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척 거구에다 일반 성인 남자들보다 20㎏ 정도는 족히 더 나갈 것 같은 몸집, 그리고 거무죽죽한 얼굴색…. 아무리 들여다 봐도 보통 사람들이 학자라는 직업에 대해 갖고 있는 선입견과는 거리가 먼 인상이다.그러나 속 내용은 전혀 다르다. 고집스러워 보일 정도로 굳게 다문 입과 금테 안경 속에서 빛나는 두 눈에는 일본 IT혁명의 내일을 끌고 나간다는 자신과 의지가 흘러 넘친다.무라이 쥰(村井 純, 46)게이오대 환경정보학 교수. 컴퓨터나 IT분야에서 일하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일본에서 그의 이름 석자를 모르는 이는 거의 없다. 학자로서는 원로급이라고 보기 어려운 40대 중반의 나이지만 그가 차지하는 위상은 절대적이기 때문이다.무라이 교수는 학문의 세계에 몸담고 있는 인사들 중 일본의 IT산업 부흥을 견인하는 최선두주자라고 해도 거의 틀리지 않는다. 이같은 평가는 그가 맡고 있는 직함이나 역할을 잠시만 들여다 봐도 금세 납득할 수 있다.그는 우선 모리 요시로 일본총리의 과외선생이다. 과외 중에서도 컴퓨터를 가르치는 전문교사다. 그는 2000년 7월 모리 2차내각이 발족된 후 생긴 IT전략회의의 멤버로 활약하면서 이데이 노부유키 소니 회장과 함께 일본의 IT산업 부흥을 위한 기본법 제정에 핵심 역할을 했다. 일본 정부와 산업계, 학계가 그에게 거는 기대를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그가 걸어 온 길은 컴퓨터에 대한 애정과 왕성한 지적 호기심, 그리고 사명 그 자체로 뭉쳐져 있다. 교육자 집안에서 태어난 무라이 교수는 게이오고교를 졸업하고 게이오대학 공학부를 나왔다. 게이오대 대학원에서 수리공학을 연구하고 박사학위를 취득한 그는 대학원 시절부터 유닉스를 연구하면서 컴퓨터를 연결한 네트워크 구축에 큰 관심을 가져 왔다. 도쿄대의 종합정보센터에서 조수생활을 하기도 했던 그는 그 때 당시 일본의 법률을 위반한 선구자적 일을 하나 저질렀다.일본은 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전화선에 전화기 이외의 다른 것을 연결하면 법으로 처벌받게 돼 있었다. 국립대학 직원 신분인 그로서는 자칫하면 목이 잘리고 직장을 잃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는 그러나 도쿄대와 게이오대의 컴퓨터를 접속시켜 네트워크를 만들고 여기에 JUNET(재팬 유니버시티 네트워크)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것이 일본 인터넷의 효시가 된 것이다.미래 위해 불이익 감수하는 ‘배짱 두둑’법률위반은 85년에 통신사업이 민간에 개방되면서 ‘실험적 연구’라는 이유로 정부의 양해를 받아냈지만 미래지향적 일을 위해 불이익을 감수한 배짱을 보여주는 일화가 아닐 수 없다.무라이 교수의 정보통신 진흥에 대한 의지와 선견은 88년에 와이드 프로젝트라는 사업을 시작하면서 또 한번 진가를 발휘했다. 그는 JUNET으로 가입자들이 정보를 주고 받을 때 회선사용료가 너무 부담된다는 것을 알게 되자 인터넷 전용선을 확보하기 위해 기업들을 움직였다. 인터넷에 대해 별 관심이 없었던 회사들을 찾아 다니면서 함께 실험을 해보자고 설득, 1개 회사당 50만엔씩의 협조를 받았다. 그리고 5천만엔을 모아 이 돈으로 마음껏 쓸 수 있는 인터넷 전용선을 확보했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무라이교수는 인터넷 접속업자의 파이어니어 역할을 했던 셈이다.그는 정보통신 전쟁에서 패한 일본의 국제 경쟁력이 형편없이 추락하고 다른 나라들로부터 놀림감이 되고 있지만 앞날을 누구보다 자신하고 있다. 그는 일본의 제조업 하이테크 저력과 감춰진 경제력을 감안하면 IT선진국을 따라잡는데는 긴 시간이 필요치 않다고 단언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