트푸드업계의 대표적인 퓨전요리로 자리잡았다. ‘퓨전요리’란 용어가 아직 채 상륙하기도 전에 개발된 이 불고기버거는 현재 롯데리아 전체 매출의 25%를 차지할 정도로 인기품목. 맥도날드 등 외국계 패스트푸드점도 현재 불고기버거를 내놓고 있다. 롯데리아는 이밖에 불갈비버거, 라이스버거와 같은 퓨전패스트푸드도 선보이고 있다.이밖에 식품업계의 퓨전요리로는 미스터피자의 ‘라이스피자’, 오뚜기의 ‘카레라면’, 풀무원의 ‘피자군만두’와 ‘떡볶이 피자’, 한미약품의 ‘굿모닝’(쌀음료와 커피가 혼합된 음료) 등을 들 수 있다. 이렇듯 ‘퓨전’을 표방한 요리와 레스토랑이 앞으로도 상당기간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지만, 무엇이 진짜 퓨전요리인지는 퓨전요리에 대한 소비자의 올바른 이해와 까다로운 입맛에 달려 있지 않을까.★ 인터뷰 / 이상민 시안 사장“동서양 장점만 뽑은 맛이 진짜 퓨전”국내에 퓨전요리 및 퓨전레스토랑 바람을 일으킨 장본인인 ‘시안’의 이상민 사장. 올해로 만 29세의 젊은이인 이사장은 업계에서 퓨전요리의 전도사 쯤으로 인식되고 있지만, 정작 본인은 ‘퓨전’이란 용어 사용을 극도로 꺼린다.“얼마전 한 신문에서 퓨전요리를 피자와 빈대떡을 합쳐놓은 것처럼 서양요리와 한국요리를 융합해놓은 메뉴라고 설명을 했더군요. 현재 퓨전을 표방한 음식점들이 우후죽순처럼 늘어나고 있는 것도 바로 이런 잘못됐거나 편협한 인식때문이라고 봅니다. 심지어 어떤 식당은 이탈리안-차이니즈 퓨전을 표방하면서 1층에는 이태리음식, 2층에는 중국음식을 내놓고 있는 실정이니 얼마나 많은 음식점들이 무늬만 퓨전인지 알만하죠.”이사장이 정의하는 진짜 퓨전요리는 동서양의 조리기법, 식자재, 디스플레이 등 요리의 모든 면에서 각각의 장점만을 뽑아 조화시켜 환상적인 맛을 창조해내는 요리의 장르. 이로써 다른 문화권의 사람들에게 맛의 공감대를 형성, 다양한 고객층을 끌어들일 수 있고 이 때문에 퓨전은 일시적인 트렌드라기 보다는 식문화의 핵심이라는게 이사장의 설명이다.“퓨전요리의 최대의 매력은 주방장의 상상력과 능력, 취향에 따라 무궁무진한 요리개발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퓨전요리는 한계와 틀이 없는 ‘요리의 자유지대’라는 것이죠.그렇지만 분명히 원칙은 있습니다. 동·서양 요리기법 및 음식재료의 맛과 성질, 민족에 따른 입맛의 특징까지 완전히 알아야만 새로운 맛을 창조해낼 수 있습니다.”이같은 이사장의 퓨전철학이 현재 미국, 일본의 주요 맛평가 전문가들까지 시안에 대해 격찬을 아끼지 않도록 했고, 한국을 찾는 일부 외국인들의 단골 방문코스로 만들었다. 덕분에 시안은 오는 9월 광화문과 강남터미널에 2, 3호점을 낼 계획. 여기에는 이사장이 미국 코넬대 호텔경영학과 출신으로 웨스틴조선, 신라호텔, 아나호텔(일본) 등 국내외 주요 호텔들에서 근무(인턴포함)한 전력(?)도 보탬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