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지니어들 취업 상대적으로 수월 … 업무 경험 익히고 새로운 일 도전 기회로 활용`
미국기업에 취업해서 미국에 오는 사람들은 아주 잘 풀린 경우에 속한다. 일단 회사의 재정보증으로 취업비자를 확실하게 받을 수 있어 신분이 안정된다.또 미국 이주후 학력이나 한국내 직업과 무관하게 몸으로 때우는 일을 하는 대다수 이민자와 달리 이들은 한국에서 하던 일을 그대로 하면서 돈을 벌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언어능력이 크게 중요하지 않은 엔지니어들은 미국 취업이 상대적으로 수월해 한국을 떠나고 있다.미국 정부 취업 이주에 가장 호의적취업이주는 미국정부가 가장 호의적으로 생각하는 이민형태다. 미국 신경제의 성장엔진인 IT기업들이 몰려있는 실리콘밸리 인근 샌호제이이민국(INS)사무소는 그래서 미국의 다른 이민국과 달리 대단히 친절한 곳으로 꼽힌다. 기업이 원하는 상대적으로 저렴한(미국인보다) 인건비의 양질의 외국인노동력을 차질없이 공급해주는 역할이 부여돼 있기 때문이다.미국 IT기업에 취업한 문성원씨.그러다 보니 일부 기업에서는 ‘그린카드’로 불리는 영주권 신청시 스폰서를 빌미로 양질의 인력을 상대적 저임금에 계속 잡아두는 경우도 있다. 외국인노동자들이 취업비자인 H비자 대신 영주권을 얻으면 더 나은 조건의 회사로 옮기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샌호제이에서 네트워크관련업체인 네트스케일러(NetScaler)사의 선임하드웨어엔지니어로 일하는 문성원씨는 99년에 실리콘밸리로 왔다. LG전자 책임연구원이었던 그는 4개 전자회사와 몇 개 대학이 공동으로 진행하던 인텔리전트PCTV개발 국책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었다. 97년말 경제상황이 나빠지자 프로젝트가 중단됐다. 당장 돈되는 것 이외에 대다수 R&D가 중단되는 분위기였다.초기작업부터 참여해온 그로서는 한참 연구에 박차를 가해야 할 시점에 능력 발휘 기회를 박탈당하자 엔지니어로서 좌절하지 않을 수 없었다.기술인력관리 부족 … 한국기업 떠나마침 미국의 네트워크회사에서 일하던 친구가 함께 일하자고 연락이 왔다. 그래서 짐을 쌌다. 물론 “전자공학도로서 실리콘밸리에 대한 동경도 작용했을 것”이라고 그는 토로한다. 당시 입사한 회사는 지난 해 그만두고 네트스케일러로 옮겼다.문씨는 한국 대기업 대다수가 기술인력에 대한 관리가 부족하다는 것을 느껴왔다. 연구원들에게 사무용품 절감방안을 요구하는 등 자리가 올라갈수록 본업 이외의 관리업무가 늘고 자기발전의 기회는 점점 줄어든다는 것. 그래서 한국의 기술자는 갈수록 기술력이 떨어지고 관리자화하는 반면 미국기술자들은 올라갈수록 기술력이 높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최근 뉴스위크지가 실리콘밸리를 제치고 ‘차세대산업도시’의 하나로 꼽은 샌디에이고에도 최근 한국인 취업이민자들이 늘었다. 이곳은 전통적으로 의학 및 생명공학관련 연구소와 기관이 밀집해 있다. 그래서 생명공학산업과 퀄컴의 본사로서 무선통신산업의 본거지로 발전하고 있는 곳이다.샌디에이고에 한국인 취업이민자 늘어스페인어로 ‘보석’이라는 뜻의 라호야(La Jolla)지역은 샌디에이고에서도 태평양 해안가에 인접해 가장 주거환경 및 사무실환경이 좋은 곳으로 꼽힌다.임대료가 비싸기로 소문난 이곳의 오피스타운에 사무실을 갖고 있는 무선통신관련회사 넥시안(Nexian)에 지난해 한국인 엔지니어들이 대거 들어왔다. 이 회사는 휴대용 GPS시스템을 만든다.