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 위기 전만 하더라도 금리와 통화량에 의한 금융정책의 효과성에 대해서 크게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IMF 이후 금융정책의 효과성에 의문이 제기되기 시작했다.과거에는 금융정책을 논의할 때 금리 수준이나 통화량 또는 유동성수준이 실물경제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지만 지금은 한국은행의 콜금리 조정이나 통화안정증권의 조절 등에 대한 관심은 크게 줄어든 반면에 은행과 예금보험공사간에 체결된 경영정상화계획 이행약정(MOU)의 내용과 IMF 이후 각종 금융회사들의 퇴출기준이 돼 버린 BIS 자기자본비율이 더 큰 관심사가 됐으며 실질적으로 금융시장을 움직이는 변수가 됐다.예금지급준비율의 변동이나 콜금리의 조정 또는 한국은행이 공급하는 본원통화의 조절 등 전통적인 통화정책수단들은 이제 더 이상 과거와 같은 위력을 발휘하기는 어렵게 됐다. 오히려 BIS 비율에 관계되는, 이를 테면 지난 99년말 신자산건전성 분류기준(FLC)의 도입과 같은 ‘금융감독정책’이 오히려 금융회사의 대출이나 여신활동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치게 됐다.당시 FLC의 도입으로 은행의 부실채권이 약 15조원 증가하게 됐는데 만일 대손충당금을 이에 상응하는 만큼 충분히 적립하도록 했다면(실제로는 그렇지 못하였지만), 그리고 공적자금 투입에 의한 은행 재무구조의 보완이 없었다면(실제로는 은행에 대해서 21조원의 증자지원이 있었지만) BIS 비율을 일정수준으로 유지하기 위해서 수십조원 규모의 여신을 회수 내지는 억제하려고 했을 것이다.이에 비하면 예금지급준비율이나 콜금리의 조정 또는 통화안정증권 발행 등을 통한 은행 여신에 대한 영향력은 그야말로 초라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금융회사들의 입장에서 볼 때 BIS 비율이나 MOU 달성여부는 생존의 문제이지 선택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그 만큼 그 위력은 절대적이다.실물경제에 대한 파급 효과면에서 볼때 금리나 통화량 보다는 금융회사들의 BIS 비율과 MOU가 더 중요하게 됐다.한 마디로 금융회사들의 BIS 비율이나 예금보험공사와의 MOU의 내용이 한국은행이 발표하는 콜금리의 수준이나 한국은행의 유동성 조절 수단보다 더 실질적이며 은행뿐만 아니라 제2 금융권까지를 포괄하는 광범위한 금융지표가 되고 있다는 점이다.게다가 최근 들어서는 금리가 아무리 내려가도 기업의 설비투자는 늘지 않고 있는 등 실제적으로 금리 정책에 의한 거시경제 조절의 효과성에도 한계가 드러나고 있다.유동성 공급에 대한 한국은행의 정책개입도 주식시장 부동산시장 채권시장 등 자산시장간의 ‘유동성 순환’에만 영향을 줄 뿐 근본적인 거시경제 조절 기능은 크게 약화되고 있다.전통적인 금융이론에 의하면 금융정책은 금리나 통화량에 대한 변화를 통해 실물경제에 영향을 미친다고 하는 데 최근 우리나라의 경우 이런 통화정책의 ‘파급 경로’에 중대한 변화가 발생한 것이다.금리나 통화량보다 더욱 중요해진 것은 환율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실제로 금융시장의 지역간 통합이라고 하는 의미에서 이른바 금융시장의 단일화 추세가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서 금융정책의 독자성은 점차 상실되고 있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결국 최종적인 국내외 금융시장의 조정은 환율을 통해서 나타나게 될 것이다.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금융회사들의 부실채권 문제가 심각한 상태에 있어서 BIS 비율의 유지가 생존의 문제로 인식되고 있는 일본의 경우 과거 10여년간 통화정책의 효과성이 크게 위축되고 있으며 아울러 금리 변화에 의한 거시경제 지표의 조절 기능이 마비되고 있다는 점에서 이른바 ‘유동성 함정’(Liquidity Trap) 에 관한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우리나라는 일본과는 사정이 달라서 부실채권의 정리가 상당수준 진행이 됐고 경제사정도 상이하기 때문에 그런 유동성 함정에는 빠져들 우려가 적다는 주장도 있다.물론 유동성 함정에 빠져든다고 하는 극한적인 상황이 발생할 가능성을 부정한다고 하더라도 금리나 통화량을 통한 거시경제의 조절기능이 과거의 실적에 비해서 급속히 하락하고 있다. 또한 한국은행이 갖고 있는 전통적인 통화정책 수단들만 가지고는 금융회사들의 여신활동에 미치는 영향력이 점차 위축될 것이라는 우려는 여전히 남아 있다.이런 상황은 MOU가 계속 존재하는 한, 부실채권의 위협이 해소되지 않는 한, 그리고 금융회사들이 누적 적자를 해소하고 자력으로 주식시장을 통해 필요한 자본을 확충할 능력을 갖추기 전까지는 계속될 것이다.따라서 당분간 금융정책과 금융감독정책이 따로 따로 놀아서는 안 될 것이며 관련 당국간의 긴밀한 협의를 통해서 금융정책의 유효성을 높여 나가야 한다. 그리고 관심의 주대상은 금리나 통화량 보다는 환율의 변동에 둬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