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소국경세이어 공급망 실사 법제화 속도…해외 납품 기업 환경·인권 실태도 관리해야

[ESG 리뷰] 유럽 ESG 최전선
‘환경 레짐’ 주도권 쥔 EU…국제 통상 질서 새판 짠다
유럽연합(EU)의 환경 레짐(체제)이 가시화되고 있다. 2019년 12월 유럽 그린 딜 로드맵을 발표한 이후 국제 환경 레짐의 주도권을 쥐겠다는 EU의 목표가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EU의 탄소 국경 조정 메커니즘(CBAM : Carbon Border Adjustment Mechanism)은 3월 결의문 채택을 거쳐 오는 6월 법률안이 마련된다. EU 공급망 실사 제도 또한 올해 2분기까지 법률안 초안이 나온다. 이 두 가지는 EU와 거래하는 한국 기업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제도다. 아직 역내 기업만을 대상으로 하지만 지속 가능 공시 규정과 비재무 정보 보고 지침 등도 2023 회계연도부터 시행된다. EU가 만드는 환경 레짐에 발목 잡히지 않으려면 지금부터 대비해야 한다.

■ 유럽 그린 딜(European Green Deal)

EU는 2019년 12월 지속 가능한 EU 경제를 위한 로드맵, 즉 ‘유럽 그린 딜’을 발표했다. EU는 “기후 변화와 환경 파괴는 유럽과 세계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다. 현대적이고 자원 효율적이며 경쟁력 있는 경제로 성공적으로 전환하기 위해 새로운 성장 전략이 필요하다”며 “2050년까지 기후 중립을 이루고 자원 이용과 경제 성장을 분리하며 전환 과정에서 어떤 사람이나 지역도 뒤처지지 않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기후 중립을 이루기 위한 주요 의제로는 친환경 신기술에 대한 투자, 혁신 산업 지원, 친환경·비용 효율적이며 건강한 형태의 모빌리티, 에너지의 탈탄소화, 건물의 에너지 효율 증대, 국제적인 환경 표준을 위한 국제 협력이 제시됐다.

EU는 “모든 경제 부문이 적극적으로 기여해야 한다”며 “친환경 경제로 전환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든 이들에게 재정과 기술을 지원할 것이다. 특히 영향을 많이 받는 지역에는 2021년부터 2027년까지 최소 1000억 유로(약 138조원)가 동원될 것”이라고 밝혔다.

EU는 유럽 그린 딜 발표 이후 투자 계획, 유럽기후법, 신순환 경제 행동 계획, 생물 다양성 전략, 탄소 국경 조정 메커니즘 등을 잇달아 내놓았다. 가장 먼저 지난해 1월 유럽 그린 딜의 원활한 이행과 안정적 재원을 위한 유럽 그린 딜 투자 계획(EGDIP : European Green Deal Investment Plan)과 공정 전환 메커니즘(JIM : Just Transition Mechanism)을 발표했다.

유럽 그린 딜 투자 계획에 따르면 경제 전환을 위해 향후 10년간 최소 1조 유로(약 1380조2500억원)의 기금을 조성한다. EU 예산의 약 25%를 그린 딜 예산으로 사용할 계획이고 민간·공공 투자 유인을 위한 지속 가능 금융 시스템도 구축한다. JIM은 화석 연료 의존도가 높아 탈탄소 전환 이용이 큰 지역과 부문을 특별히 지원하는 제도다. 2027년까지 최소 1000억 유로가 투입된다. 구체적으로는 공정 전환 기금을 조성해 300억∼500억 유로 이상의 투자를 창출할 계획이고 인베스트(Invest)EU 프로그램으로 지속 가능 에너지나 운송 등 관련 분야에 최대 450억 유로를 투자한다. 유럽투자은행(EIB)의 공공 부문 융자 지원도 확대, 지역 난방과 건물 개조에 250억~300억 유로를 투자한다.
‘환경 레짐’ 주도권 쥔 EU…국제 통상 질서 새판 짠다
■ 유럽기후법(European Climate Law)

EU 집행위원회·유럽의회·각료이사회는 지난 3월 21일 유럽기후법에 대해 잠정 합의했다. 2030년까지 온실가스 감축 목표를 1990년 대비 최소 55% 감축하기로 했다. 이미 배출된 온실가스를 제거하는 것보다 온실가스 배출 감축을 더 우선시한다. 2040년 온실가스 감축 목표는 2023년 글로벌 이행 점검 이후 6개월 내에 제안한다. 2050년 이후에는 온실가스 배출 중립을 넘어 마이너스(negative emission)를 목표로 한다. 유럽기후법은 오는 6월 유럽의회와 각료이사회가 각각 승인하면 발효된다. 유럽기후법은 유럽 환경 레짐의 신호탄이다. 이후 탄소 제로를 향한 구체적인 규정이 담긴 입법안이 줄줄이 대기하고 있다.

