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재, ‘미래 세대에게 책임 전가’ 위헌 결정…‘2045년 기후 중립’ 명시 등 강력한 정책 탄력

[ESG 리뷰] 유럽 ESG 최전선
헌법소원 청구인들은 독일에서 '프라이데이 포 퓨처' 환경운동을 주도한 독일 청년들이다.
헌법소원 청구인들은 독일에서 '프라이데이 포 퓨처' 환경운동을 주도한 독일 청년들이다.
독일 헌법재판소는 4월 29일 2030년까지 탄소 배출 절감 목표를 명시한 독일 기후보호법(Klimaschutzgesetz)이 일부 위헌이라는 결정을 내렸다. 2030년 이후의 목표와 계획이 없어 미래 세대에게 부담을 떠넘긴다고 판단했다. 법조계에서는 해당 결정이 ‘혁명적’이라고 보고 있고 관련 산업계도 예측 가능성과 안정성을 확보할 수 있어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독일 정부는 헌재 결정이 나오자마자 개정안을 내고 ‘2045년 기후 중립’을 공언했다. 유럽연합(EU)의 기후 보호 전략과 맞물려 독일의 기후 보호 정책이 더욱 가속화하고 있다.

독일 헌재, 기후 중립 과정도 지속 가능해야

독일 헌재의 결정은 한마디로 기후 중립에 이르는 과정도 ‘지속 가능’해야 한다는 뜻이다. 현 세대와 미래 세대가 공정하게 탄소 배출 감축 의무를 져야 하고 따라서 향후 10년까지의 대책만 명시된 법은 보다 먼 미래까지 내다봐야만 한다는 의미다.

2019년 12월 제정된 독일 기후보호법에 따르면 지구 온도 상승 폭을 산업화 이전 대비 2도 이내로 억제하려는 파리협정 달성을 위해 온실가스 배출을 점진적으로 감축해야 하며 2030년까지 탄소 배출량을 1990년 기준 55%까지 줄여야 한다. 에너지·산업·교통·건물·농업·폐기물 산업 및 기타 부문으로 나눠 2030년까지 단계별 감축 목표를 제시했다. 하지만 2030년부터 2050년 사이의 감축 계획이나 목표는 명시되지 않았다.

헌법 소원 청구인들은 독일에서 ‘프라이데이 포 퓨처(friday for future)’ 환경 운동을 주도한 루이자 노이바우어 씨 등 15세에서 32세까지의 독일 청년들이다. 이들은 현행 기후보호법이 기후 변화의 위험으로부터 후세대를 보호해야 할 의무를 다하지 못한다며 헌법 소원을 제기했다.

헌재는 “기후보호법 규정이 일부 아주 어린 나이인 청구인들의 자유권을 침해한다”며 “현 규정은 높은 탄소 배출 감소 부담을 불가역적으로 2030년 이후로 미루고 있다”고 지적했다. 현행법은 실질적인 감축 부담을 사실상 그 이후로 전가하고 있고 이는 결국 미래 세대의 삶을 제약하고 미래 세대의 자유를 잠재적으로 침해하는 것이라고 헌재는 판단했다.

헌재는 “2022년 12월 말까지 2030년 이후의 온실가스 감축 계획을 수립하라”고 명령했다. 추상적일 수 있는 미래 세대의 권리를 인정하고 기후 변화가 개인의 자유를 제약할 수 있다고 명확히 했다. 독일 로펌 헹겔러 뮬러의 에너지 분야 변호사 모리츠 라데마허 씨는 ‘한델스블라트’와의 인터뷰에서 “이번 결정은 독일 기후 보호정책의 근본적인 문제를 보여주고 있는데 기후 보호를 위한 정부의 실행 계획이 목표에 훨씬 못 미친다는 점”이라고 지적했다.

독일 정부는 헌재 결정 1주일 만인 5월 5일 기호보호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2030년까지 온실가스를 1990년 기준 65% 감축하고 2045년까지 기후 중립을 목표로 하는 게 주요 골자다. 에너지 다소비형 ‘재래식 산업’ 보호와 기후 보호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던 정치인들도 언제 그랬냐는 듯 강력한 기후 보호 정책을 촉구하고 나섰다.

사민당 소속의 스벤야 슐체 독일 환경부 장관은 “기후 변화가 경제를 뒤흔드는 게 아니라 우리가 경제를 재정비하고 현대화할 것”이라며 “재생에너지를 확대하고 자동차 에너지 소비 효율 등급에 투명성을 강화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그간 강력한 환경 정책에 제동을 걸어 왔던 정치인을 비판하기도 했다. 특히 기민당 출신의 페터 알트마이어 경제에너지부 장관이 탄소 비용 도입 등을 방해해 왔다면서 “경제부 장관의 연막 정책에 화가 났다, 기후 보호에 대한 악어의 눈물을 거둬야 할 것”이라고 일침했다. 독일 정당은 지금 9월 총선을 앞두고 새로운 총리 후보자를 내면서 기후 보호 전략을 최우선으로 정비하는 중이다. 적시에 나온 헌재 결정이 정치권에 추진력을 불어넣고 있다.

