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운드리 팔고 디스플레이·전력칩만 남아
‘기술 먹튀’ 껍데기만 남긴 ‘하이디스 악몽’ 재현

[비즈니스 포커스]
매그나칩반도체 경북 구미공장 직원들이 아날로그 반도체 생산 재료와 장비를 점검하고 있다.  /매그나칩반도체 제공
매그나칩반도체 경북 구미공장 직원들이 아날로그 반도체 생산 재료와 장비를 점검하고 있다. /매그나칩반도체 제공
중견 시스템(비메모리) 반도체 기업인 매그나칩반도체가 중국 자본에 매각이 임박한 가운데 반도체 핵심 기술 유출 우려가 곳곳에서 터져 나오고 있다. 정치권도 반대하고 국민 여론도 부정적이다. 산업기술보호법에 따르면 국가 핵심 기술을 가지고 있는 기업의 해외 매각은 산업통상자원부(산업부) 인가가 필요하다. 산업부는 매그나칩반도체의 사업이 국가 핵심 기술에 해당하는지 들여다보고 있다.

매그나칩반도체는 2004년 SK하이닉스(당시 하이닉스반도체)에서 분사된 뒤 미국계 사모펀드 애비뉴캐피털에 매각된 비메모리 사업 부문이 모태다. 미국 뉴욕 증시에 상장된 회사로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패널 구동칩(DDI) 분야에서 삼성전자에 이어 세계 2위다. 2020년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 부문인 충북 청주 공장을 매각한 후 경북 구미 공장만 유지하고 있다.

‘반도체 블랙홀’ 중국…기술 탈취형 M&A 우려

매그나칩반도체는 올해 3월 자사주 전량을 중국계 사모투자펀드(PEF) 와이즈로드캐피털(WRC)에 14억 달러(약 1조6000억원)에 매각한다고 발표했다. 와이즈로드캐피털은 중국 베이징에 본사를 둔 중국계 PEF라는 점 때문에 매각을 둘러싸고 반도체·OLED 핵심 기술이 중국으로 유출되는 것 아니냐는 논란이 일었다.

매그나칩반도체 제품은 2000여 종으로 보유한 기술 특허는 첨단 DDI와 전력 반도체 관련 3000건이 넘는다. 회사 주력 기술들은 TV와 스마트폰의 OLED 패널을 작동시키는 핵심 반도체로 평가된다.

매그나칩반도체는 반도체 슈퍼사이클(초호황) 흐름을 타고 실적도 상승세다. 2017년 매출액 6억7970만 달러에서 2019년 7억9220만 달러를 올렸다. 2020년에는 전체 매출의 40%를 차지하던 파운드리 사업부를 SK하이닉스 등에 매각하고도 디스플레이·전력 솔루션(비메모리) 사업부만으로 약 5억7000만 달러의 매출액을 달성했다.

매각을 반대하는 측은 매그나칩반도체가 해외에 매각되면 OLED 디스플레이 패권은 물론 차량용 반도체의 핵심 기술까지 중국으로 넘어갈 수 있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구자근 국민의힘 의원은 “최근 가속화되고 있는 반도체 등 국가 핵심 기술 해외 유출과 관련해 보호해야 할 기술 범위를 대폭 확대하고 철저한 보호 정책을 마련해야 할 것”이라며 “국내 기업들에 우선적으로 매각될 수 있도록 관련 정책적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래픽=전어진 기자
그래픽=전어진 기자
매그나칩반도체가 가진 기술이 국가 핵심 기술인지에 대해 산업계 일각에서는 회의적인 시각도 존재한다. 한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매그나칩반도체는 외국계 회사가 중국 사모펀드에 매각되는 것이기 때문에 중국 경쟁사에 매각된 하이디스와 단순 비교하기는 어렵다”며 “이 회사가 가진 OLED용 DDI 기술 등은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와 동급은 아니다”고 말했다.

산업부가 매그나칩반도체의 기술 검토 과정에서 OLED용 DDI 기술을 국가 핵심 기술로 인정하더라도 중국 기업이 아닌 중국계 자본에 매각되는 것이어서 제동을 걸기가 어려울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매그나칩반도체는 본사와 생산 시설 등이 모두 한국에 있지만 주요 주주가 미국계 사모펀드인 외국계 기업이다.

