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영재 서스틴베스트 대표…“연기금이 금융 위기 최대 피해자...달라진 애셋 오너가 블랙록 변화 이끌어 내”

[ESG리뷰] 인터뷰
“ESG는 규제 아닌 시장 메커니즘, 자본 흐름 통해 변화 만들어”
지금의 환경·사회·지배구조(ESG) 투자 이전에 사회 책임 투자(SRI)가 있었다. 2000년대 초반 환경과 사회적 가치를 중시하는 기업에 투자하는 SRI는 기업이 처한 위기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으로서 금융 시장을 휩쓸었다. 그리고 다시 20여 년 만에 ESG 열풍이 일고 있다. 그때와 지금은 무엇이 다를까. 한국에 사회 책임 투자 개념을 적극적으로 들여오고 ESG 평가 모델을 개발해 시장의 변화를 이끌고 있는 서스틴베스트의 류영재 대표에게 물었다. 류 대표는 주식 호황기인 1988년 증권사에 입사한 후 10여 년간 증권업계를 누비다 2000년 영국 유학길에 올라 SRI와 ESG의 확산세를 목격했다. 이후 영국 리서치 기관 아이리스(EIRIS) 등의 모델을 벤치마킹해 2006년 서스틴베스트를 설립했다. 최근 ESG가 부상하기까지 15년간 시장의 변화를 현장에서 지켜봐 온 전문가다.

-ESG와 SRI의 관계는 무엇인가요.
“한마디로 SRI는 ESG를 고려해 투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용어가 바뀌었을까요. 여기에는 사회 책임에 대한 주류 투자자들의 거부 반응이 반영된 것이라고 봅니다. 사회 책임 투자보다 투자 수익을 극대화하는 게 수탁자로서 책임을 다하는 것이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됐죠. 6~7년 전부터 SRI에서 ‘사회’를 뺀 책임 투자(RI)라는 용어가 혼용됐습니다. 그러다가 2019년부터 ESG로 불리고 있습니다. 이름만 바뀌었을 뿐 SRI·RI·ESG는 거의 같은 개념이라고 보면 됩니다.”

-2000년대 초반 이후 거의 20년 만에 ESG가 다시 붐으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사회 책임 투자, 지속 가능 경영 등 용어도 ESG로 수렴되고 있습니다. 최근 ESG가 부상하게 된 가장 큰 동력은 무엇입니까.
“근인과 원인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먼저 원인으로는 기후 변화에 대한 논의가 있습니다. 거슬러 올라가면 1960년대 말 이후 로마클럽, 브룬트란트 보고서, 지속 가능 경영 개념이 등장했고 1990년대 초반 교토의정서를 거쳐 2015년 파리기후협약이 쭉 진행되면서 논의가 확산돼 왔죠. 전통적인 화석 연료 기반 경제에서 그린 에너지로의 전환 흐름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갑론을박이 금융 위기 이후 시장 만능주의에 대한 반성으로 이어졌습니다. 근인을 따져보면 ‘BBC(블랙록의 ‘B’, 조 바이든의 ‘B’, 코로나19의 ‘C’)’ 때문이라고 봅니다. 작년에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가 터지면서 기업들이 생존의 문제를 고민하게 됐습니다. ESG 투자가 퇴조할 것이라고 했는데 거꾸로 작년에 ESG 상장지수펀드(ETF) 시장은 거의 두 배 정도 성장했습니다. 인수 공통 감염병이 환경 파괴에서 왔다는 세계보건기구(WHO)의 보고서와 ‘미래의 감염병(Disease X)’에 대한 경고가 나왔죠. 래리 핑크 블랙록 회장의 서한은 너무 유명해진 이야기입니다. 바이든 행정부에서 블랙록 출신들이 요직을 차지하면서 골드만삭스의 시대(거버먼트 삭스)가 가고 블랙록의 시대(거버먼트 록)가 왔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블랙록에서 ESG 책임자였던 브라이언 디스를 백악관 국가경제위원회(NEC) 위원장에 앉힌 것은 글로벌 자본 시장에 메시지를 던진 것이라고 생각해요. 이렇게 외국에선 20년에 걸쳐 조금씩 발전해 온 개념입니다. 반면 한국에선 너무 조용했어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트리거가 돼 이제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됐습니다. 새로운 트렌드를 빨리 캐치업하는 게 또 우리의 저력이죠.”

