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액 조회, 이체 등 전통 서비스로는 한계
보험 청구에서 택배까지 ‘생활 플랫폼’ 경쟁

[비즈니스 포커스]
사진=한국경제신문·연합뉴스·각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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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이 ‘생활 금융 플랫폼’으로 변신을 꾀한다. 계좌 잔액 조회와 이체 등 전통적인 금융 서비스 위주로 편성됐던 모바일 뱅킹 애플리케이션(앱)에 보험료 청구, 공과금 납입 등 각종 생활 금융 서비스 기능을 탑재하거나 별도 앱을 내놓고 있다. 이르면 하반기엔 중고차 직거래와 음식 주문 중개 등 생활 밀착형 서비스가 속속 나올 것으로 전망된다.

대부분이 ‘수익이 적거나 돈 먹는 사업’인데도 은행권이 생활 금융 서비스에 드라이브를 거는 데는 이유가 있다. 빅테크(네이버·카카오 등 대형 IT 기업)의 금융업 진출에 위기감이 고조되면서 은행 역시 새로운 시도를 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기 때문이다. 은행들은 뱅킹 앱으로 고객을 모으는 데 힘을 쏟았지만 이미 모바일 금융 서비스 부문에선 정보기술(IT)과 플랫폼으로 중무장한 기업에 고객들을 빼앗기고 있는 실정이다. 성과 지표 중 하나인 월간 활성화 이용자 수(MAU)만 봐도 지난 3월 카카오뱅크(1335만 명)가 KB국민·신한은행보다 2배 정도 더 많다. 뱅킹 앱에서 비금융 서비스를 제공해 기존 고객의 앱 체류 시간을 늘리고 신규 고객을 유치해야 하는 상황이다.

게다가 금융업계의 판도를 바꿀 것으로 예상되는 ‘마이데이터(본인 신용 정보 관리업) 사업’에선 비금융 데이터 확보가 필수다. 고객의 비금융 데이터를 더 많이 확보해 차별화된 개인 맞춤형 금융 서비스를 빠르게 선보여야 승자가 된다. 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은행 등 5대 시중 은행들이 올해 경영 키워드로 ‘비금융 플랫폼’을 꼽은 이유다. 윤종규 KB금융그룹 회장은 신년사에서 “빅테크의 본격적인 금융업 진출로 업종 간 경계가 모호해지는 빅블러(big blur) 시대에 완전하게 플랫폼 기업으로 변모해야 한다”면서 “자동차·부동산·헬스케어·통신 등 비금융 플랫폼의 성장을 통해 새로운 영역의 진출 기회를 모색해야 한다”고 말했다.
보험 청구·부동산 정보 제공 ‘눈독’
가장 눈에 띄는 격전지는 ‘실손보험 청구’ 서비스다. 지난해 2월 신한은행이 가장 먼저 선보인 데 이어 올해 우리·IBK기업·하나은행 등이 뛰어들었다. 서비스 내용은 대부분 비슷하다. 예컨대 고객은 증빙 서류를 스마트폰으로 촬영해 뱅킹 앱을 통해 제출하면 보험금을 청구할 수 있다. 제휴 병원을 이용했다면 진단서와 영수증 등 별도의 종이 서류를 발급받지 않아도 된다.

고객이 서류 발급 비용과 병원 방문 시간 등을 아낄 수 있어 이용자가 빠르게 늘어나고 있다. 특히 우리은행은 가장 많은 기관과 제휴사를 확보했다. 삼성화재·현대해상 등 31개 보험사, 세브란스병원·성모병원 등 90여 개 병원이다. 신청 건수도 출시한 지 4개월 만에 1만 건을 돌파했다. 신한은행이 1년간 1만6000건을 기록한 것과 비교하면 신청 건수 증가가 더 가파른 셈이다.