매각에 부정적인 여론이 큰 이유는 그동안 중국이 단기간에 기술 격차를 줄이기 위해 인재 영입과 인수·합병(M&A)을 통해 반도체 기술을 확보하는 전략을 취하면서 한국 산업에 막대한 피해를 준 전례 때문이다. 중국 자본에 매각된 이후 ‘알짜 기술 먹튀’와 대량 해고 사태를 겪으며 껍데기만 남게 된 하이디스와 쌍용차가 대표적이다.

1989년 현대전자의 액정표시장치(LCD) 사업부문으로 출발한 하이디스는 경영난 이후 분사돼 2002년 중국 BOE에 매각됐다. BOE는 하이디스가 가진 초박막액정표시장치(TFT-LCD)를 비롯한 4300여 건 이상의 핵심 기술과 인력을 몽땅 넘겨받고 인수 4년 만에 하이디스를 부도 처리했다.

인수 당시 BOE는 중소 하청업체에 불과했으나 하이디스의 핵심 기술을 기반으로 LCD를 생산하면서 세계 1위 LCD 업체로 도약해 한국 디스플레이 기업들을 LCD 분야에서 사실상 철수하게 만들었다.

2004년 중국의 상하이자동차에 매각됐던 쌍용차도 마찬가지다. 기술 유출과 먹튀 논란으로 쌍용차는 2009년 결국 법정 관리에 들어갔고 적시에 투자를 받지 못하면서 생존의 기로에 놓여 있다. 이번 매각을 둘러싸고 하이디스·쌍용차 사태가 재현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왔던 이유다.

‘인재 뺏길라’ 중국에 빗장 걸어 잠그는 세계

한국도 국가 안보에 영향을 주는 핵심 기술에 대한 보호를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이에 정부는 산업기술보호법을 개정, M&A를 통한 국가 핵심 기술의 이전에 대한 규제를 강화한 상태다.

중국은 ‘제조 2025’를 통해 반도체 자급률을 70%까지 높이겠다는 반도체 굴기를 선언하며 1조 위안(약 170조원) 규모의 투자를 2015년부터 추진하고 있다. 중국과 반도체 기술 패권 전쟁을 벌이고 있는 미국은 자국 반도체 기업에 대한 중국의 M&A를 외국인 투자심의위원회(CFIUS) 등을 통해 무산시키며 기술 유출을 철벽 방어하고 있다.

미국은 세계 3위 D램 기업 마이크론에 대한 중국 칭화유니그룹의 적대적 M&A 시도, 중국계가 최대 주주로 있는 브로드컴의 퀄컴 인수 시도 등을 모두 막아냈다.

중국으로의 기술 유출뿐만 아니라 핵심 인력 유출도 심각한 문제로 꼽힌다. 중국 기업들은 미국의 제재로 반도체 굴기에 어려움을 겪자 부족한 기술력을 보완하기 위해 한국의 반도체 고위 임원과 엔지니어들에게 파격적인 대우를 약속하며 영입에 공을 들이고 있다.

2020년 6월에는 40년 동안 삼성전자에서 근무한 장원기 전 사장이 중국 시스템 반도체 기업 에스윈의 부회장으로 이직하려다 부정적인 여론에 부담을 느껴 입사를 철회하기도 했다. 장 전 사장이 합류하기로 했던 에스윈은 2016년 OLED 구동칩 설계를 주력으로 하는 기업으로, 중국 최대 디스플레이 제조 업체 BOE의 창업자인 왕둥성 회장이 설립한 회사다.

중국은 한국·대만·미국의 전문 인력을 영입하기 위해 막대한 자금을 쏟아붓고 있다. 세계 최대 반도체 파운드리 업체인 TSMC와 애플의 최대 부품 공급사 폭스콘을 보유한 대만에서는 정부 차원에서 중국으로의 반도체 분야 인재 유출을 막기 위해 채용 정보 사이트에 중국 업체의 구인 광고를 금지하고 위반할 경우 최대 500만 대만 달러(약 2억원)의 벌금을 물리기로 했다.

한국에서는 산업 스파이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는 추세다. 황운하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국가 핵심 기술의 해외 유출 시 법정형을 현행 3년 이상 유기 징역에서 10년 이상으로 높이는 개정안을 발의했다. 송기헌 의원은 산업 기술 해외 유출 시 신상 정보를 공개하고 손해배상액 한도를 현행 손해액의 3배에서 5배로 상향하는 법안을 발의했다.


안옥희 기자 ahnoh05@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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