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사에 관한 한 일본인들은 천부적 기질을 타고 난 민족이다. 상품을 만드는 제조회사건, 이를 직접 파는 판매원이건 상품개발에서 포장, 진열, 고객서비스에 이르기까지 소비자들이 주머니를 열지 않고는 못배기도록 구석구석까지 온갖 정성을 다 쏟는다. 일본이 포장문화의 천국이라든지 규격화된 상품을 만들어 내는데 세계 최고의 노하우를 지녔다는 평을 듣는 배경에는 모두 이런 노력들이 보이지 않는 힘으로 깔려 있다.때문에 외관상 포장이 조악하거나 내용물이 일정치 않은 상품들은 일반 소비자의 시선을 잡아 끌기 어렵다. 상인이 장사에 서툴다는 이유로 얼렁뚱땅 팔아치우려 해도 제대로 먹혀 들어가지 않는다.그러나 일본에서는 최근 구식장사법을 연상케 하는 새로운 스타일의 비즈니스가 속속 등장해 소비자들의 높은 인기를 끌면서 유망업종으로 뿌리내리고 있다.음식이건 낡은 옷이건 무엇이든 저울에 달아 눈금대로 파는 비즈니스가 그 주인공이다.퍼 그램 마켓, 헌옷 달아서 판매 업계 주목1g 당1엔씩을 받는 에비스 가든플레이스 사원식당은 젊은 여직원들로 언제나 만원이다(위). 올리브유 등 각종 기름을 고객이 원하는 만큼만 병에 담아 판매하는 다카시마야 백화점 신주쿠점의 식품매장.일본에서도 저울에 달아 파는 상품들은 얼마 전까지 반찬이나 육류, 생선 등 일부 부식거리에 한정돼 왔다. 하지만 최근에는 대상품목이 업종을 가리지 않고 다양한 분야로 확산되고 있으며 변화와 모험의식이 강한 20대 전후 젊은 소비자들로부터 특히 뜨거운 지지를 얻고 있다.도쿄 메구로구에 자리잡은 중고의류점 ‘퍼 그램 마켓(Per Gramme Market)’은 일반인들이 거들떠 보지도 않는 헌옷을 무조건 저울에 달아 팔면서 의류 유통업계의 주목을 받고 있는 곳이다. 1g당 8엔을 받는 이 점포에서는 1970년대 전후에 만들어진 프랑스제 재킷과 코트, 피혁제품, 아동복 등 2만여점의 상품을 갖춰 놓고 있다. 물론 가격표는 하나도 붙어 있지 않다. 고객들은 자신이 원하는 상품을 계량해 보고 난 후에야 지불할 가격을 알게 될 뿐이다.무게로 달아 판다면서 바가지를 씌우는 것은 아니다. 실크 스카프, 면 티셔츠, 털제품 등 무게가 그다지 나가지 않는 상품은 단돈 1백엔 전후의 소액으로도 손에 넣을 수 있다.가죽점퍼도 웬만한 것은 5천`~6천엔이면 살 수 있어 젊은 고객들의 인기가 높다.이 점포에서 홍보를 담당하는 고이치 무라노리씨는 “무게를 알아 맞힌다는 재미와 자신이 살 상품을 저울에 달아본다는 이벤트적 성격이 젊은이들에게 강하게 어필한 것 같다”고 분석하고 있다.퍼 그램 마켓은 메구로점을 2년 전 처음으로 오픈했지만 짧은 기간 동안 점포가 벌써 전국적으로 24개로 늘어났다. 또 유사한 스타일과 업종의 점포도 곳곳에서 등장, 의류 유통시장에 저울에 달아 파는 중고 옷이 인기상품으로 등장할 가능성도 조심스레 점쳐지고 있다.도쿄 시부야구의 대표적 복합쇼핑몰로 각광받고 있는 에비스 가든플레이스에서는 50여 입주사의 직원들이 매월 2, 4주 금요일마다 색다른 경험을 하고 있다.사원용 식당 ‘에스빠지오’에서 자신의 점심거리를 저울에 달아 사 먹는 것이다.식당 운영형태는 호텔 뷔페와 별다를 바 없다. 샐러드, 수프에서 먹음직한 서양요리까지 매회마다 13가지씩의 먹거리가 나온다. 직원들은 이중 자신의 입맛에 맞는 것을 접시에 골라 담기만 하면 된다.가격은 모든 메뉴가 1g당 1엔. 디지털 저울에 무게를 달아 잰 후 미리 지급받은 선불카드로 음식값을 내면 O. K. 다.“9가지 음식을 조금씩 담았는데도 가격은 3백엔 정도밖에 나가지 않네요. 제공되는 음식량과 가격이 미리 정해져 있는 정식보다 모든게 합리적이어서 좋습니다.”한 은행원은 지갑에도 별 부담을 주지 않고 식사량도 컨디션에 맞게 조절할 수 있어서 대만족이라는 표정을 지었다.