리딩 뱅크 자리를 놓고 경쟁 중인 KB국민은행과 신한은행은 부동산 정보 서비스에서도 맞붙고 있는 모양새다. KB국민은행은 아예 별도로 부동산 금융 플랫폼을 운영하고 있다. 올해 3월엔 차세대 버전 리브부동산(Liiv부동산)을 출시했는데 앱 다운로드 수가 100만 건을 돌파했다. 실거래가·매물가격·공시가격·인공지능(AI) 예측 시세·빌라시세 등 부동산 가격 정보를 한곳에서 조회할 수 있고 유튜브·구글·네이버·다음의 단지별 검색 결과를 한 번에 제공한다.

신한은행은 모바일 뱅킹 앱인 ‘쏠’ 안에 부동산 정보 서비스를 탑재했다. 매물·분양·청약·경매 등 부동산 콘텐츠를 고객의 거주지와 관심 지역, 보유 금융 상품 등 고객 정보와 결합해 맞춤형 정보를 제공한다. 신한은행은 부동산 정보 외에도 의료비·여행·야구 등 서비스를 ‘라이프’ 항목에서 제공하고 있다.

하나은행도 신한은행처럼 모바일 뱅킹 앱인 ‘하나원큐’에 부동산 정보 서비스를 집어넣었다. 빅데이터와 AI를 통해 개인 맞춤형 아파트 정보를 제공한다. 지난해 말 오픈해 현재 가입자는 16만 명이다.
핀테크·빅테크에 밀린 은행들…생활 밀착형 서비스로 반격
성장 시장 공략 잰걸음
최근 은행들은 비금융 서비스에 더 과감한 행보를 보이고 있다. 음식 배달, 편의점 택배 픽업, 중고차 직거래 등 성장하는 시장에 도전장을 내민다. 비금융 데이터 확보로 마이데이터 사업에 대비한 새로운 성장 동력을 확보하겠다는 구상이다.

가장 적극적인 곳은 신한은행이다. 신한은행은 음식 주문 중개 서비스인 배달 앱 시장에 진출하기 위해 이미 100억원이 넘는 돈을 쏟아부었다. 배달 앱 업체들이 초기 개발 비용으로 수억원 정도 투자했던 것을 고려하면 배달의민족 등 기존 업체들이 촉각을 곤두세울 만한 투자 규모다. 은행권에서도 비금융 투자에 100억원 이상을 투입하는 것이 이례적이란 평가다. 신한은행은 ‘데이터 확보’를 위해 식당 주인과 소비자를 대상으로 공격적인 마케팅을 진행할 것으로 보인다.

실본보험 청구 서비스로 소비자들을 사로잡은 우리은행은 개인 택배 배달·픽업 서비스와 미술품 소액 투자 서비스 등을 야심차게 준비하고 있다. 택배 서비스 역시 은행권에서 처음 시도하는 서비스다. 우리은행은 편의점을 물류 거점으로 삼아 택배 시장을 공략할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고객이 인근 편의점을 지정해 배달 픽업을 신청하는 방식이다. 미술품 소액 투자 서비스는 미술 작품을 여러 명의 투자자가 공동 구매한 후 소유권을 나눠 가진 뒤 제품을 재판매해 수익화하는 형태로 운영될 것으로 추정된다. 이를 위해 우리은행은 서울옥션의 공동 구매 플랫폼 ‘소투(SOTWO)’와 제휴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밖에 하나은행은 빅데이터를 기반으로 개인 간 중고차 직거래 서비스를 개발 중이고 NH농협은행은 꽃다발·화환·난 등을 주문받아 전국으로 배달하는 서비스를 준비하고 있다.

대부분의 서비스는 하반기 내 출시될 것으로 예상된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성장 산업은 기존에 자리 잡고 있는 시장들도 손실이 나고 있는 상황이다. 은행이 단순히 비금융 데이터 수집 만을 위해 택배·배달 앱 등 시장에 진입하기엔 리스크가 크다. 곧 옥석 가리기가 시작될 텐데 (은행이) 참여한다면 비금융 플랫폼 안에서 금융 상품을 판매하는 등 금융과 시너지를 낼 수 있는 서비스를 선보여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태림 기자 ta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