-SRI가 많은 기대를 모았다가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습니다. 원인은 무엇이었고 그때와 지금은 어떤 차이가 있는지요.
“2006년 국민연금이 사회 책임 투자를 처음 시작했습니다. 이후 운용사들이 사회 책임 투자 펀드를 늘리면서 한차례 바람이 일었어요. 마침 공모 펀드 시장이 좋았던 때입니다. 그때는 국민연금의 사회 책임 투자 집행이 유행을 촉발한 계기가 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또 ISO-26000(사회적 책임 국제 기준), 지속가능발전법이 들어오면서 지속 가능 경영이나 사회적 책임에 대한 논의가 있었죠. 유럽·미국·일본에서의 ESG 발전 양상 및 경로와 한국의 맥락은 좀 다르게 봅니다. 블랙록의 핑크 회장이 ESG를 외치는 배경에는 진정성이 있을 수도 있지만 다른 의도가 더 크다고 봐요. 블랙록의 주요 고객들은 전 세계 연기금입니다. 그들은 금융 위기의 최대 피해자죠. 연기금과 같은 애셋 오너들은 단기 수익률을 추구한 점, 금융회사를 너무 수수방관한 점을 반성하죠. 그래서 스튜어드십 코드(기관투자가의 의결권 행사 지침)가 나왔고 ESG가 새로운 대안적 투자로 부상했습니다. 애셋 오너들이 달라지면서 블랙록도 ESG 투자자로서 포지셔닝을 바꾼 것이죠. 이와 같이 연기금들이 목소리를 높이면서 자산 운용사들에 트리클 다운되고 자산 운용사들은 또 기업에 트리클 다운된 게 ESG의 일반적인 확산 경로입니다. 반면 한국에선 국민연금이 그렇게 열심히 하는 것 같지는 않아요. 정확히 말하자면 국민연금 기금운용역들이 ESG에 대한 관심이 크지 않아요. 이해가 안 되는 바는 아닙니다. 쇼트 텀으로 수익률을 요구하는 문화가 있어서입니다. 운용 수익률이 0%대면 노후 자금이 다 고갈된다는 식의 언론 보도가 나오죠. ESG를 고려한다는 것은 적어도 5년 정도의 시간을 필요로 한다는 겁니다. 진정으로 ESG를 추진하려면 그들에게 장기 투자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주고 소신껏 할 수 있도록 해 줘야 합니다.”

-SRI나 ESG 펀드에서 항상 나오는 얘기가 수익률입니다. 수익률 논란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나요.
“단기적으로 보면 수익률이 좋지 않을 수 있습니다. 사람에 대한 교육 훈련, 연구·개발(R&D) 투자 등을 해야 합니다. 하지만 길게 본다면 저는 오히려 좋다고 생각해요. 탄소 배출량을 줄이려면 에너지를 효율화해야 합니다. 온실가스 인벤토리 구축 과정에서 에너지 누수 등이 파악되죠. 한국은 중후장대 산업이 많습니다. 탄소 집약도가 낮은 기업이 에너지 효율적일 가능성이 높고 에너지 효율적인 기업이 길게 보면 수익성이 개선되겠죠. 또 지금 혁신 경제로 가는데 결국 부가 가치 창출은 직원들의 아이디어나 역량에서 나옵니다. 특히 MZ세대(밀레니얼+Z세대)는 수평적인 조직 문화, 소통의 가치와 공정성·다양성·포용성과 같은 가치를 중시하죠. 서스틴베스트가 ESG 평가를 해보면 최근 5년 동안 상위 등급 기업들의 주가 궤적은 코스피지수를 아웃퍼폼해요. 또 모건스탠리캐피털인터내셔널(MSCI) 인덱스에서도 지난 14년 동안 ESG 선도 기업들이 평균 수익률을 웃도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 대표님이 쓴 책을 보면 ‘주주 가치가 아니라 기업 가치로 얘기해야 한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주주에도 스펙트럼이 있습니다. 오늘 주식을 사 오늘 파는 데이 트레이더도 있고 오너십을 가진 주주들도 있죠. 1970년도에 미국의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이 ‘법과 게임의 룰을 지키면서 이익을 극대화하는 게 기업의 목적이다’는 유명한 이야기를 해요. 저는 그것이 과도하게 투자자 사이에서 해석된 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투자자들의 주식 보유 기간이 점점 짧아졌어요. 기업이 빨리 수익을 내는 과정에서는 사람을 비용으로 보게 되죠. 교육 훈련이나 인건비는 가급적 낮게 측정할 것이고 협력 업체에는 정기적으로 코스트 리덕션(원가 인하)할 것이고 소비자에게는 제품 가격을 비싸게 받게 됩니다. 이것이 단기 주주 가치입니다. 기업의 주인은 주주이기 때문에 요구가 강해지면 기업이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어요. 엘리엇이나 핸슨신탁 같은 곳은 적대적으로 들어와 단기적으로 주가를 띄울 수 있는 경영 행태를 보일 수 있잖아요. 그래서 그런 것에 대해 부정적으로 보는 것입니다.”
“ESG는 규제 아닌 시장 메커니즘, 자본 흐름 통해 변화 만들어”
- 유럽에서는 전체 주식 시장에서 연기금이나 자산 운용사들의 기업들의 지분을 보유하는 비율이 높아지면서 변화의 큰 동인이 되는 측면이 있다고 이해했습니다. 한국은 어떻습니까.
“미국은 1980년대 401K(확정기여형 퇴직연금)가 나오면서 노동자들이 계속 주식을 사게 됐죠. 401K를 비롯한 기관투자가들의 전체 주식 시장에서의 보유 비율이 높아지는 거죠. 유럽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도 그 궤적을 따라가고 있다고 봅니다. 국민연금은 지금 900조원이에요. 불과 2년 전에는 650조원이었습니다. 4차 재정 추계에 따르면 2040년까지 1700조원이 됩니다. 또 고령화가 진행되면서 퇴직연금이 작년 말 220조원에 달합니다. 아직 유럽이나 미국 만큼의 비율은 아니지만 한국도 점점 높아지고 있죠.”