지난 해 5월 이곳에 합류한 이치영(37)사업개발담당 부사장은 넥시안을 창업한 한국인 정한우 박사의 권유로 이곳에 왔다. SK텔레콤에서 13년동안 근무했는데 “나이 40세를 앞두고 뭔가 새로운 일을 시작하고 싶고 미국에서의 업무경험을 익히고 싶어 한국을 떠났다”고 말했다. 정서적으로 한국회사가 그리울 때도 있지만 가족이나 아이들을 위해서도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한다.이 회사 김용덕 부사장은 93년 대우통신 주재원으로 왔다가 회사가 폐쇄되면서 미국 회사에 취업했다가 지난해 넥시안에 합류했다. 역시 엔지니어인 그는 한국기업내에서는 올라갈수록 엔지니어의 할 일이 줄어들고 경영에서 비핵심인력으로 대우받는 현실이 싫어서 미국회사에 취업하고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영주권도 신청했다.그러나 그 역시 미국내 생활기반이 안정됐기 때문에 미국을 선택한 것이며 단순히 ‘한국기업이 싫다’는 이유로 한국을 떠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토로한다.돌아온 사례 / 정종태 ‘이노와이어리스’ 대표동양인 한계 실감 … 한국으로 U턴미국에서 벤처회사를 창업, 성공적으로 키워놓고도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사람도 있다. 많지는 않지만.이동통신분야 엔지니어들이 사용하는 시험장비를 생산하는 벤처기업 ‘이노와이어리스’ 정종태(38)대표가 여기에 속한다. 대학원에서 전자공학을 전공한 그는 88년부터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의 연구원으로 일했다. 이곳에서 이동통신시스템 개발을 했고 94년부터 신세기통신에서 일을 했다. 97년 당시 퀄컴의 한국지사장으로부터 미국에서 같이 회사를 만들자는 제의를 받았다. 그래서 97년 11월 이동통신산업의 중심지 샌디에이고로 가족과 함께 떠났다. 한국에서도 벤처붐이 일기 전이었을 때여서 그야말로 모험이었다.정씨가 설립에 참여한 N사는 당시 미국의 벤처캐피털과 지멘스, 한국의 한 기업체로부터 몇천만달러를 펀딩받고 1∼2년만에 직원 2백50명 규모로 커졌다. 전화기에 PDA를 결합한 개념의 제품을 생산, 좋은 평가도 받았다. 미국 회사이지만 한국인이 주도적으로 설립한 벤처로 샌디에이고 지역에서는 꽤 성공적인 기업이었다.그러나 지난 해 가을 귀국을 결심했다.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소식이 실마리가 됐다. 갑자기 ‘부모를 떠나 나 혼자 무슨 부귀영화 누리겠다고’하는 생각이 든 것. 그러나 단지 그것만은 아니었다.회사설립자중 하나였던 정씨는 통상 외국회사에 취업한 한국인들과 달리 고위직에까지 올라갔다. 그럼에도 미국기업에서 동양인이 넘기 힘든 ‘유리천장’은 엄연히 존재했다.정씨는 “한국인이 세운 회사라도 미국에서 비즈니스하다 보면 백인이 전면에 나서게 됐다”고 말한다. 또 같은 직위에 있어도 백인 경영진이 ‘No’라고 말하면 어려운 것이 현실이었다. 엔지니어의 경우 중간관리자급 이하에서는 영어를 못해도 상관없지만 미국인을 관리하는 위치가 되면 유창한 영어도 절실했다. 게다가 “한국에서 한국인 관리하는 것과 미국에서 미국인 관리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3년간 미국에서 고생해 만들어놓은 회사를 포기하기는 싫었지만 ‘꿈을 펼치는데 한계가 있다’고 느껴지자 귀국이 망설여지지 않았다. 아내와 아이도 순순히 응했다. 그래서 지난해 9월 온 가족이 한국땅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는 미국에서 느꼈던 아쉬움을 밑거름으로 지금 한국땅에서 새로운 벤처기업을 일구고 있다.©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