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형서점·출판계 - 결국 소비자 피해, 인터넷서점 - 소비자 권익 침해 주장 엇갈려 … 외국은 대부분 정가제

도서정가제 입법화를 둘러싸고 출판계·대형서점과 인터넷서점간의 마찰이 확산되고 있다. 인터넷서점들이 정가제 입법예고에 반발, 인터넷서점연합회를 구성하고 도서정가제 입법화를 반대하고 나선 가운데 출판·서점업계는 도서정가제 고수를 위한 집단행동에 돌입했다. 출판계에서는 도서정가제가 파괴되면 98년 IMF사태에 따른 서적도매상 붕괴와 맞먹는 유통대란이 일어날 것이란 우려가 팽배하다. 반면 할인 판매를 주도하는 인터넷서점들은 “도서정가제는 공정한 시장경쟁을 막는 독소조항이며 소비자의 권익을 침해하는 일”이라며 정가제 백지화를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다.◆ 논란의 전모지난 9월29일 문화관광부가 ‘출판 및 인쇄진흥법안’을 입법 예고하면서 이번 사태가 불거졌다. 법안에서 문화관광부는 책을 ‘정가’보다 싸게 판매하는 경우 5백만원 이하의 과태료를 물릴 수 있다는 조항을 신설했다. 문화관광부는 여론을 수렴한 뒤 이 법안을 국회에 제출키로 했었다.이런 사실이 알려지자 책을 할인판매해온 인터넷서점업계는 새로운 유통경로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인터넷서점을 고사시키려는 의도로 보고 법안 제정을 반대하고 나섰다. 문화관광부 홈페이지(www.mct.go.kr)게시판에는 법안 제정을 비난하는 글들이 쏟아지고 있다.공정거래위원회도 최근 도서정가제를 법제화하려는 문화관광부의 움직임에 제동을 걸었다. 공정위는 책값 할인판매를 금지하는 것은 공정거래법에 어긋난다며 관련 법안에서 이 내용을 삭제해줄 것을 문화관광부에 요구했다.공정위 관계자는 “현재는 자율적으로 모든 도서에, 2003년부터는 공정위가 지정하는 도서에 한해서만 정가제를 적용하기로 관계부처와 합의했다”며 “문화관광부가 도서정가제를 법적인 의무조항으로 끼워넣은 것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재정경제부 기획예산처 정보통신부 등도 공정위와 같은 입장이다.그러나 출판인들은 도서정가제를 고수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2백52개 단행본 출판사들의 모임인 한국출판인회의는 지난 12일 서울 강남출판문화센터에서 임시총회를 열고 할인판매를 하는 인터넷서점과 할인매장 등에는 제품을 공급하지 않기로 결의했다. 서적 도매업체에도 이들 할인판매 업체에 책을 납품하지 말도록 촉구하고 이행하지 않는 도매업체에 대해서는 책 공급을 중단키로 했다.이에 앞서 11일 대한출판문화협회는 긴급 이사회를 열고 도서정가제 사수를 위한 대책기구를 만들어 적극 대응하기로 했다. 서점업계도 할인업체에 책을 공급하는 출판사들의 책을 매장에서 판매하지 않는 방안을 모색중이다.이처럼 파문이 확산되자 문화관광부는 당초 방침에서 물러나 유보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다. 한 관계자는 “도서정가제를 도입한 것은 출판물의 경우 문화상품으로서, 일반 소비재와 달리 공공성을 봐야 하기 때문”이라며 “출판시장이 급격하게 변하는 상황에서 대형서점과 소형서점 인터넷서점 출판사들의 이해가 엇갈리고 있어 법안에 예외규정을 두는 것을 검토중”이라고 밝혔다.1977년부터 정착되기 시작한 도서정가제가 최근 다시 도마 위에 오른 것은 인터넷서점들이 등장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책값을 평균 20~30% 가량 싸게 파는 인터넷서점의 매출이 급증하면서 할인을 하지 않는 대형서점들의 위기감이 높아졌다. 결국 교보문고는 메이저급 단행본 출판사 대표들에게 “자구책으로 온라인서점에서라도 할인판매를 심각하게 고려 중”이라는 폭탄선언을 했다. 정가제 수호의 마지막 보루로 여겨졌던 교보문고의 이같은 방침에 놀란 출판계가 결국 도서정가제 사수를 위해 발벗고 나선 것이다.◆ 정가제 폐지는 소비자에게 이익인가가장 핵심적인 쟁점이다. 