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경험없는 토종 컨설턴트… 향후 왕성한 저술활동으로 노하우 사회환원 꾀해

‘라인의 마술사 백대균을 아시나요.’ 서울 강남에 있는 백대균 월드인더스트리얼매니지먼트컨설팅 대표의 사무실에는 국내 굴지의 대기업 임원들과 중소기업 사장들이 수시로 드나든다. 그들은 한결같이 “한 번만 도와주십시오” 하고 매달린다. 이 초로의 신사가 도대체 어떤 능력을 가졌기에 ‘난다 긴다 하는’ 기업들이 그를 잡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것일까.그를 아는 일반인들은 별로 없다. 하기는 그가 언론에 노출된 적이 없으니 당연한 일이다. 물론 그는 자신의 활동을 외부에 노출하지 않는다. 생산혁신 활동을 실행하는 것은 해당 회사 임직원이기 때문이란다.하지만 업계에서 그의 소문은 파다하다. 소문만 들으면 무협지에 나오는 무술 고수 같다는 느낌이 들 정도다. ‘그가 다녀가면 죽은 공장도 살아난다’거나 ‘생산라인을 줄이는 데는 그를 따를 사람이 없다’는 등의 얘기가 떠도니 말이다.이처럼 업계에서 ‘라인의 마술사’로 통하는 백대표는 어떤 사람인가. 그는 흔히 ‘백선생’으로 불린다. 올해 59세인 그는 비교적 작은 키에 눈빛은 불을 내뿜듯 강렬하다. 행동하는 것도 자칫 ‘건방지다’는 오해를 받을 정도로 당당하다.그의 직업은 경영컨설턴트다. 주특기는 ‘생산합리화’다. 예전에 100ppm 같은 생산합리화 전략이 그의 머리에서 나왔다. 특히 그가 거쳐간 공장은 라인길이가 3분의 1이나 4분의 1로 줄어든다.가령 LG전자 창원공장의 전자레인지 1대 생산에 필요한 생산라인 길이가 240m에서 45m로 줄었다. LG패션 공장은 그가 다녀간 뒤 ‘홀쭉이’가 됐다. 부산공장과 양산공장이 통합된 것이다. 거기에 5층짜리 라인이 1층으로 짧아졌다. LG산전은 아예 공장이 4개에서 2개로 줄었다.그의 주무대는 LG그룹이다. 그렇지만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대우일렉트로닉스 등도 그의 ‘기막힌’ 성형수술 실력 덕을 톡톡히 봤다. 그럼 그는 왜 주무대를 LG로 삼았을까. 이를 이해하려면 그가 컨설턴트가 된 과정을 촘촘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한양대 산업공학과(63학번)를 나온 그는 70년 5월 현대자동차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일터는 울산이었다. 당시 현대자동차는 1, 2차 오일쇼크를 겪으면서 생산합리화 문제를 고민하고 있었다. 제휴관계였던 일본 미쓰비시자동차의 도움을 받아 각 현장마다 생산혁신을 본격적으로 진행한 것이다.생산팀에 근무했던 그는 미쓰비시 일본 공장 등을 견학하는 등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했다. 현장에서 우수한 실력을 발휘한 것은 물론이다. 캐나다 현지공장 설립에 참여한 것은 물론 연수원장을 맡기도 했다.그러던 중 S전자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다. 수락도 하기 전에 벌써 등기이사로 등재를 해놓는 등 온갖 정성을 보였다. 결국 S전자 이사로 옮겨 근무하던 중 ‘좀더 자유롭게 일하고 싶다’는 생각에 미련 없이 사표를 던졌다. 그때가 89년 10월이었다.그 무렵 백대표를 눈여겨보던 LG전자 관계자들이 뻔질나게 그를 찾았다. 드디어 그는 가방을 싸들고 창원으로 내려갔다. 그가 창원공장을 보고 느낀 첫 소감은 “마치 전쟁터에 온 것 같다”는 것. 정문을 들어서니 갖가지 자재들이 가득 쌓여 있고 공장라인은 거미줄처럼 엉켜 있었다. 1, 2층 생산라인과 복도에서 잔물건들이 발을 헤집고 다니기 힘들 정도로 널브러져 있었다.