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맹자였는지 모르겠다. “자고로 성전(聖戰)이란 없다”고 말한 사람이….2,400년도 더 전에 진실을 갈파했다고 놀랄 것도 아니다. 맹자야말로 전쟁이라면 이골이 난 전국시대를 살았던 터다. 아이러니컬한 것은 피 흘리는 전쟁만큼 사람을 고양시키는 것도 없다는 점이다. 굳이 ‘게르만 순혈주의’ 이념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그리고 우스꽝스러운 십자군 전쟁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바로 얼마 전 서울에서 치러진 월드컵 전쟁만 보더라도 잘 알 수 있다. 적과 싸운다는 것은 사람을 뜨겁게 만들고 흥분시키며 하나의 ‘구호’ 밑에 모두의 얼을 빼놓는 집단 최면적 마력을 갖고 있다. 그리고 보면 붉은 악마 현상에 대해서도 과찬할 이유는 전혀 없다.그러나 전쟁은 언제나 전면에 내걸린 ‘이념’과는 다른 무엇인가를 동시에 갖고 있다. 맹자 시대조차 그랬는데 하물며 전쟁과 산업이 이토록 긴밀하게 연관된 현대에 들어서는 두말 할 나위 없다.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는 8년 임기를 마치고서야 ‘군사와 산업의 그토록 강고한 결합’, 즉 군산복합체(Military-Industrial Complex)에 대해 넌더리를 내게 됐다고 말했지만 그에 앞선 트루먼에게나 그를 뒤이은 케네디에게나 10년 전 ‘아버지 부시’에게 있어서도 전쟁은 언제나 치밀하게 계산된 경제적 선택의 하나였음이 분명했다.“국민 여러분, 방대한 군사조직과 거대한 군수산업 간의 결합은 미국인들이 전혀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현상입니다”라고 아이젠하워는 말했었다. 역시 이념과 명분은 차후의 문제일 뿐 치밀하게 계산된 경제적 동인이 전쟁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은 긴 설명이 필요 없다. 인류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명분이기도 했던 ‘노예해방’의 남북전쟁조차 북부의 산업자본과 남쪽의 농업자본이 서로 일꾼(남쪽은 노예ㆍ북쪽은 임금근로자)을 쟁탈하기 위해 벌였던 치열한 경제전쟁에 다름 아니었다.한국전쟁에 오면 사태는 하나의 비극으로 모습을 바꾸게 된다. 2차대전 이후 극심한 과잉생산에 직면한 미국도 그렇거니와 패망 일본에 있어 한국동란은 말 그대로 신의 축복이요, 가미가제(神風)였다. 확전일로로 치닫던 베트남 전쟁도 결코 비극의 범주를 벗어날 수는 없다. 아이젠하워 시절 내내 균형예산의 족쇄에 묶여 있던 미 정부는 케네디 대통령을 맞아 ‘때는 이때’라는 식으로 곧바로 확대(적자)재정으로 치달아갔다. 군수산업의 대대적인 증산이 추진되면서 극심한 경기침체는 화려한 부활의 날개를 폈고….1958년 -1.8%를 기록했던 GDP성장률은 62년에는 7%로, 통킹만 사건을 기화로 북폭이 개시된 64년에는 드디어 8.3%까지 치솟았다. 그러니 미국은 전쟁의 신으로부터 축복받은 나라라고 아니할 수 없다.21세기의 전쟁구조학 역시 다를 것이 없다. 실리콘밸리는 나스닥에 의해 뒷받침되는 것이 아니라 스탠퍼드대학에 의해 뒷받침되고, 스탠퍼드대학은 실리콘밸리와 더불어 첨단 군수산업의 강고한 하부구조로 편입되어 있다. 그러니 군산복합의 구조를 모른다면 나스닥의 그 화려한 부상을 이해할 수 없다. 실리콘밸리가 있고, 스탠퍼드가 있고, 나스닥이 있고서야 비로소 미국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모든 전기장치를 끈 채 조용히 밤하늘을 날아 오직 적외선만으로도 적진을 초토화시킬 수 있는’ 강력한 전자전 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었던 것이다.이 모든 것이 망울진 포도송이처럼 ‘전쟁’이라는 가지에 매달려 있다. 그러니 전자전은 산업의 결정체요, 현대문명의 가장 순수한 정화(精華)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제 이라크가 초토화될 차례다. 분명 ‘우리의 전쟁’은 아니다. 그러나 그 파장은 세계경제의 구성요소인 우리에게도 깊고 넓게 와닿을 것이 분명하다. 숨죽이며 이 전쟁을 지켜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