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상 업그레이드, 외식업체,대형식품업체 신상품 개발 활발...고감도 마케팅 전략 개발 시급

도쿄 신주쿠 한국식품 전문점 "장터"의 김근희 사장.“10년 전만 해도 평일에는 되도록 김치를 먹지 않는다는 것이 주재원들에게는 불문율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일본인들이 김치를 한국 사람보다 더 좋아하는 것 같더라고요. ”일본 근무가 두 번째인 무역업체 A사의 B지사장(49). 과장 시절 도쿄에서 3년을 살다 귀국한 후 7년 만인 99년에 다시 일본으로 건너온 그는 판이하게 달라진 일본 풍경에 한동안 눈을 의심해야 했다.냄새를 풍기면 일본인들과의 비즈니스에 좋을 것이 없다 해서 한국인 주재원들 사이에서도 은근히 푸대접을 받았던 김치가 어느새 인기 먹거리로 변신해 있었던 것이다.그가 깜짝 놀란 것은 무리가 아니었다. 한국 식당이 크게 늘어난 것은 물론 김치 이야기만 나오면 ‘기무치 오이시이(맛있다는 뜻의 일본어)~’ 라는 찬사를 늘어 놓으며 손가락을 추켜 세우는 일본인들을 수없이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오사카에서 가장 콧대 높기로 소문난 데이코쿠 호텔이 지난해 여름부터 김치와 야키니쿠를 레스토랑의 정식 메뉴로 내놓고 있습니다. 한국 먹거리에 대한 일본인들의 관심과 열기, 그리고 김치의 높아진 이미지를 이 이상 더 리얼하게 보여주는 것이 어디 있습니까. ”“김치 맛보러 한국가고 싶다” 희망자 줄줄이일본에 거주한지 40년이 넘었다는 오사카 칸사이흥은조합의 이정림 전이사장이 들려주는 이야기 속에는 김치가 일본 먹거리 시장에서 차지하는 현주소가 그대로 드러나 있다.굳이 두 사람의 말을 빌지 않더라도 일본 열도에서 최근 가장 화제가 되고 있는 음식중 하나는 김치다. 김치를 먹을 수 있는 한국 음식점은 일본인들로 거의 언제나 붐비고 TV 라디오에서는 김치를 이용한 요리법 소개 정보가 하루가 멀다하고 쏟아져 나온다. 10, 20대 젊은 여성들 사이에서는 본바닥 김치를 먹어 보기 위해서라도 꼭 한국을 가보고 싶다는 희망자들이 줄을 잇고 있다. 인기 연예인을 등장시켜 한국의 김치 만드는 현장을 보여주는 프로그램은 하도 눈에 익어 별로 시선을 끌지 못할 정도다.외식업체들은 외식업체들대로 김치를 앞세운 신메뉴 개발에 목을 걸고 있다. 김치 라면은 물론이요 김치 피자, 김치 햄버거를 미끼상품으로 내놓는 업소들이 하루가 다르게 늘어나고 있다. 가공식품을 만드는 식품회사들도 예외가 아니다. 김치와 한국풍 메뉴를 내세우지 않으면 아예 시장에 먹혀 들어가길 기대할 수 없다는 듯 새로 투입하는 신제품마다 ‘한국’ ‘김치’ ‘찌개’ ‘국밥’ 등의 단어를 갖다 붙이고 있다.니치레이, 유키지루시, 아지노모토 등 내로라 하는 대형 식품업체들이 판매중인 한국풍 인스턴트 식품은 수십종을 넘고 있다. 식품 업체 전문가들은 이들 한국풍 인스턴트 식품의 열풍이 닭갈비로까지 확산됐지만 인기의 뿌리는 무엇보다 김치에서 출발한다고 지적하고 있다.가격으로 쳐도 김치가 일본에서 받는 대접은 서구식 음식들에 비해 뒤지지 않는다. 김치를 공짜로 내놓는 음식점은 손가락에 꼽을 정도다. 몇 젓가락 집고 나면 바닥을 드러낼 분량이라도 최소 1접시에 4백~5백엔은 줘야 한다. 식품점에서 팔리는 포장 김치에도 1㎏에 1천엔 정도의 가격표가 붙어 있다. 일본 샐러리맨들의 점심 식사 한끼 비용이 대략 7백~8백엔씩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김치는 부담없이 즐길 수 있는 음식이 아니다.그런데도 일본 사회에서는 이제 김치에 빠져 들고 스스럼 없이 즐기며 김치 만드는 법을 배우려고 이곳 저곳을 기웃거리는 일본인들이 급속도로 늘고 있다.“일요일과 공휴일 손님의 절반은 일본인이라고 봐도 틀림없을 겁니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중 상당수가 김치를 사러 오는 고객이고요. ”도쿄 신주쿠에서 대형 한국식품 전문점 ‘장터’를 운영하는 김근희 사장은 일본 TV와 신문 잡지들이 장터 관련 기사를 하도 많이 다뤄준 덕에 자신도 모르게 유명 인사가 돼버렸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자신이 식품사업을 하게 된 동기도 상당부분 김치와 관련이 있다고 털어놓고 있다. 