그는 전광석화처럼 손을 댔다. 사장에게 화장실청소를 시키고, 임원들에게는 아침마다 정문에서 직원들에게 인사하도록 해 혁신분위기를 만들었다. 개선학교도 만들어 전직원이 혁신활동에 동참하게 했다. 그로부터 13년의 세월이 흘렸다.LG전자 창원공장은 세계적인 공장으로 변모했다. 일본과 미국의 유수 기업들이 눈이 휘둥그레진 채 ‘따라 배우기’에 열중할 정도였다. 창원공장이 열등생에서 우등생으로 바뀌는 동안 LG그룹의 계열사들은 너도나도 백선생 모시기에 열중했다. 이러다 보니 그는 LG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인연을 맺게 된 것이다.그는 순수한 토종 컨설턴트다. 더군다나 해외유학이나 외국업체에서 일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그렇다고 세계적인 컨설팅업체에서 실무경험을 쌓은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국내 생산합리화의 독보적인 존재로 성장한 비결은 뭘까.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기본을 철저히 하는 것이다. 그의 사무실을 방문하면 쉽게 눈치챌 수 있다. 그는 월드인더스트리얼매니지먼트컨설팅사의 단 한 명뿐인 컨설턴트다. 하지만 그의 비서는 7명이다. 중국에도 2명이 파견돼 있다. 이들은 모두 그의 자료정리를 돕는 직원이다. 인쇄만 하면 책으로 나올 정도의 자료집이 1,200권이다. 대부분이 영어와 중국어로 번역돼 있다.이뿐만이 아니다. 그는 정보를 얻기 위해 수입의 과반수를 들여 국내외 거의 모든 신문과 잡지 등을 구독한다. 기업체 홍보실에서 자사와 관련된 기사를 스크랩하듯 그도 관련기사를 모아 책자를 만들 정도다. 여기에는 기사뿐만 아니라 만평과 그림도 따로 모은다. 이는 모두 교육자료에 이용된다.자료가 많아도 그의 시간과 그의 뇌 공간은 한계가 있지 않을까. 그렇지가 않다. 그는 컨설턴트로 독립한 뒤 3~4시간 이상을 자본 적이 없다. 보통 창원에 내려가면 일주일 이상 묵는다.하지만 그가 어디서 자고 먹는지 아는 사람이 없다. 현장에서 같이 일하는 직원들에게도 공개하지 않는다. 다음날 컨설팅에 대비해 술도 삼간다. 그 이유는 시간낭비를 막는 것은 물론이고 직원들에게 좋은 이미지를 심어주기 위해서다.하나 더. 그는 외국 이론에 의존하지 않는다. 외국기업의 성공사례는 허구라고 잘라 말한다. 그만큼 한국의 공장 실정과 문화를 우선시한다. 그는 “합리화는 패션이 아니다”고 주장한다. 유행하는 이론을 무조건 받아들여 적용하면 대부분 실패한다는 지적이다.리엔지니어링이 그렇고, 6시그마가 그렇다고 덧붙인다. 그런 그답게 (기전연구사 발간) 등 10여권의 전문서적을 저술했다. 앞으로도 1,200여권의 자료집을 토대로 방대한 저술활동을 계획하고 있다. 그간 모은 자료와 실전 노하우를 후세에게 남겨주는 것이 자신의 마지막 임무라는 판단에서다.그는 기업이 42억9,000가지의 요소로 이뤄져 있다고 설명했다. 따라서 고정된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물질’로 봐야 한다는 것. 때문에 한두 가지 기법으로는 경쟁력을 가질 수 없다고 한다. 또 합리화는 인간의 심리를 ‘묘하게’ 이용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사람은 모순성이 많아 되풀이되는 일에 불감증이 걸리기 쉽다는 것.일례로 어머니가 지저분해도 밥맛이 떨어지지 않는 것처럼 기업도 그럴 수 있다는 것. 이런 불감증을 치료하는 것이 자신의 임무라는 것. 이쯤 되면 서봉수가 ‘된장바둑’의 1인자로 불리듯이, ‘기업치료사’인 그는 ‘토종 컨설턴트’ 1인자로 불러도 괜찮을 듯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