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11월금리 천정부지 … 줄줄이 문닫아‘금리불문, 금액불문, 기간불문, 염치불문, 출처불문’. 지난 97년말 외환위기때 ‘5불문(不問)’이란 말이 유행했다. 기업들이 하루하루 급전으로 연명하면서 생긴 말이다. 이렇듯 IMF 구제금융을 전후해 금융시장의 위기는 상상을 초월한다. 금리 금액 기간에 관계없이 돈을 구하느냐, 못구하느냐로 기업의 생사가 갈라졌다. H그룹 자금팀의 한 간부는 “임원 이하 자금팀 전 직원들이 매일 아침마다 나가 상호신용금고나 사채업자에게까지 손을 벌려야 했고 빈손으로 들어올때 눈앞이 캄캄했다”고 회고했다.당시의 실세금리 30%의 고금리속에 많은 기업이 사라져 갔다.금리는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금융계에선 당시 김영삼정부의 무능을 빚대 실세금리 30%, 종합주가지수 300, 원/달러 환율 3천원이라는 ‘신 영삼시대’를 점치기도 했다.이 가운데 실세금리 30%는 현실화됐다. 실세금리가 더 높아야 하는데 당시 이자제한법상 법정 최고이율인 연 25%에 막혀 돈이 전혀 돌지 않는 마비상태에 빠졌다. 콜자금은 이틀 이상 빌리기가 하늘의 별따기였다. 따라서 겉으론 25%에 꾼 것으로 하고 실제 금리가 30∼40%가 되도록 꺾기 등으로 보전해주는 이면계약이 성행했다.부실채권이 많았던 제일·서울은행의 위기로 “이젠 은행도 못믿겠다”는 인식이 퍼져 예금인출 사태를 낳았다. 10여개 종금사와 증권사들이 줄줄이 쓰러졌다. 한보에 이어 기아 진로 대농 쌍방울 삼미 뉴코아 등이 부도를 맞았다. 이로 인해 서울지법 민사50부가 관리하는 기업의 총자산이 40조원에 달해 ‘재계랭킹 4위’라는 비아냥도 나왔다.IMF는 구제금융을 지원하면서 ‘고금리’를 처방했다. 정부는 12월 법정 최고이율을 40%로 올렸고 98년1월엔 아예 이자제한법을 폐지하기에 이르렀다. 콜금리와 회사채수익률은 97년12월 초순 20%선을 넘겼고 하순엔 30%선까지 뛰었다. 이런 고금리도 신용이 있는 기업이나 금융기관에 해당되는 것이다. 부실 낙인이 찍힌 곳에는 금리에 관계없이 돈을 빌려주겠다는 곳이 없었다.기업의 돈줄이 마른 데는 IMF의 요구에 따라 정부가 은행권에 BIS(국제결제은행) 자기자본비율 8%선을 지키게 한 점도 한몫 했다. 은행들은 대출할수록 BIS비율이 떨어지게 돼 돈을 쥐고 풀지 않았다. 임창열 당시 부총리는 12월26일 은행장회의를 열어 기업대출을 강력히 독려했다. 그는 “4조4천억원의 은행 후순위채를 인수해 BIS비율이 1~2%포인트 높아짐에 따라 추가 대출여력이 30조원 늘어난다”고 강조했다.지금 보면 말도 안되는 얘기지만 연말 ‘자금대란’이 임박해 이렇게라도 안정될 것이란 자기최면이 필요했다. 은행들은 부총리의 채근에 ‘성의표시’ 수준에서 담보대출을 늘리는 시늉을 하면서 뒤로는 기존 대출금을 앞다퉈 회수했다. 다음날 콜금리는 31.65%로 최고치를 기록했다.IMF의 고금리처방은 결국 30대 그룹중 절반을 부도 법정관리 워크아웃으로 몰아넣고 실업자 1백50만명을 양산한 채 99년 상반기에 저금리정책으로 전환됐다. 99년5월 콜금리는 4.75%로 급락했다.2001년 4월엔화·물가 오름세 … 금리 ‘들먹’지난 3년간 저금리 기조가 3월 이후 환율충격에 흔들리고 있다. 엔화 약세가 ‘원화 환율 상승→금리 상승→주가하락→환율 재상승’의 악순환을 몰고 왔다. 게다가 국고채 예보채가 쏟아지면서 채권수급도 공급초과로 돌아섰다.올해초 머니게임 양상 속에 채권시장의 지표금리인 국고채 수익률이 한때 연 5% 밑으로 떨어졌다. 그러나 지난 2월16일 전철환 한국은행 총재의 국고채 투기열풍에 대한 경고발언 이후 오르기 시작해 지난 4일엔 연중 최고치(연 6.70%)를 기록했다.엔/달러 환율 상승과 물가 상승에 의한 금리상승 압력은 상존하고 있다.회사채도 덩달아 8%대로 재진입했다. 현대건설 사태까지 겹쳐 투기등급 채권은 우량채권과의 금리격차가 5∼6%포인트까지 벌어졌지만 아예 거래가 안된다. 기지개를 켜던 회사채 발행시장도 3월이후 된서리를 맞았다. 성철현 LG투자증권 채권트레이딩팀장은 “한때 BBB- 등급까지 발행되던 것이 최근엔 AA-의 우량채권도 발행이 어렵다”고 말했다. 기업은 금리가 높아 발행을 미루고 기관들은 금리가 더 오를 것으로 보고 채권매수를 기피한 탓이다.은행은 올들어 밀려든 예금으로 앞다퉈 국고채를 샀다. 투신사와 연기금들도 안전한 국고채를 대거 매입했다. 국고채에 몰린 돈이 흘러 넘쳐 회사채로 옮겨가던 이른바 ‘스필오버(흘러넘치기)효과’가 기대됐다. 그러나 국고채 수익률 급등으로 희석돼 버렸다. 수익률이 상승할수록 금융기관들의 보유채권 평가손도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한은 관계자는 “3년짜리 채권 수익률이 1.5%포인트 오르면 투자원금에서 4%가량 손해본다”고 말했다.콜금리는 5%선에 묶여 있다. 한은이 지난 99년 5월부터 통화량 관리에서 콜금리 목표치 관리로 전환했기 때문이다. 한때 장기금리(국고채)가 단기금리(콜금리)를 밑돈 ‘단고장저’(장·단기 금리역전)는 분명 비정상적이지만 금리격차가 1%포인트 이상 벌어진 것도 정상적이진 않다.기업의 자금조달 수단은 증시침체와 신용위험으로 주식·채권 위주에서 다시 은행대출 위주로 바뀌고 있다. 한은의 자금순환동향에 따르면 지난해 은행 대출은 8조원이 늘어난 반면 회사채는 오히려 발행액보다 상환액이 2조원 더 많았다. 프라이머리CBPO 7조3천억원을 조달했는데도 회사채 발행이 부진했던 것은 그만큼 신용위험이 컸다는 의미다.다행히 정부와 한국은행의 강력한 외환시장 개입의지 표명으로 환율이 진정기미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채권딜러들은 언제든 엔화와 물가 오름세에 의한 금리상승 가능성이 도사리고 있다고 보고 있다.현재 상황이 외환위기 때와 다른 점은 △한자릿수 저금리 △풍부한 시중유동성 △대기업 부채비율 2백% 이하 등이다. 지표나 펀더멘털에서 비교적 건전해진 셈이다. 문제는 대우그룹 현대건설처럼 아무리 덩치가 커도 안심 못한다는 인식이 시장에 뿌리깊게 박힌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