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량 65% 배정 투신권 영향력 커져, 담합 우려 … 가치 비해 낮게 책정, 발행사는 불만

‘시장수요의 반영인가, 투신 살리기인가’.지난 7월1일부터 새롭게 시행된 공모가 산정방식을 놓고 증권가에서 의견이 분분하다. 공모가에 거품을 제거하는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측면도 있지만 그렇다고 적정하게 공모가를 선정할 수 있는 방식도 아니라는 의견이 팽팽하다.이런 주장의 배경에는 공모물량의 절대량(공모주의 65%)을 가져가 영향력이 커진 투신권이 공모가를 기업가치에 비해 낮게 책정한다는 불만이 자리잡고 있다. 여기서 주간사는 투신권과 발행사의 중간에서 재량권을 상실한 채 우왕좌왕하고 있다는 얘기도 들려온다. 새로운 공모가의 산정방식을 두고 어떤 논란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지난 8월10일과 11일 이틀 동안 공모주 청약을 실시한 에쎈테크(금속가공업체)는 새롭게 시행된 공모가 산정방식으로 주주들을 모집한 첫 기업이었다. 코스닥 등록일이 7월1일 이후였기 때문에 새로운 제도를 따라 공모가를 산정했다. 이보다 이틀 앞서 주식을 공모했던 한양이엔지(반도체 배관설비업체)는 6월30일 등록해 예전 방식대로 공모가를 책정했다. 주간사측은 “새로운 공모가 산정 방식으로 혹시 불이익을 당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시행일 하루 전에 등록할 수 있도록 서둘렀다”고 말했다.이런 분위기를 반영하듯 에쎈테크는 이번 공모가 산정과 관련, 할 말이 많다. 회사측 관계자는 “코스닥 기업중 우리와 비슷한 자본금과 매출액, 당기순이익을 내는 기업들의 평균 공모가가 8천원인데, 새로운 제도 때문에 4천9백50원으로 낮게 책정됐다”며 못내 아쉬움을 나타냈다. 이 관계자는 “물론 지금까지 코스닥 기업의 공모가에 버블이 있었다는 점은 인정하지만 실적이 좋고 탄탄한 기업은 제대로 평가해줘야 하지 않느냐”고 말했다. 내재가치나 본질가치의 수십배에 달하는 공모가로 코스닥에서 거래되는 기업도 부지기수인데 자사의 본질가치(4천1백71원)보다 불과 8백원 높게 책정된 것이 제대로 된 평가는 아니라는 주장이다.에쎈테크의 공모가는 공모희망가액을 일정한 밴드로 제시하는 새로운 방식으로 결정됐다. 제시된 밴드가격대는 4천5백원에서 6천5백원. 이 밴드대에서 가격산정에 참여하는 기관투자가나 투신이 가격을 써내면 신청한 물량만큼 가중치를 둬서 평균가격이 매겨진다. 10만주를 신청한 A기관이 1만주를 신청한 B기관보다 가격산정에 영향력을 더 행사한다는 얘기다. 이렇게 책정된 가격을 가중평균가라고 하고 주간사와 발행사(코스닥 등록기업)는 이 가격의 ±10%내에서 최종 공모가격을 산정할 수 있다. 에쎈테크의 공모가는 이 과정을 거쳐 4천9백50원(액면가 1천원, 가중평균가 4천5백13원)에 책정됐다.◆ 낮은 가격 제시해도 공모주 물량 배정만약 예전 같으면 이 평균가를 단순히 참고자료로 이용, 주간사와 발행사가 협의하면 더 높은 가격을 하한선으로 제시하고 최종 공모가격 산정을 하면 그만이었다. 만약 가격산정에 참여한 기관과 투신권이 이보다 낮은 가격을 제시하면 공모주 물량을 받을 수 없었다. 이것이 공모가에 거품을 유발시킨 원인이라고 지적돼 방식이 바뀐 것이다.바뀐 제도에 따라 앞으론 최종공모가보다 적게 적어낸 투자기관도 물량을 받을 수 있다. 이때문에 에쎈테크 공모가 산정시 4천9백50원보다 7백원 낮게 써낸 기관까지 모두 공모 물량을 받아갔다.사정이 이렇다 보니 당연히 더 싼 값에 주식을 인수하려는 투자기관은 가격을 낮출 것이고 그러다 보면 공모가는 자연히 낮아지게 된다는 것이 주간사와 발행사의 주장. 특히 공모물량의 65%를 배정 받을 수 있는 투신권이 가장 많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고, 상황에 따라서는 가격담합도 가능하다는 주장이 증권업계 일각에서 조심스럽게 제기되고 있다.증권업계 관계자는 “투신사가 담합해 가격을 내리는 경우도 배제할 수 없다”며 “이 제도로는 투신사의 이익을 보전하기 위해 발행사의 이익을 희생시키는 셈”이라고 말했다. 증권업협회 관계자도 투신권의 가격 담합 가능성에 대해 “불공정거래행위에 해당되기 때문에 드러내놓고 하지는 않겠지만 개연성은 있다”고 말했다.그렇다면 왜 투신권에 공모물량을 65%나 배정해 과도하다는 비판을 받고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해선 정부가 투신권의 손실을 보전해주기 위한 방편이라는 시각이 많다. 코스닥 등록을 준비하는 정보통신업체 관계자는 “과거 정부가 증시부양을 위해 투신사의 손을 빌렸다가 투신사가 막대한 손해를 보자 이를 보전해주기 위해 과도한 물량배정을 했다”고 주장했다.실제로 투신권이 고객의 자금이탈을 막기 위해 설정한 하이일드나 뉴하이일드 펀드 등은 공모주를 20% 가량 편입할 수 있는 것들이다. 개인들은 수백대1의 경쟁력을 뚫고 공모주를 매입할 수 있지만 CBO나 하이일드 펀드의 경우 일정 배정 물량이 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손쉽게 매입해왔다. 여기에 투입되는 투신권의 자금은 대략 25조원이고, 일정한 수익률을 내야 하기 때문에 반드시 공모주 물량을 받아야 한다. 이젠 낮은 가격을 써내도 물량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투신권 담합의 가능성이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발행사 성장성·내재가치 분석능력 떨어져또 하나 공모주 가격산정에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는 것은 수요예측에 참가하고 있는 펀드나 기관투자가의 경우 발행사 주식의 적정가격을 분석할 수 있는 능력이 떨어진다는 점이다. 미국 등 선진국에서는 공모가를 제시하는 업체나 기관이 철저하게 발행사의 성장성과 내재가치를 분석해 가격을 내놓고 있다. 그러나 국내의 경우 분석능력을 갖추지 못한 채 무작정 공모주에 투자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던 것. 공모주 물량을 받아야 하는 펀드의 경우 기업분석도 하지 않고 가격예측에 참가하게 돼 공모가 거품의 한몫을 담당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는 것이다. 증권업협회 관계자는 “분석능력을 갖춘 인력을 보유하지 못한 기관들이 제대로된 공모가를 산정한다는 것은 어렵다. 국내 현실이 이렇다 보니 제도가 바뀐 것”이라고 말했다.증권업계 관계자는 “신청한 물량에 따라 가중치를 두는 방식은 문제가 있다. 이렇게 되면 투신권의 영향력만 커진다. 차라리 가중치를 두지 않고 가격대만 제시해 평균치를 정한다면 영향력을 좀더 줄일 수 있을 것으로 본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