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직원들은 그를 ‘사장’ 또는 ‘대표’라고 말한다. 영화제에서 그를 만난 사람은 ‘정 위원’이라고 부른다. 강의실에서 그를 본 사람들은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붙인다. 그의 외국인 친구들은 ‘테썽 정’이라고 발음한다. 때로는 ‘정 프로듀서’가 되기도 한다. 정작 본인은 그냥 ‘정태성 씨’라고 불리길 바란다.이 사람의 정체는 뭘까. 2000년까지 사람들은 그를 영화사 ‘백두대간’의 정 이사라고 기억했다. 하지만 백두대간을 나와 프리랜서가 된 이후 그의 행보는 그야말로 종횡무진이다. 부산국제영화제 PPP의 수석운영위원으로, 국립예술학교 영상원 객원교수로, 영어채널 아리랑 TV 프로그램 패널로, 애니메이션 <마리이야기 designtimesp=21866> 등의 프로듀서로 활동했다. 급기야는 자신의 영화 제작회사도 차렸다.2001년에 정태성은 이렇게 다양한 타이틀로 모습을 드러냈지만, 영화를 사들여 국내 시장에 풀고 마케팅을 하던 백두대간 시절이나 부산국제영화제 PPP 등을 보더라도 그동안 그의 재능은‘영화 비즈니스’쪽에서 빛났다. 그가 손댄 사업은 전례가 없는 첫 시도가 대부분이었고, 그런만큼 감수해야 할 위험이 컸는데도 모두 성공했다.그가 공동창업자인 영화사 백두대간은 ‘시작은 미미하였으나’ 이젠 국내 영화산업사에서 한자리를 차지하는 이름이다. 첫 작품인 <천국보다 낯선 designtimesp=21870>을 시작으로 약 2년간 매달 개봉하는 영화마다 전회 매진을 기록하는 등, 예술영화도 상품으로서의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증명해 보였다.총 책임을 맡았던 ‘예술영화 전용관’ 동숭아트극장은 좌석이 230석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한 해 동안 무려 20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예술영화 하면 무조건 망할 것’이라는 선입견으로 아무도 시도하려 하지 않았던 틈새시장의 가능성을 포착했던 것. 시대 분위기도 잘 맞아떨어졌다. “지금 생각해 보면 돈이 안 된다는 예술영화였기 때문에 오히려 더 철저한 비즈니스 마인드로 일했던 것 같아요.” 국내 관객의 수준과 성향을 고려해 어떤 영화를 구매해야 하는지부터 신중히 결정하고, 싼 가격으로 영화를 구매하기 위해 철저히 협상했다는 뜻이다. 작은 극장에서 장기 상영을 하는 전략을 택한 게 적중하기도 했다. “큰 돈을 버는 것은 애초 목표가 아니었지만 손해 보지 않도록 매 영화마다 아주 철저히 손익계산을 해야 했어요. 한 편의 실패가 곧 회사의 운명과 직결될 수 있는 상황이었으니까요.”부산PPP를 맡아 전세계를 돌면서 각지의 감독, 제작자, 투자자, 배급자 등과 만나 구축한 국제 네트워크는 정태성 사장의 가장 큰 자산이다. 한국 영화계에서는 ‘영화 국제 비즈니스에 관해서라면 정태성에게 물어보라’고 통할 정도로 인정받는다.“21세기 유망 산업인 ‘영화 콘텐츠 산업’을 어깨에 짊어진 산업역군이라고, 새마을운동 분위기로 소개할까요?”라는 실없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아주 진지하게 되받았다.“저마다 역할을 맡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영화 산업을 움직이고 있습니다. 하나하나 모두 영역이 다르죠. 차이라면 산업 내에 미치는 영향력의 크기 정도일 겁니다. 영향력이 적지 않다는 의미에서 ‘산업역군’이라고 해도 억지는 아니군요. 하지만 별로 재미있게 들리지는 않아서 싫네요.”일도 놀이처럼, 재미없으면 안해로스쿨에 진학해서 소수민족의 권익을 위해 싸우는 변호사가 되겠다는 꿈을 갖고 있던 한 유학생은 어떻게 영화와 인연을 맺게 되었을까. “재미있어서요. 재미없으면 안 하거든요. 그게 제 철학이에요.” 서울에선 볼 수 없는 미성년자 관람불가 영화를 보려고 인천이나 수원으로 ‘출장’을 마다 않는 어린시절을 보내고, 스무 살 때 미국 UCLA로 유학을 갔다.여기서 당시 영화를 공부하고 있던 이광모 감독을 만났다. 대학을 마치고 중국 베이징 대학원에 진학했다가 미국으로 돌아와 취직했다. LA재해대책위원회였는데, 처음에는 일이 많아 ‘재미있다가’ LA폭동이 정리되고 난 뒤에는 할 일이 없어 심심하기 짝이 없었다. 마침 ‘같이 예술영화를 배급하는 일을 해보자’는 이광모 감독의 제안을 계기로 한국으로 돌아왔다. 10년째에 접어드는 외국 생활이 지겹기도 했고, 일본인 여자친구(지금은 그의 아내)를 자주 볼 수 있는 게 기쁘기도 했다. “한마디로 아무 생각 없었던 거죠.” 제법 먼 길을 돌았지만 그의 영화 경력은 이때부터 시작됐다.정 사장은 영어뿐 아니라 스페인어, 중국어, 일본어 등 4개 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한다. “언어 배우는 데 소질이 좀 있었나 봐요. 모르는 걸 배우는 게 재미있어요. 대학시절에 ‘언제 써먹을지는 모르지만 일단 해두자’는 생각으로 꽤나 열심히 했지요.” 스무 살에 미국으로 유학을 간 터에 ‘생존의 문제’였던 영어는 배우지 않을 수 없었고, 베이징대 대학원에 진학했으니 또 중국어를 배워야 했다. 게다가 일본인 아내를 만나 일본어도 조금 하고, 대학시절 내내 식당에서 아르바이트하며 히스패닉 직원들과 일하다 보니 스페인어도 열심히 하게 되더라고. 늘 ‘재미’를 말하지만 그 뒤에는 철저한 노력이 뒤따랐다는 뜻으로 해석됐다.성공이라는 말의 의미를 되씹어 보게 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아내를 만난 지 10년째 됐는데, 한 해도 거르지 않고 함께 배낭여행을 갔습니다. 지난해에는 중국에 가서 20일 동안 삼국지에 나오는 지방을 찾아다녔지요. 올해는 어디로 갈까, 이게 저한테는 어떤 영화를 만들어야 하는가와 똑같이 중요한 고민이지요.”처음 백두대간을 ‘개업’하고 월급 60만 원을 받을 때나, 영화사가 잘 되고 경력이 다양해지면서 점차 경제적인 여유도 생긴데다 (일인 다역을 하는 지금은 대기업 부장 월급 이상은 번다고 했다) 꼭 해보고 싶었던 영화 제작에 전념할 채비를 갖추는 요즘이나, 한결같이 ‘놀이’하듯 재미있어서 일한다는 정태성 사장을 성공한 사람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