■ 탄소 국경 조정 메커니즘(CBAM : Carbon Border Adjustment Mechanism)

유럽의회는 지난 3월 10일 수입품에 탄소 비용을 매기는 CBAM 도입 결의문을 채택했다. 유럽의회는 “EU에 수입되는 상품과 재화에서 배출되는 온실가스가 EU 온실가스 배출의 20% 이상을 차지하는 등 수입으로 인한 온실가스 배출이 EU 노력을 손상시키고 있다”며 “세계무역기구(WTO) 규율과 EU의 자유무역협정(FTA)과 부합한다는 전제로 도입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EU의 배출권 거래제(ETS)가 적용되는 제품을 수입하면 탄소 비용을 부과하고 부과 방식은 세금이나 ETS 형태가 될 수 있다. 초기에는 에너지 집약 산업(시멘트·철강·정유·제지·유리·화학·비료)에 적용된다. EU는 CBAM으로 거둬들인 수익을 다시 유럽 그린 딜 정책을 위해 사용할 예정이며 오염 산업에 위장된 형태의 보조금으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밝히고 있다.

CBAM 도입은 수입품의 탄소 배출에 ETS와 동등한 요금을 부과함으로써 EU 역내 생산자와 역외 생산자 간의 공정한 경쟁을 도모하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EU 기업의 이중 보호가 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되고 있다. CBAM 초안에는 온실가스 배출권 무상 할당을 점차적으로 없앤다는 내용이 있었는데 최종 결의문에서는 빠졌기 때문이다. 현지 언론에 따르면 관련 산업계의 강력한 로비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EU는 현재 시멘트와 철강 등 탄소 배출 위험이 높은 업계에 온실가스 배출권을 무상으로 할당하고 있다. 배출권 무상 할당과 CBAM이 동시에 이행된다면 EU 기업이 이중 보상을 받는 셈이다. 해당 결의문은 법적 구속력이 없는 만큼 EU 집행위원회가 최종안을 내놓을 때까지 관련 논의가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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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급망 실사 제도(Due Diligence)

기업 밸류 체인의 모든 행위자들에게 ESG 의무를 부과하는 공급망 실사 제도 도입도 가시화되고 있다. 유럽의회는 지난 1월 기후 변화 대응, 노동 및 인권 보호를 위해 기업의 공급망 실사를 의무화하는 입법 권고안을 채택했다. 기업 공급망 전 과정에서 환경 보호, 인권 침해 여부를 확인·보고·개선할 의무를 부여하며 리스크 발생 시 사실 관계와 대책 공개, 위반 시 벌금 부과 및 피해 보상 의무 등이 담겼다. EU 역외 공급망에서 발생한 리스크에 대해서도 EU 사법 기관에 제소할 수 있는 내용도 고려 중이다.

EU 집행위원회는 입법 권고안을 참고로 올 2분기 내 법률 초안을 제시할 계획이다. 공급망 실사 제도는 이미 영국·프랑스·네덜란드에서 시행 중이고 독일은 법안이 제출돼 현재 의회에서 심사 중이다.

독일 연방 정부는 “글로벌 공급망의 무역과 생산 과정에서 인권 침해가 계속되고 있다. 아동 노동, 착취 차별, 노동권 미준수 등이 포함된다. 불법 벌목, 살충제 방출, 수질·대기 오염과 같은 환경 파괴도 발생하고 있다”며 “독일 기업은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 이뤄진 노동으로 수익을 얻는다. 따라서 공급망 내에서도 인권을 존중해야 할 책임이 있다”고 법안 취지를 설명했다.

독일에서 법안이 상정되자마자 중국에서 공장을 운영 중인 독일 기업들이 타깃이 됐다. 독일 언론 ‘쥐드도이체차이퉁’은 5월 16일 공급망 실사 제도에 따라 “중국 위구르 지역의 독일 기업들이 철수해야 할 수도 있다”도 보도했다. 공급망 실사 제도가 실시되면 신장의 수용소 부근에 공장을 운영하면서 노동 착취 의혹을 받고 있는 독일 기업들이 벌금을 물거나 철수해야 할 상황이라는 것. 이 법은 사실상 중국 기업을 타깃으로 한다는 분석도 있었지만 중국 내에서 공장을 운영하는 자국 기업이 즉각적인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됐다. 독일 기업들은 공급망 실사 제도가 독일에서만 적용되면 자국 기업에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며 EU 차원의 도입을 촉구하고 있다.

결국 EU 규정도 얼마나 일찍 도입되는지의 문제이지 도입 여부는 논쟁의 대상이 아니다. 한국무역협회는 “EU 기업과 협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EU 역외 기업들도 공급망 실사 준수가 불가피하다”며 “공급망 내 기업이 비재무 정보 제공을 거부하면 공급망 선정에서 제외될 위험이 있어 비재무 정보를 공시하는 기업이 늘어날 것”이라고 전망했다. EU 지속 가능 공시 규정, 비재무 정보 보고 지침, 분류 체계 규정 등도 EU 내에서만 적용되지만 복합적인 공급망 속에서 EU 표준을 간과할 수 없다. EU의 환경 레짐이 한국과 전 세계 기업들의 공급망을 어떻게 바꿔 놓을지 주목된다.

이유진 객원 기자 heyday1127@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