- 서스틴베스트가 ESG 평가 모델을 한국 최초로 만들었습니다. 어떤 방식으로 평가합니까.
“처음에는 설문지를 보냈습니다. 처음 130개 기업으로 시작했는데 회수율이 약 20%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설문지를 들여다보니 신뢰하지 못하겠어요. 너무 좋은 얘기만 써 있었죠. 그래서 공개적으로 취득할 수 있는 정보를 활용합니다. 세계적으도 SAM이나 CDP는 설문지를 보내지만 서스테이널리틱스와 MSCI는 공개된 데이터를 활용합니다. 공개적인 데이터가 의미 있는 것은 자기 규율 효과를 갖는다는 겁니다. 공개하지 않을 때보다 더 분발하게 되는 게 공개의 효과죠. 공개된 데이터만 가지고 평가하는 것 자체가 정보 공개를 유도하는 효과가 있는 셈입니다.”

- 평가가 너무 많고 같은 기업도 평가 기관에 따라 점수가 다르면서 표준화 이슈가 등장합니다.
“ESG 이슈는 워낙 넓고 다양합니다. 그래서 기업은 어디부터 어디까지 공개해야 하는지 감을 잡기 어렵습니다. 지금 K-ESG 얘기도 나오고 있죠. 기업이 ESG 정보를 공개할 수 있는 가이드라인을 제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컨대 미국은 직장 내 인종 문제가 중요하다면 우리는 양성 평등 문제가 더 심각하다고 봅니다. 환경에서도 유럽에서는 온실가스 문제를 피부로 느끼거든요. 그래서 그들은 각국에 기후 변화 대사도 파견하죠. 우리는 기후 변화도 중요하지만 국민이 체감할 때는 미세먼지·황사·대기오염이 더 피부로 느껴집니다. 한국의 상황에 맞으면서도 글로벌 스탠더드를 존중하는 공시 가이드라인이 필요합니다. 기업은 공시만 잘해 놓으면 평가 업체들에 일일이 대응하지 않아도 됩니다. 평가하는 업체가 가중치에 따라 상이한 결과를 내는 것은 당연한 거예요. 이것이 시장 메커니즘이죠. 그래서 등급은 얼마든지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 글로벌 시장에선 다른 평가 모델로 자금이 움직이는데 한국형 평가 모델은 어떤 의미가 있나요.
“외국의 투자자들도 가끔 우리에게 전화합니다. MSCI·서스테이널리틱스·비지오아이리스(Vigeo Eiris) 등이 한국 기업을 평가하는데 우리가 볼 때는 너무 수박 겉핥기식이고 잘못된 정보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한국의 독특한 재벌 시스템에서 발생하는 리스크 등을 볼 수 없어요. 저는 우리가 K-ESG 평가 모델을 만들고 외국 기업에 팔 수 있다고 봅니다.”

-큰 흐름에서 최근의 ESG 트렌드는 무엇입니까.
“과거 10년 전과 비교해 가장 크게 달라진 점은 이제 ESG가 자본 시장과 연계돼 민감도가 높아진 것입니다. 또 ‘기후 변화’가 아닌 ‘기후 위기’가 이슈화하면서 탄소 중립이 전 세계적인 화두가 됐습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보고서에 따르면 약 130조 달러 정도의 자금이 움직인다고 합니다. 거기에서 엄청난 기회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기회로 보는 기업도 나오는 것 같아요. 크게 보면 탄소 경제에서 그린으로 대표되는 ESG 경제로 자본주의가 이동하는 겁니다. 자본주의의 패러다임과 체질이 근본적으로 바뀌는 겁니다.”

- ESG 흐름에서 법적 규제가 아닌 정보 공개의 관점으로 접근하는 게 흥미롭습니다.
“ESG는 시장 메커니즘이에요. 규제 메커니즘이 아닙니다. 자본의 흐름을 통해 기업을 친환경·친사회적으로 견인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 올해 ESG 관련해 중요하게 보는 이슈가 있나요.
“2050년 넷제로도 있지만 2030년까지 제시한 목표에서 산업계의 첨예한 이해관계를 잘 조정해 내는 문제가 지속적으로 중요한 이슈가 될 것으로 봅니다. 이와 함께 저는 직장 내에서의 양성 평등이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또 MZ세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시간은 베이비부머가 아닌 MZ세대의 편이죠. 이와 함께 우리 사회에서 대·중소기업 간 공정 거래 문제를 풀어야 합니다. 모두 S의 문제죠. 여성, MZ세대, 중소기업…. 이들이 신명나게 일할 수 있는 기업 문화를 만들어야 그곳에서 혁신이 일어날 것입니다.”

대담 장승규 편집장, 정리 이현주 기자 chari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