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적 안목 시스템 인프라 구축 의문 … ‘안정된 자본’ 유지도 해결과제

“한 편에 2억달러 정도의 수익을 올릴 수 있다는 가능성에 취한 다국적 기업들 사이에 영화사 사들이기 붐이 일었다.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한 인재들이 토박이들을 제치고 영화사의 회전의자를 차지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풍경을 묘사한 글처럼 보이지만 실은 60년대 미국에 관한 기술이다. 거의 똑같은 현상이 2001년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다. 딱 40년 뒤쳐져서.엔터테인먼트 산업의 핵심에 자리잡고 있는 영화산업은 제작-도매(배급)-소매 (극장상영)의 세 부분으로 나뉜다. ‘메이저’라고 할 때의 의미는 단순히 ‘규모가 크다’는 의미 뿐 아니라 산업의 이 세 분야를 모두 영위하고 있는 사업자를 지칭한다고 보면 더 정확하다. 흔히 ‘제작비가 50억원이나 된다’고 화제를 삼곤 하지만 산업적 측면에서 볼 때 제작보다 배급과 상영이라는 인프라가 차지하는 비중이 양적으로 훨씬 크다. 메이저들이 소유하고 있는 극장이라는 ‘부동산’을 비롯, 상품의 시장성을 극대화할 수 있는 유통채널이야말로 산업의 근간을 이루는 것이다.거대 시스템 체계적 관리능력 필요다소 부정확한 개념이긴 하지만 ‘복합 엔터테인먼트 미디어 그룹’이라고 할 때는 영화의 이같은 메이저개념을 더 확장한 것으로 본다. 거의 ‘타임워너AOL’과 같은 유형을 모델로 한다.이 모델의 특징은 즐길거리가 되는 모든 콘텐츠의 생산 및 판매 전 과정을 장악하고 있다는 데 있다. 영화, 음반, 비디오, 게임, 테마파크, 공중파와 케이블 TV, 인터넷 등. 단순화하면 다음과 같은 모델이다. 자본을 대서 영화 한 편을 제작한다. 영화 제작에 필요한 스타 배우 및 주제가를 부를 가수 매니지먼트 에이전시를 소유하며 영화를 상영할 극장 체인망과 세계 시장에 판매할 배급회사도 갖고 있고 그 줄거리와 캐릭터로 게임을 만들며 (또는 반대로 게임을 영화로 만들기도 하고) 등장한 캐릭터로 각종 파생 상품(완구, 의류, 테마파크)을 판다. 비디오로 제작해 판매하고 또한 자신들이 만든 영화를 자신들이 소유한 케이블채널, 인터넷에 상영하는 것이다.요약하면 ‘원 소스 멀티 유즈(One Source Multi Use)’를 가능케 하는 모든 수단을 일사분란하게 동원할 수 있는, 그럼으로써 비용은 줄이고 수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 거대 기업집단을 말하는 것이다. 지난해 이같은 엔터테인먼트 그룹을 설립하려 시도했던 ICG 김상우 대표는 “프로젝트를 추진하기 위해 6개월간 세계적인 복합 엔터테인먼트 그룹의 사례를 연구해보니 미디어를 소유한 기업만이 살아남더라는 공통점을 찾았다 “고 말했다.극장 체인, 케이블과 위성 채널 등을 사들여 하드웨어 장악부터 시작한 제일제당과 동양그룹은 이같은 의미에서 ‘정도’를 따르는 출발이라고 볼 수 있다. 섣불리 소프트웨어, 즉 콘텐츠 제작부터 뛰어들었다가 실패하고 발을 뺀 삼성과 대우 등의 전례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는 것이다.이렇게 판이 커질 경우 구멍가게식 경영으로는 유지가 불가능함은 주지의 사실이다. 기본적인 예산 집행 결산의 투명성이 보장돼야 함은 물론 위험(리스크) 관리능력, 인력자원의 체계적인 재생산이 이뤄져야 한다. 그러나 국내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현황은 이와 거리가 있다. 영화 칼럼니스트 김형석씨는 “흥행 대작 JSA가 한 편 나오면 다른 한국영화가 다 망하는 이런 상태는 시스템이 아니다. 일정한 질을 갖추고 일정 수준 이상의 관객을 동원하는 작품이 일년에 몇편씩 안정적으로 계속 공급될 때 시스템이 갖춰졌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고 말했다.세계시장에서의 경쟁력도 아직 확신할 수 없는 부분이다. 규모를 키울 경우 내수만으로 수지타산을 맞출 수 없는 것은 자명하다. 그래서 다들 아시아 시장 진출을 내세운다. 그러나 한국산 문화 상품의 세계 시장에서의 경쟁력은 늘 가능성에 머무르고 있고 또 콘텐츠가 경쟁력이 있다 해도 이를 뒷받침해줄 시스템은 부재한다. 일부 영화들이 영화제 등에서 수상하고 있지만 영화제 수상과 상품성은 별개의 문제다. 중국에서 ‘한류’열풍이 불고 있으나 그 인기는 산업으로 연결되지 못하고 일회성 이벤트에 그치고 있다.안정된 자본이 존재하는가도 문제다. 지금은 돈이 넘치고 있지만 메이저가 정말 메이저다운 시스템으로 자리 잡는데는 시간이 필요하다. 