한국과 한국인을 얕보던 일본인 상인 한명이 김치 맛을 한번 본 후 열렬한 한국팬이 된 것을 보면서 먹거리가 국경과 인종을 초월한 문화사절이 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는 것이다.도쿄의 비즈니스맨과 전문가들은 김치 붐이 급속도로 확산된 시점을 지난 98년 이후로 잡고 있다. 우선 한국 정부가 외환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일본인 관광객 유치에 총력을 쏟는 한편 김치의 맛과 우수성을 알리는 데 발벗고 나선 것이 좋은 효과를 냈다는 지적이다. 대통령까지 출연한 광고를 일본 시장에 집중적으로 내보내면서 국가 이미지를 바꾸려 노력한 전략이 일본 정부와 국민들의 마음을 움직였다고 이들은 보고 있다.일본업체 반격, 자존심 지킬 대책 마련해야김치의 우수성을 알고 있으면서도 드러내 놓고 김치를 좋아한다고 말하기 어려웠던 일본인들에게는 이같은 변화가 속마음을 털어 놓을 수 있는 기회로 이어졌음이 분명하다.또 시장 확대의 호기를 맞은 한국 업체들이 신규 판로개척을 위해 광고홍보 활동과 품질개선에 적극 나섰던 것도 김치 붐을 고조시킨 원인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그러나 한국업체들은 일본 김치 시장이 사상 유례없이 급팽창한 시점에서 호황보다는 오히려 내일을 걱정해야 할 위기를 맞고 있다. 김치 붐은 하루가 다르게 상승가도를 달리는 데 반해 한국산 김치는 일본 소비자들로부터 눈에 띄게 멀어져 가고 있기 때문이다.한국의 김치 대일 수출은 98년 1만5천2백29t, 99년 2만3천8백16t으로 각각 전년대비 35. 7%와 56. 4%의 가파른 증가세를 보였다. 89년까지만 해도 연간 수출량이 3천5백14t에 머물렀던 것과 비교하면 10년 사이 거의 7배 가까이 규모가 급팽창한 셈이다.하지만 2000년 수출은 2만2천2백61t으로 99년 대비 6. 5%가 줄었다. 더 심각한 현상은 올들어 나타나기 시작했다. 1~4월까지의 수출은 7천7백t으로 전년동기 대비 2. 6% 증가했지만 단가는 ㎏당 3. 04달러로 무려 13. 1%가 추락했다. 장사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실속을 챙기지 못하고 가격 인상은 커녕 받던 값도 지키지 못한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무역협회 도쿄지부는 이와 관련, “안 그래도 수출환경이 나빠지는 시점에서 한국업체들간의 과당경쟁이 제발을 찍은 결과”라며 근심을 감추지 않고 있다. 도쿄 지부는 현재 일본에서 팔리는 김치중 한국산 수출품의 시장 점유율은 99년의 8. 7%에서 올 1~3월에는 6. 2%로 2. 5%포인트나 낮아졌다고 밝히고 있다.일본 제조업체들이 한국풍 김치의 생산량을 늘린데다 품질개선 및 생산자동화를 통한 가격인하 등을 앞세워 한국 김치를 몰아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전문가들은 김치 열풍이 아무리 뜨겁게 달아 오른다고 해도 지금과 같은 상황이 계속된다면 김치업체들이 속빈 강정으로 전락할 우려가 크다고 걱정을 감추지 않고 있다.“전시회라고 가 보면 참가업체들의 제품이 천편일률적입니다. 배추 김치에서 고들빼기까지 종류도 포장도 비슷합니다. 직원들의 복장도 한결 같이 한복이고요. … 정말이지 발상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지난해에는 한국김치에서 배추벌레가 나왔다고 일본 매스컴이 떠들어대 제품 이미지도 나빠진 상태 아닙니까….”십수년간 일본 비즈니스 최전선을 뛰면서 성공한 기업인의 선두주자로 꼽히는 K사장은 “한국업체들이 본바닥 김치라는 자존심만 믿고 있을 때가 아니다”고 지적했다. 이와 함께 “일본 소비자들의 입에 맞는 제품, 마음을 움직이는 고감도 마케팅으로 새 출발하지 않는 한 김치 한국의 명예마저 흔들릴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그는 비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