인터넷서점들은 정가제를 법으로 강제하는 것은 자유경쟁 원리를 거스르고 소비자가 책을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는 통로를 봉쇄하기 때문에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예스24의 이강인 사장은 “할인여부는 법이 판단할 사안이 아니라 시장이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 강조한다.반면 출판인들은 정가제 폐지가 장기적으로 △중소서점 폐업 △도서가격 앙등 △출판종(種)수 감소 △서울과 지방의 문화 불균형 심화 등의 부작용을 낳고 그 폐해는 소비자에게 돌아갈 것이라고 주장한다. 한국출판인회의 김언호 회장은 “할인판매가 일반화되면 책도 거품가격을 매길 수밖에 없으며 결국 독자들은 손해를 보게 된다”고 말했다.◆ 할인판매와 유통구조소비자들 가운데 상당수는 출판사들이 자신의 이익이 깎여나가기 때문에 할인판매를 반대하는 것으로 알지만 할인판매는 출판사들의 이윤율과는 무관하다. 출판사들은 대형서점과 인터넷서점에 같은 가격(통상 정가의 60%)으로 책을 공급한다. 단지 대형서점은 어음으로 결제하는 반면 인터넷서점들은 현금을 주고 구입하기 때문에 실제는 조금 싼 가격에 책을 공급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이를 감안한다 해도 인터넷서점들이 정가의 20~30%씩 할인판매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인터넷서점들은 할인 근거가 유통비용 절감에 있다고 주장한다. 예컨대 대형서점의 경우 매장을 유지·관리하는데 많은 인력과 비용이 들지만 인터넷서점은 컴퓨터와 관리자만 있으면 되므로 유통비용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다는 것이다.하지만 출판계는 인터넷서점도 데이터베이스 확충과 관리에 인력이 만만치 않게 들며 따로 대형 물류창고를 확보하고 인력을 둬야 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유통비용이 크게 절감된다고 보기는 힘들다고 지적한다. 카드수수료 인건비 시스템운영비 물류비 등을 제외하면 오히려 적자일 것이라는 게 출판계의 시각이다.출판계는 또 인터넷서점들이 손해를 보면서까지 책을 파는 이유가 자사 사이트 가치를 올려 궁극적으로 추가 차익을 보기 위한 일시적 수단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이런 전략으로 출판계에 뛰어든 인터넷서점들이 시장을 잠식한 뒤 치고 빠지면 결국 출판사와 유통망은 무너져 버린다는 얘기다.이에 대해 인터넷서점들은 현재 수익을 올리지는 못하고 있지만 인터넷서점 성장세로 봤을 때 조만간 수익을 낼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한다. 또 낙후한 출판계 유통망을 개선하는 방법은 도서정가제를 없애는 길 뿐이라고 주장한다.◆ 외국의 경우는 어떤가프랑스는 1981년 당시 문화부 장관의 이름을 딴 ‘랑법’이라는 특별법을 제정해 도서정가제를 법제화했다. 특히 프랑스는 정가제를 없앴다 다시 부활시킨 경험을 가지고 있다. 일본의 경우 인터넷서점들은 할인판매를 하지 않을 뿐 아니라 배송료도 독자들에게 부담시키고 있다. 그런데도 일본의 인터넷서점들은 매년 4배씩 성장한다. 이밖에 영국 독일 스위스 등이 여러가지 방식으로 도서정가제를 지키고 있다.이와 달리 미국은 할인판매가 원칙처럼 성행하고 있다. 워낙 복잡한 유통경로를 통제할 수 없기 때문에 업계 자율에 맡겨 놓았다. 하지만 할인판매로 큰 신장세를 보였던 아마존의 경우 점점 증가하는 관리·물류 비용을 감당키 어려워 할인율을 낮추고 있다.◆ 묘안은 무엇인가문제는 책이 ‘상품’인 동시에 문화적 공공성을 지닌 지적 저작물이라는데 있다. 할인판매가 허용되면 서점들은 권당 판매이윤이 감소하는 만큼 많이 팔리는 책 위주로 공급받으려 할 것이다. 출판사도 베스트셀러가 될 책만을 제작할 가능성이 크다. 가뜩이나 외면받는 인문학이나 전문서적 순수문학은 설 땅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이 때문에 온라인서점에서의 가격을 이원화하자는 안이 보완책으로 제시되고 있다. 가령 가벼운 읽을거리나 1년 정도 지난 신간류에 한해 할인을 하고 학술 교양서는 정가제를 유지하자는 것이다. 하지만 이 방법은 실효성이 없어 보인다. 최저가 판매를 내건 후발 인터넷서점들이 이런 담합을 지킬지도 의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