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까지만 해도 JP모건증권은 미국경기의 침체 가능성을 35%로 보았다. 그러나 얼마전 이 가능성을 45%로 10%나 끌어올렸다. 증권사 가운데 JP모건은 비교적 경기전망에 낙관적인 회사중 하나로 소문나 있다. 이 증권사 서울지점장 에드워드 켐벨해리스씨는 “침체 가능성 수치를 50% 이상으로 끌어올릴 가능성도 상당히 높다”고 설명한다. 켐벨해리스 지점장은 한국의 경제성장률 전망치도 3.5%로 최근에 하향수정했다고 밝혔다.올들어 국내외 각종 연구소와 증권사들이 국내총생산(GDP) 성장률 수치를 하향조정하기에 바쁘다. 5%에서 7%대로 전망되던 경제성장률 전망은 최근 모두 4% 이하로 내려가고 있다. 제조업 평균가동률이나 재고 수준도 아직은 비관적이다.통계보다도 더욱 두려운 것은 지금 외환시장, 자금시장, 주식시장에 유령처럼 떠도는 실물경제의 공포스러운 그림자이다.원화 환율은 지난 4일 달러당 1천3백60원으로 30개월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약 한달반 사이에 달러당 1백원 가까이 올랐다. 엔화 환율이 달러당 1백25엔을 넘는 등 가파르게 오르고 있는 것도 최대 요인이다. 그러나 화폐가치가 펀더멘털을 반영한다는 경제원론적 시각에서 보면 미국의 경기하강보다 한국의 경기하강이 더 심각하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실업률은 2월에 5%로 높아졌고 대출금 이자를 제때 못내는 개인신용불량자는 2백64만명으로 사상 최대이다.지난해말 이후 5%대에서 비교적 안정돼온 3년만기 국고채수익률도 채권시장의 요동속에 7%대 돌파를 눈앞에 두고 있다. 회사채수익률(AA-등급 기준)은 8%를 넘었다. 정부는 환율과 금리가 ‘불안심리로 오버슈팅(과도상승)했다고 하지만 한달새 환율이 1백원 이상 올랐는데도 달러를 팔겠다는 사람은 없고 부유층들은 사재기 기승을 부리고 있다.지난 한햇동안 내내 하락해온 증시는 4일 500포인트를 깨고 지난해 최저수준으로 회귀했다. 1999년말 1056포인트에서 1년새 반토막이 났는데도 더 하락할 수 있다는 기세이다. 외환위기 이후 국내증시의 뒷덜미를 잡아온 구조조정, 그 구조조정을 지연해온 대가이다.기업실적도 급격히 악화되고 있다. 삼성전자 포항제철 현대자동차 등 주요 기업의 1분기실적은 지난해보다 크게 줄었다.1달러=1백30엔=1천4백원=국고채 수익률 7%=종합주가지수 480’의 시나리오가 현실화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이쯤 되니 97년말이 생각나지 않을 수 없다.당시엔 ‘00지역 부도율 사상 최고’ ‘대기업 중소기업 자금난’ 기사가 신문지면을 장식했다. 증시는 800포인트에서 300포인트대까지 미끄러졌고 주식투자 실패에 가정파탄으로 자살한다는 기사도 늘었다.물론 그때와 지금은 몇가지 다른 점이 있다. 당시에는 누적된 무역적자로 외환보유고는 30억달러 남짓했는데 단기외채가 9백억달러를 넘었다. 현재는 단기외채도 적고 외환보유고가 9백44억달러에 이른다. 즉 해외채무 불이행 위험에 의한 외환위기의 가능성은 적다는 뜻이다. 그러나 엔/달러 환율이 계속 오르면 달러가수요가 생기고 외국인이 주식을 팔아대기 시작하면 외환보유고가 줄면서 환율은 상승행진을 해갈 것이다.금리는 어떨까. 기업들의 차입경영구조속에 만성적인 자금수요 초과상태이던 당시 실세금리는 30%를 훌쩍 넘었지만 지금은 풍부한 유동성이 있다. 수급상 다시 두자릿수 금리로 회귀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물론 자금흐름이 왜곡돼 있음을 간과할 수는 없다. 절대금리 수준과 관계없이 돈을 구할 수 없는 기업이 태반인 것도 사실이다.미 경기 침체로 국내 경기까지 위축그때보다 더 불리한 요인도 있다. 당시 미국경기는 호황이 지속되는 와중이었고 IT혁명으로 전자제품 수요가 폭증, 환율메리트까지 가세한 한국의 반도체 등 주력 수출품목은 회생의 기회를 일찍 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최대 수출시장인 미국경제가 10년 호황을 접고 급강하하고 있다. 일본정부의 경기부양대책은 약발이 떨어져 시장의 냉소만 받고 있다.한국증시의 본질적 아킬레스건인 ‘기업채무’ 문제도 해결되지 않았다. 리처드 새뮤얼슨UBS워버그증권 서울지점장은 “대다수 한국기업들이 엄격하게 따지면 파산상태”라고 지적한다. 영업이익으로 금융비용도 못내는 이자보상비율 1미만의 기업들이 수백개인 현실을 가리키는 것이다.그럼에도 제2의 위기를 예상하는 전문가들은 아직은 많지 않다. LG경제연구원 강삼모연구원은 “원/달러 환율이 올라도 엔/달러 환율만큼 오르면 경쟁품목이외의 수출에는 도움이 된다”며 “수출이 성장률 저하를 견제하는 역할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삼성경제연구원 오승구 연구원도 “주가 하락 및 경제 성장 둔화를 막기 위해 미연준이 금리를 추가 인하할 것”이라며 “경제 공황의 가능성은 없다”고 주장한다.한국에서 9년을 지내고 외환위기도 경험했다는 새뮤얼슨 지점장은 “한국을 뜯어보면 비관적이기는 쉽지만 세계 동시불황의 가능성은 없다고 보며 따라서 한국경제가 97년말만큼 나빠지지는 않을 것으로 본다”고 말한다. 다만 기업채무문제가 해결되기 전까지 당분간 한국 금융시장의 혼란은 해결되기 어렵다는 지적도 곁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