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영화는 이야기와 그림이 결합한 예술이라고 일컬어지곤 한다. 그리고 1백년 영화의 궤적에 획기적인 전환을 가져 왔던 모든 거장들은 이야기와 그림의 결합이 가지고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하지만 영국 영화계의 이단아 피터 그리너웨이에게 영화는 이야기 매체가 아니다. ‘이야기를 하고 싶다면, 영화 감독이 아니라 작가가 되어야 한다’라고 노골적인 불평을 토로할 정도로, 그는 영화의 본질은 그림에 있다고 강조해 온 드문 감독 중 하나다.<필로우 북 designtimesp=20470>은 고대 일본 헤이안 왕조 시대의 궁녀 세이 쇼나곤의 일기로, 그녀가 황실의 모든 의식과 기념 행사들에서 자신이 목격한 애정 행각까지를 상세하게 표현한 13편의 시문학이다. ‘인생에서 신뢰할 수 있는 두 가지 이상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문학과 살이다’라는 문구에서 나타나듯, 이 책은 문학과 육체의 즐거움을 동격으로 보고 있다. 피터 그리너웨이는 이 고대 일본 문학의 정점을 20세기 말 새로운 텍스트로 부활시킨다. 전통적인 가정에서 자라난 나기코에게 그녀의 생일은 하나의 의식으로 기억된다. 매년 생일이면 서예가인 아버지는 그녀의 얼굴과 등에 글씨를 써주곤 했던 것. 이 기억은 그녀가 성인이 되어 그녀 자신의 필로우 북을 만들어야겠다는 강박증으로 자리잡게 된다. 그리고 번역가 제롬(이완 맥그리거)과의 사랑을 통해 그녀는 자신의 필로우 북을 만들어 가기 시작한다.필로우 북을 만들기 위해 남자들의 몸에 글씨를 써 내려가는 나기코의 모습이나, 죽은 연인의 거죽을 벗겨 책을 만든다는 <필로우 북 designtimesp=20473>의 소재는 분명 다른 영화들에게 찾아보기 어려운 엽기적인 설정이다. 그러나 이 영화를 다른 영화들과 근본적으로 구분시켜주는 지점은 바로 영화라는 시각 매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관습을 넘어 새로운 가능성을 찾으려 하는 감독의 집요함이다.이미 피터 그리너웨이는 <요리사, 도둑, 그의 아내, 그녀의 정부 designtimesp=20476>나 <영국식 정원 살인사건 designtimesp=20477> 등의 전작을 통해 색채와 구도를 집요하게 탐구해 온 감독으로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필로우 북 designtimesp=20478>을 통해서 그는 스크린이라는 캔버스에 디지털 테크놀로지라는 새로운 가능성을 덧칠한다. 여러 개의 화면으로 쪼개어지는 스크린 위로는 세계 각국의 언어들이 자막으로 흐른다. 마치 나기코가 제롬의 몸에 붓을 대듯, 그리너웨이는 스크린이라는 백지에 자신만의 붓을 가져다 대고, 그의 붓에서 빠져 나와 스크린 위에 넘쳐 흐르는 시각적 기호들과 언어들은 우리를 혼란스럽게까지 만든다. 하지만 그건 언어와 형상, 그리고 그 둘의 상호관계인 영화라는 매체를 철학하고자 하는 그리너웨이만의 저돌적인 방법론이다.‘나는 아직까지 영화를 본적이 없다. 지금까지 우리가 보아왔던 것은 그저 삽화가 곁들여진 텍스트일 뿐이다’라는 그리너웨이의 말은 지나치게 공격적으로 들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단지 식상한 신데렐라 이야기의 재탕이나, 단순히 화려한 스펙터클로 관객을 사로잡기 위해 영화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리너웨이의 공격은 충분히 그 가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