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는 진화의 결과지만 때로 창조의 산물이기도 하다. 오래된 옛 도시가 있는가 하면, 시대의 흐름에 따라 새롭게 창조되어 역사의 전면으로 부상하는 도시들도 많다. 도시들은 대립투쟁하기도 하고 지위를 다투며 치열한 경쟁을 벌이기도 한다.워싱턴과 뉴욕의 쟁패는 그 자체로 미국 경제의 패권을 웅변하고 있고 런던과 뉴욕, 홍콩과 싱가포르는 국가경제의 명운을 걸고 대립하고 있다. 피렌체와 베네치아의 항쟁은 르네상스의 운명을 결정지었고, 콘스탄티노플과 베네치아의 투쟁은 그 자체로 십자군전쟁을 초래할 정도였다.구도시와 신도시의 갈등은 신시대와 구시대, 그리고 신계급과 구계급의 갈등투쟁이기도 했다. ‘모스크바냐 쌍트뻬쩨르부르그냐’의 논쟁은 러시아의 정신사적 갈등구조까지 보여주고 있다. 러시아의 권력구조는 언제나 모스크바와 쌍트뻬쩨르부르그를 시계추처럼오갔었다.도시는 원래 그런 것이다. 살아 움직이고 대립투쟁하며 명멸하는 스스로의 운명을 갖고 태어난다. ‘남부 해안도시냐 북부 내륙도시냐’ 하는 문제는 지금 중국의 운명까지 가름할 태세다. 해안도시 점(點)으로부터 내륙 면(面)으로의 확대를 도모하는 데 실패한다면 중국 전체가 흔들릴 것이 뻔하다.선천을 내놓고 상하이를 열었을 때 중국은 세계경제의 전면에 나서기로 작정한 것이었다. 그것은 베이징이 아니었다. 오랜 역사의 도시보다 때로 엉뚱한 소도시들이 신시대의 실험장으로 떠오르기 마련이다. 한때는 조용한 바닷가 개펄이었던 곳이 대도시로 상전벽해(桑田碧海)되는 일은 그래서 일어나는 것이다.오직 변방이었기 때문에 모든 새로운 것들이 흘러와 담길 수 있는 것은 베네치아며 암스테르담이며 홍콩과 상하이가 모두 마찬가지였다. ‘만들어지는 도시’라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계획도시라는 호주의 캔버라가 대표적이라 하겠지만 오늘날의 선천과 상하이 푸동지구 등도 만들어지는 도시의 범주에 속한다.이 ‘만들어지는 도시’의 긴 명단에 지금 하구의 개펄과 다를 바 없는 조그만 국경도시 신의주가 추가되고 있는 모양이다. 과연 신의주는 북한이라는 폐쇄사회가 밖을 향해 열어놓는 창(窓)으로 성공할 것인가.불행히도 시도된다고 해서 언제나 성공하는 것은 아니라고 할 것이다. 한때 사람과 물자가 뽀얀 먼지를 날릴 정도였으되 다시 조용한 개펄로 돌아간 곳들도 한두 군데가 아니다. 상하이조차 자고나면 치솟는 초고층 빌딩들을 채우지 못해 이미 절반의 공동화(空洞化)가 진행 중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도시를 만들었으되 속내를 채우지 못하는 것은 양빈이라는 사업가가 선양에 만들었다는 허란춘(荷蘭村)이 대표적인 경우다.외형만 베낀다고 진정한 도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양빈의 허란춘은 벌써 놀이공원의 모델하우스 비슷하게 전락하고 있는 모양이지만 중국의 조그만 국경도시 단둥에 의지해 있는 정도라면 신의주는 개혁 실험 운운할 만한 규모도 되기 힘들 것이다. 급조된 허란춘 모델하우스 비슷한 싸구려 개발로 귀착될 가능성도 있다. 그것이라면 하룻저녁이면 합판으로 뚝딱 만들어 세울 수도 있고….18세기 캐더린 여제(女帝) 시절의 러시아에서 바로 이런 도시가 만들어진 적이 있다. 포템킨이라는 지방행정관은 여제의 순시를 앞두고 여제가 지나는 마찻길이 멀리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아름다운 가건물들로 보기에도 그럴듯한 시골마을을 급조해 만들었다.물론 사람이 살지 않는 무대장치였을 뿐이었다. ‘포템킨 빌리지’라는 지독한 말은 여기서 나왔다. 양빈을 앞장 세운 신의주의 출발 모양새가 적잖이 걱정스럽다. 또 하나의 포템킨 빌리지가 들어설 것 같은 불길한 예감마저 든다. 양빈이 중국 공안당국에 체포되었다니 출발부터가 무언가 잘못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