미국의 메이저들은 각 회사가 소유한 부동산(극장)을 담보로 어려움 없이 대출받을 수 있었다. 오늘날 미국의 엔터테인먼트 시스템을 만든 ‘배후’는 월스트리트였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국내 엔터테인먼트업에 유입되는 자본은 일부 외국 자본과 대기업 자본을 제외하면 벤처캐피털, 창투사 등과 저금리에 투자처를 찾지 못한 단기 유동자본이 대부분이다. 단시간에 높은 수익을 내고 빠져나가려는 핫머니 성격의 자본이지 산업이 틀을 갖출 때까지 기다릴 장기 투자가 아닌 것이다.영화판 뭉칫돈 ‘핫머니’ 성격 짙어물론 산업은 아직 초기 단계다. 온미디어 김성수 상무는 “엔터테인먼트 그룹으로 가는 첫 걸음, 윈도를 갖춰 가는 단계로 봐 달라”고 말했다. 케이블 일부 채널은 6년만에 이제야 흑자를 내기 시작했다. “일단 국내에서 안정적인 흑자 기조를 내고 국내 메이저 자리를 굳힌 뒤 세계 시장으로 나가는 게 순서 아닌가”라는 것이다. 그러나 CJ나 동양 등은 앞으로 5∼10년을 아시아 메이저로 등극하는 기간으로 잡고 있다. 이들이 모델로 삼고 있는 미국의 복합기업들이 현재와 같은 모습을 갖추기까지는 무척 오랜 세월이 걸렸다.미디어 엔터테인먼트 복합 거대기업으로의 변신은 필연적인 이유가 있었다.예컨대 오락 산업에서 텔레비전이 등장해 영화의 입지를 좁히자 ‘인디펜던트’라는 제작 양식을 만들어 대응했으며 급기야 텔레비전에도 콘텐츠를 배급했다. 뭔가 더 새로운 이윤 창출 방식이 없을까 궁리 끝에 각종 ‘파생상품’으로 수익원을 다양화 할 수 있는 ‘블록버스터’라는 상품을 ‘발명’했다. 이어 이같은 수익 모델도 한계에 봉착하자 통합된 미디어 복합 기업을 구축, 하나의 소프트웨어가 가능한 모든 경로로 소통되며 수익을 발생시키는 모델을 만들어내기 위해 미디어와 엔터테인먼트간의 인수합병이 시작된 것이다. 모든 변신이 수익 극대화라는 논리에 너무나 충실히 이뤄졌던 것이다.이같은 과정을 모두 생략하고 돈이 된다니까 앞뒤 재지 않고 달려드는 상황과는 다르다. 관계자들은 곧 허물어질 수많은 모래성을 양산했던 벤처 열풍의 재탕이 되지 않을까 우려하는 것이다. 미국의 복합 엔터테인먼트 기업들에서 정말 배워야 할 것은 지나치고 배우지 말아야 할 것만 배우는 건 아니냐는 우려는 괜히 걸어보는 딴지가 아니다.‘쓴맛’ 본 그룹들, 뭐가 문제였나유행만 따른 출발, 좌초할 수밖에지난해 10월25일 조선호텔에서는 아이엔터테인먼트그룹(I Entertainment Group) 설립 준비단이 개최하는 투자설명회가 열렸다. 행사는 화려했고 기자들을 비롯해 많은 인사들이 참석했다. 이들은 타임워너AOL, 비벤디&씨그램, 뉴스코퍼레이션 그룹 등 세계적인 기업을 거론하면서 한국의 복합 미디어 엔터테인먼트 그룹이 되겠다는 청사진을 내놓았다. 주최측은 “엔터테인먼트는 이제 거대한 자본과 치밀한 마케팅으로 무장한 첨단산업이며 이 첨단 산업을 이끌어갈 복합 미디어 그룹의 탄생을 이제 우리도 더 이상 미룰 수 없다”고 발표했었다.그러나 현재 이 기업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미처 시작하기도 전에 엎어진 것이다. 애초에는 ‘킬리만자로 엔터테인먼트’라는 외국 자본도 관심을 보였고 벤처 캐피털에서도 자금이 들어올 예정이었다. 당시 사업을 주도했던 ICG 김상우 사장은 “한국일보와 ICG가 주도해 투자자와 파트너를 모을 계획이었다”며 “2000년 하반기 벤처 자금이 마르면서 애초에 기대됐던 투자자를 구하기가 어려워 사업 추진이 정지됐고 사실상 무산됐다. 시기를 잘못 잡았다”고 말했다.그러나 김사장은 “지금 생각하니 홀딩 컴퍼니 모델의 유용성에 대해 회의적인 부분이 없지 않다”고 말했다. 이 밑에 모이려는 음반 영화 게임 등의 콘텐츠 생산자들은 여러 업종이 뭉쳐서 시너지 효과를 내겠다는 생각보다 ‘펀딩에 유리하게 이용할 수 있다’ 등 각각 동상이몽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또 우리나라 엔터테인먼트 업계 자체가 아직 전반적으로 신뢰를 기반으로 하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본다. 신뢰할만한 몇 안되는 파트너는 이미 대기업이 선점해버린 상태였다.아직 엔터테인먼트 콘텐츠 생산자들이 기업화가 안 돼 있어 잘못된 정보를 제공할 수 있고 그래서 투자자들에게 손해를 입힐 수 있다는 것도 그가 후에 깨닫게 된 점이었다. 온라인을 중심으로 오프라인을 통합, 엔터테인먼트 콘텐츠를 풍부하게 하겠다는 김사장의 계획은 이제 수정됐고 그는 이제 홀딩 컴퍼니를 통한 통합보다 제휴가 더 현실적인 모델이라고 생각한다. 많은 시간과 노력, 비용이라는 대가를 지불하고 교훈을 얻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