산업계 “장기적 전망과 투자 확대 기대”

산업계도 일단 환영하는 분위기다. 2050 탄소 중립 목표는 피할 수 없는 흐름이고 이런 상황에서 장기적이고 명확한 정책은 미래에 대한 예측 가능성을 높이고 관련 산업의 투자를 확대한다.

독일연방산업협회(BDI)는 헌재 결정 후 “정치권은 탄소 배출량을 줄이기 위해 2050년까지 투명하고 실현 가능한 기후 중립 계획을 제시해야 한다. 그래야 기업들이 신기술을 개발하고 대규모로 투자하는 데 확신을 가지고 명확한 계획을 세울 수 있다. 이는 산업계의 이익과도 직결된다”며 “산업계는 탈탄소 기술의 혁신과 빠른 시장화를 통해 향후 기후 보호와 (미래 세대의) 자유권을 결합하는 데 기여할 것”이라고 밝혔다.

독일연방에너지수자원경제협회(BDEW)도 “2050년까지 기후 중립으로 확실히 전환하기 위해 에너지 산업계는 신뢰할 만한 계획과 투자 여건이 필요하다. 헌재 판결은 파리협정에 따라 재생 가능한 에너지 개발, 수소 경제 구축, 기후 중립 모빌리티와 열 공급 등 분야에서 예측 가능한 장기적인 정책을 세울 수 있는 기회”라고 강조했다. 이어 “올바른 길을 찾는 게 이르면 이를수록 2030년과 2050년 사이의 부담을 더욱 줄일 수 있다. 정치권은 풍력 발전과 태양광 발전의 조속한 확대, 전기 사용자들의 부담 경감을 위한 재생에너지 부담금 개혁 등 추진력을 보태야 한다”며 재생에너지 확대 정책을 요구했다. 이처럼 헌재 결정으로 녹색 분야 기업들의 입지가 더욱 확고해졌고 정부의 녹색 전환 지원 정책도 확대될 것으로 기대된다.

독일이 이끄는 EU는 2050 탄소 중립이라는 목표를 추구하는 데 망설임이 없다. 동시에 역내 산업계를 보호하기 위한 ‘환경 레짐’을 만들기 위해 진력을 다하고 있다. EU는 3월 10일 탄소 국경 조정 메커니즘(CBAM : Carbon Border Adjustment Mechanism) 도입 결의문을 채택했다. EU는 온실가스 배출을 고려하지 않은 수입품이 EU 역내의 배출 감축 노력을 손상시킬 뿐만 아니라 역내 산업의 국제 경쟁력을 악화시킨다는 판단 아래 수입품의 탄소 배출 책임을 반영하는 CBAM을 부과할 예정이다. 초기에는 발전 부문과 에너지 집약 산업인 시멘트·철강·정유·제지·유리·화학 비료 등에 먼저 적용될 것으로 보인다.

독일 에너지 분야 싱크탱크인 아고라 에네르기벤데(Agora Energiewende)의 염광희 박사는 “정당하게 온실가스 배출 비용을 부과하는 EU 기업들을 온실가스 배출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는 역외의 저렴한 수입품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제도”라며 “수입품 제조 과정에서 발생하는 탄소 배출량에 대해 탄소국경세를 부과하고 수입 업자들은 수입품이 EU의 온실가스 배출 기준에 충족함을 입증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역내 기업을 보호하는 메커니즘은 역외 기업에는 ‘패널티’가 된다. 수출 주도의 경제 구조를 가진 한국이 결코 피해 갈 수 없는 규제다.

염 박사는 “이번 헌재 결정뿐만 아니라 EU 정책적으로도 기업들의 탈탄소화는 불가피한 일이다. 미국도 적극적으로 나서는 상황에서 기후 규제는 강화될 일만 남았지 약화되지는 않을 것이다. 한국도 빨리 대응하지 않으면 대미·대유럽 수출에서 가격 경쟁력을 잃을 수밖에 없다”고 경고했다. 염 박사는 하지만 한국 기업의 가능성을 평가하면서 탈탄소 기술 지원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기업이 기후 보호 레짐에 빨리 적응하고 학습하고 밸류 체인 전반에 온실가스 감축 기술을 도입해야 한다. 정부도 기업들이 탈탄소 기술을 선도적으로 도입할 수 있도록 ‘기후 보호 차액 지원 제도(Carbon Contracts for Difference)’와 같은 EU의 선진 지원 정책 등을 벤치마킹해 기업의 탈탄소화를 견인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유진 객원 기자 heyday1127@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