이 식당 안에는 정식을 취급하는 카운터도 별도로 있지만 여성들의 발길은 모두 저울에 달아먹는 코너로 몰린다는게 식당 종업원들의 귀띔이다.1g당 1엔 방식의 식당운영 기법을 생각해 낸 것은 기업들을 대상으로 단체급식을 제공하는 전문업체 ‘서양푸드시스템’.이 회사는 에비스 가든플레이스를 시발로 현재 도쿄 일대의 수도권지역 14개의 사원식당에서 1g당 1엔 방식을 도입해 실시하고 있다.이 회사가 저울에 달아 파는 방식에 눈을 뜨게 된 것은 컨비니언스 스토어 및 패스트푸드업체의 공세에 밀려 점심고객을 갈수록 이들 업체로 뺏기게 됐기 때문이다. 서양푸드시스템의 한 관계자는 “정해진 메뉴 일변도로 식사를 제공하면 고객이탈이 갈수록 심해진다”며 “메뉴 준비가 번거롭긴 해도 소비자 위주로 생각한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하고 있다.저울 눈금에 맞춰 상품 값을 받는 상품은 이들뿐이 아니다.신선도 필요한 값비싼 식품도 계량 판매나서신선도를 생명으로 하는 값비싼 식품에서도 ‘저울눈금’ 장사방식은 소비자들의 탄탄한 지지를 얻고 있다.다카시마야 백화점 신주쿠점 식품매장에 자리잡은 ‘요하네스 베르나’는 신선하면서도 품질이 뛰어난 각종 고급 오일을 저울 방식으로 팔아 단골손님 확보에 크게 성공한 경우다.이곳에서는 올리브, 마카디아넛츠, 호두, 호박씨 등 9가지 식물성 오일을 최저 1백 ㎖ 단위로 계량해 팔고 있다. 가격은 4백50엔부터 1천3백엔까지. 특이한 것은 품질보증을 위해 오일을 사려는 고객들에게 개당 보통 1백~2백엔씩 하는 전용병을 구입하도록 하고 있다는 점이다.그러나 한번 구입하고 나면 다음 회부터는 전용병을 가지고 올 경우 무료로 새병을 교환해주고 오일을 넣어준다. 요하네스 베르나의 관계자는 식물성 오일은 샐러드 등에 얹어 그대로 먹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신선도가 생명이라는 점에서 이같은 소량판매를 시작했다고 밝혔다. 공기중의 산소와 접촉하면 산화돼 색과 향이 변하고 맛이 떨어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그는 기존의 시판제품들은 1회에 판매되는 양이 많아 다 먹기도 전에 품질이 나빠지는 경우를 많이 보아 왔다며 맛을 중시하는 주부들이 특히 자주 찾아 온다고 털어놨다.이곳에서는 병째로 구입하면 수만엔씩 나가는 브랜디나 독일산 증류주들도 저울에 달아 파는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일본에서 옛생활 방식을 연상케 하는 이같은 장사 기법이 성행하고 있는데 대해 전문가들은 놀랍다는 반응과 함께 앞으로 성장전망이 밝다는데 의견을 같이 하고 있다.라이프디자인연구소의 한 연구원은 “소재와 품질이 균일하지 않은 중고 옷들을 한데 뒤섞어 파는 장사법은 여지껏 볼 수 없었던 것”이라며 의외라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아울러 “이같은 현상은 핵가족화및 개성적 소비스타일의 대두와도 무관치 않은 것 같다”고 진단했다.가족 수가 적어지면서 가정마다 소비의 중심이 20대 전후의 젊은 층으로 이동한데다 이들이 강한 개성을 앞세워 자신의 기호에 맞는 새로운 쇼핑장소를 택하는 경향이 강해졌다는 분석이다.일본의 유통전문가들은 “소비의 탈(脫)규격화, 표준화 경향이 강해질수록 제조, 유통업체들의 생산 및 판매방식은 기존의 ‘소품종 대량’중심에서 ‘다품종 소량’으로 옮아갈 것”이라고 점치고 있다.이와 함께 “저울 눈금으로 상품 값을 정하는 계량판매 방식이야 말로 이같은 다품종 소량 소비시대를 떠받치는 핵심 장사기법의 하나가 될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